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 이렇게 자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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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동무, 이렇게 자르시오'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맵시에 신경을 씁니다. 우리 몸에 마음에 들지 않는 부위가 있어 수술칼을 들이대 성형을 하는 경우가 있지만, 돈이 많이 들고 심적 부담도 만만치 않으며 부작용으로 고통을 겪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이와 달리, 우리 몸에서 비교적 손쉽게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은 머리 모양입니다.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짧은 시간에 원하는 모양으로 바꿔 자신을 표출할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절기마다 새로운 머리 모양이 선보입니다. 애인과 교제를 하는 사람은 온통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모양에 마음을 둡니다. 직장인은 일터에서 구설에 오르지 않는 선에서 개성을 살립니다. 평상복을 입을 때와 특별히 한복을 입을 때의 머리 모양은 갖지 않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상처를 입으면 안정을 되찾으려 머리 모양을 바꾸기도 합니다. 북한주민이나 남한 사람이나 미국인이나 이런 마음은 비슷합니다.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니고 있다 해서 ‘팔색조’라 불리는 천연기념물 새처럼 다양한 머리 모양은 그때그때 다른 ‘천의 얼굴’을 만들어냅니다. 제가 일하는 미국 워싱턴의 거리에서 보행자들의 머리 모양을 보더라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합니다. 그리고 그 연출자는 개인입니다. 스스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자신을 뽐냅니다. 가끔 가족이나 주위에서 바람직한 모양을 권할 순 있지만, 최종 결정은 전적으로 본인의 몫입니다.

그런데 머리 모양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멋대로 하지 못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남한에서는 1970년대 머리가 길면 퇴폐풍조라면서 경찰이 단속했었습니다. 1982년 장발단속이 사라졌지만, 장발수난 시대엔 머리를 기르려는 젊은이들과 이들을 단속하는 경찰이 길거리에서 숨바꼭질하는 촌극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지요.

남한에선 약 40년 전 일인 머리 모양 단속이 북한에선 현재진행형입니다. 평양의 이발소나 미용실 벽에는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소개한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미용실 액자에 여자 18명, 이발소 액자에 남자 10명의 서로 다른 머리 모양 사진이 전시된 게 며칠 전 영국 언론에 보도됐습니다. 미용실이나 이발소에 가서 의자에 앉은 손님은 이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됩니다. 얼핏 보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모양으로 할까 하고 고민하지 않고 액자에 걸려 있는 모양 중에 번호를 지정하면 되니, 되레 간편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액자 속 모양이 맘에 들지 않는 경우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독특한 모양을 하고 싶은데 견본에 없을 때입니다. 남한이나 자유세계에서는 손님이 원하는 모양을 설명하면 미용사나 이발사가 그대로 해줍니다. 기이한 모양이라도 손님의 결정이 곧 법이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이처럼 여자 머리 18가지와 남자 머리 10가지의 틀에서 벗어나선 안 됩니다. 북한당국이 서구의 풍조가 유입되지 않도록 정해놓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국가가 공식 인가한 적격 모양이 아닌 것으로 머리를 손질했다간 서구의 풍조를 유입시킨 장본인이 됩니다. 자유세계에서는 머리 모양이 사람마다 천차만별인데, 북한에선 지정된 머리 모양 외에는 모조리 반사회적인 것으로 규정됩니다.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요.

북한 언론은 규정에 어긋난 머리 모양을 한 사람의 이름을 공개해 사회적 오명을 씌웁니다. 그러니 남한의 드라마에 나온 인기 배우들의 머리 모양을 본뜨고 싶어도 지정된 모양에 들어 있지 않으면 따라 하는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북한은 제 머리조차 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남한이나 미국에서도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은 엄마 손에 이끌려 이발소나 미장원에 갑니다. 엄마가 머리 모양에 대해 강하게 훈수를 둡니다. 이는 사리분별을 제대로 못 하는 어린 자녀를 위한 진정한 배려입니다.

하지만, 북한당국이 어른의 머리 모양까지 일일이 골라 주는 것은 불필요한 ‘배려’입니다. 이러한 ‘배려’가 주민들의 자유를 꽁꽁 묶고 창의성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주민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정권을 위한 배려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