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북한에 보낼 청구서'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1990년대 초 독일 통일 직후 현지 취재를 갔다가 손바닥 반 만한 베를린 장벽 조각을 산 적이 있습니다. 상인은 진짜 무너진 베를린 장벽이라며 비싼 값을 불렀고 저는 그의 말을 믿고 샀습니다. 당시 언론에 일반 돌을 색칠해 베를린 장벽이라고 속여 판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해 찜찜하긴 했지만, 그냥 기념품이라 여기고 구입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여행을 가면 국내 여행보다 대체로 비용이 더 듭니다. 거리가 멀어 교통비가 많이 들기도 하지만, 외국 여행에 들떠 돈을 평소보다 쉽게 쓰는 데다, 숙박, 요식 업소나 선물 가게들이 외국 관광객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경우가 잦아 그렇습니다.
북한이 외화벌이 일환으로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호기심 등에 이끌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을 찾는 미국인들이 있습니다. 고령의 한 미국인이 지난해 북한을 구경하러 갔습니다.
이 미국인은 2013년 12월 7일까지 약 한 달 보름 정도 북한에 있었습니다. 그의 북한 체류는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처음 열흘 정도는 공식적인 관광이었습니다. 온갖 경비는 모두 정산됐습니다. 그런데 2013년 10월 26일부터 12월 6일까지 42일간은 공식적인 관광 일정과 무관한 북한 체류였습니다. 마침내 12월 7일 베이징을 거쳐 귀국했지만, 이 기간에 북한에 머물면서 발생한 각종 경비와 관련한 사안은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북한이 얼마 전 여러 경로를 통해 그에게 북한 체류경비로 발생한 청구서를 건넸습니다. 청구서에는 3,241달러가 명시돼 있었습니다. 어림잡아 하루 77달러꼴이니 외국인이라고 해서 유난히 덤터기를 씌운 것 같진 않습니다. 북한당국이 작성한 청구서 내용을 짚어보면, 되레 저렴하게 계산한 것 같습니다.
이 미국인이 머물던 평양 양각호텔 방값이 하루 75달러와 60달러로 양분됐습니다. 관광 성수기와 비수기가 차별화됐습니다. 모두 성수기로 따져 과다 청구하지 않았습니다. 식사비는 591달러입니다. 하루 세 끼를 42일간 먹었으니 한 끼에 4달러 70센트로, 5달러가 안 됩니다. 북한 주민에겐 큰돈이지만 ‘관광객 물가’가 따로 있으니 비싸다고 할 순 없지요. 미국인이 미국에서 한 끼를 사 먹어도 보통 10달러는 듭니다.
여기에 후식비로 14달러가 추가됐습니다. 미국에선 후식이 일상화돼 있으니 후식비가 산정된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청구서에는 분실된 접시 값으로 3달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미국인이 접시를 실수로 깨뜨렸는지, 잃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북한 측이 접시를 일부러 빼돌리고 돈을 달란 것은 아닐 겁니다. 게다가 그는 북한 방문 당시 85살의 고령이고 심장병을 앓고 있어 그와 접촉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북한 관계자들 입장에서는 특별 봉사료를 청구할 만도 했을 겁니다.
결국, 북한 측의 청구서 내용은 적어도 수치상으로는 과도해 보이지 않습니다. 북한 당국은 이 미국인이 귀국한 뒤 청구서를 평양 주재 스웨덴 대사관에 보냈습니다. 북한에 미국 대사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청구서를 전달받은 미국 정부는 이를 그에게 송부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전 미국 CNN 방송 기자가 그의 북한 체류 상황을 묘사한 전자 책을 펴내면서 드러났습니다.
그렇다면 이 미국인은 북한의 청구서대로 낼까요? 본인의 입장을 밝히지 않아 심중을 알 순 없지만, 십중팔구 내지 않을 겁니다.
남의 나라에서 관광하면서 호텔에 묵고 밥을 사 먹었다면 돈을 내는 게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이 경우는 다릅니다. 이 미국인이 애초 관광 목적으로 북한에 갔지만, 북한 측으로부터 ‘적대행위’ 혐의를 받고 42일간 본인의 뜻에 반해 억류됐으며, 북한 측이 요구하는 체류비용이 이 기간에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미국의 가족들과 국제사회의 대북 호소 등에 힘입어 2013년 12월 7일 석방된 메릴 뉴먼 씨입니다.
뉴먼 씨는 하루라도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 싶었을 겁니다. 애초 관광일정 이후 북한 억류 기간의 하루가 한 달처럼 길었을 겁니다. 가족과 식탁에 둘러앉아 기쁜 마음으로 식사하는 것을 그리며, 평양에서 목메는 끼니를 때웠을 겁니다. 고령에 심장 약까지 먹은 뉴먼 씨는 “가족도 못 본 채 이렇게 평양에서 생을 마감하는 게 아닌가”하고 수도 없이 한숨지었을 겁니다. 뉴먼 씨에게 양각호텔은 교도소나 진배없었을 겁니다. 호텔 방에 전기가 환하게 들어왔어도 마음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캄캄했을 겁니다. 뉴먼 씨는 청구서를 지불하지 않은 가해자가 아니라, 북한당국의 처사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은 피해자입니다.
억류로 인한 본인과 가족의 고통, 그리고 인권을 생각하는 수많은 세상 사람들의 가슴앓이를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나 될까요?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만 달러는 될 겁니다. 이를 조목조목 기재해 청구서를 만들어 북한에 보내면 어떨까요? 뉴먼 씨에게서 청구서 지불을 기대하다가 새로운 청구서를 받을 북한 측의 표정이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