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진단하는 뉴스해설 '박봉현의 북한전망대' 시간입니다. 오늘은 '반짝 개방'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중국 중앙텔레비전방송인 CCTV가 10월 10일 북한 노동당 창건 65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 광경을 보도했습니다. 평양의 김일성광장에서 군 고위간부가 천장이 없는 차량에 올라타 머리를 내놓고 엄숙하게 서 있었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르더니 이 간부는 차 안에 설치된 마이크 앞에서 젖먹던 힘까지 토해내 "앞으로 갓!"하고 외쳤습니다. 한국 군이 열병식을 할 때 하는 것과 같은 구령이었습니다. 기념식은 이렇게 남북한의 동질감을 조금 풍기면서 시작됐습니다.
북한이 사상 최대 규모로 준비한 이번 기념식엔 1만여 명의 군인이 참여했고 미사일, 탱크 등 무기가 선보였습니다. 이번 기념식에 특이할 사항은 북한답지 않게 기념행사를 세계언론에 공개한 점입니다. 초청장을 받고 급히 김일성 광장으로 날아간 전 세계 80여 기자들은 평생 한 번 볼까말까한 광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
카메라에는 자유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들이 잡혔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카메라가 행사장 관람객을 비추었습니다. 여성 준장이 대령, 중령 등 부하 7-8명을 인솔하면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군대가 계급사회라 해도, 권위주의적인 북한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지시하고 이끄는 모습이 이채롭습니다.
아랍계 텔레비전 방송인 알자지라는 1%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북한의 군대 행사에서 틈새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입을 돌처럼 굳게 닫고 있는데 대령 한 사람이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열병식을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경직된 사회의 딱딱한 기념식에서 예상하기 어려운 느긋한 모습이었습니다.
기념행사가 끝나 시민들이 귀가하는데 한 남자가 잰걸음을 하면서 기자의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거미줄처럼 빈틈없이 짜여진 행사 후에 평범한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자유세계의 일상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은 가물에 콩 나듯 미미했습니다. 기자들의 카메라에는 세습독재체제에 익숙한 북한주민의 경색된 사고방식이 탁본처럼 선명하게 도드라졌습니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기자가 북한여성들을 만났습니다. 노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한 젊은 여성은 영어로 당 창건 기념일을 소개했습니다. 이 여성은 외부세계가 북한을 잘 몰라 이번 기회에 북한을 알도록 행사를 공개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 옆에 있던 다른 여성은 김정은을 찬양하는 노래 '발걸음'을 불러달라는 기자의 요청에, 북한정부의 김정은 우상화 기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흥에 겨워했습니다.
미국의 ABC방송 기자는 또 다른 여성에게 다가가 "김정은이 몇 살입니까? 김정은에 대해 압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 여성은 작은 소리로 "모른다"고 답하고는 기자에게 "텔레비전에서 (김정은을) 본 적이 없으세요?"하고 엉뚱한 질문을 던져 불편한 상황을 모면하려 했습니다.
캐나다 통신사인 로이터의 기자는 한 중년 여성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여성은 붉은색 꽃다발을 들고 아주 기쁨에 찬 모습으로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산 혈통에 긍지를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일말의 의구심도 없어 보이는 이 여성의 표정이나 말에서 폐쇄사회인 북한이 수십 년 간 시행해 온 세뇌교육의 위력이 읽힙니다.
미국의 CNN방송은 독재에 길든 주민들이 김정일-김정은 부자를 향해 두 손을 높이 들어 환호하고, 발을 구르며,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는 모습을 내보냈습니다. 자유세계에서는 구경하기 어려운 도식화한 북한의 단면입니다.
미국의 ABC방송은 열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는 한 남자가 4-5살쯤 돼 보이는 아들을 목말 태운 것을 화면에 실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는 군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자자손손 면면히 이어지는 선군정치의 짙은 그림자를 연상케 했습니다.
북한이 이번 기념식을 외부세계에 공개한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문을 열어 그토록 자랑스럽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참모습을 바깥세상에 아낌없이 드러내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기념식의 '반짝 개방'은 이미 과거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북한은 행사가 끝나자 다시금 빗장을 굳게 걸어 잠궜습니다. 밖으로부터의 변화를 우려해서입니다.
이제 북한 스스로 변화할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군복 입은 어린이의 영상이 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고리타분한 선군정치와 중첩되면서 우려를 낳습니다. 북한의 진정한 변화가 기약 없는 일임을 일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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