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남북녀의 세상사는 이야기] 가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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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닝 멘트]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남남북녀의 세상사는 이야기>시간입니다. 진행에 노재완입니다.

요즘 한국의 가을 들판은 황금물결로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농민들은 이런 모습을 보면서 한해 고생하던 일들을 다 잊습니다.

북한은 가을걷이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나 여기 한국은 아직도 가을걷이가 한 창입니다.

그런데 북한과 달리 한국은 가을걷이 때가 돼도 조용합니다. 왜냐고요? 사람 대신 기계가 거의 모든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저 기계를 작동할 몇 명만 있으면 됩니다.

금년은 유난히 농사짓기 어려운 해였죠? 봄에는 늦게까지 추위가 이어졌고, 여름은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과연 올해 농사가 잘될까 걱정했었는데요. 다행히도 가을볕이 좋아서 예년 수준은 된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가을걷이에 대한 얘깁니다. 오늘도 탈북자 이하영 씨와 함께 합니다.

노재완: 안녕하세요?

이하영: 네, 안녕하세요.

노재완: 주말엔 비도 오고 조금 쌀쌀했잖아요. 뭐하면서 보내셨어요?

이하영: 토요일엔 비가 와서 그냥 집에 있었고요. 일요일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에 다녀왔습니다. 보트 놀이도 하고 주변에서 맛있는 음식도 사먹고 재밌게 놀았습니다.

노재완: 맞아요. 포천에 산정호수가 유명하죠. 저도 예전에 친구들이랑 배 타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맘때 가면 단풍 구경도 하고 아주 좋습니다.

이하영: 산정호수 주변의 들판을 보니까 가을걷이하는 농민들이 보이더라고요. 아침나절 큰 벌판에 가을걷이 기계 한 대가 일을 시작하는 것을 봤는데 해질 무렵 보니까 그 넓은 논이 깨끗이 돼 있는 거예요. 벼를 다 베었다는 뜻이잖아요. 너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재완: 요즘은 워낙 기계가 좋으니까요. 대형 수확기인 꼼빠인(콤바인) 1대면 웬만한 논은 하루면 거의 다 한다고 하더라고요.

이하영: 이미 추수를 끝낸 논에는 커다란 흰 덩어리가 있어 신기해 자세히 봤는데, 볏짚을 비닐로 포장한 것이더라고요.

노재완: 아, 그거 나중에 발효해서 겨울철 소먹이용으로 쓰는 겁니다.

이하영: 그러니까요. 그 많은 것을 자동으로 말아놓은 것을 보면서 기계의 위력을 실감했습니다. 100명이 하는 일을 기계가 혼자서 아주 깔끔하게 했다고 생각하니 입이 저절로 벌어지더라고요. 얼마 전 집들이 하는 친구 집에 갔다가 맛있는 밥을 먹었는데 너무 밥맛이 좋아서 이 쌀을 어디서 샀느냐고 물었더니 파주에서 햇볕에 말린 쌀이라고 해서 부탁해 저도 20킬로 한 포대를 사서 밥을 지었는데 빛깔도 좋고 맛있었어요.

노재완: 올해엔 태풍이 일찍부터 찾아왔잖아요. 그렇지만 다행히 큰 피해를 주지 않았고, 8월 넘어서는 일조량이 많아 올해도 예년 수준의 풍년을 이뤘다고 하네요. 아마도 올해도 쌀이 많이 남아서 저장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하영: 여기 남쪽에서 농사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이 주로 하는데, 하는 듯 마는 듯 너무 조용조용히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해마다 풍년을 이루는 것을 보면 그저 신기할 따름입니다.

노재완: 농촌엔 젊은이들이 거의 없죠. 대부분 도시에 나가 일을 하니까요.

이하영: 그렇지만 젊은이들이 도시에 나가 일하는 것도 무척 중요한 일이잖아요. 대기업에서 자동차, 큰 배를 만들어서 팔고 컴퓨터도 만들고 휴대전화 등을 수출해 외화를 많이 벌어들이고 국가적으로 보면 더 큰돈을 벌 수 있으니 굳이 농촌에 남아 일하라고 강요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노재완: 경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하영 씨의 말이 맞죠. 중공업의 부가가치가 대단히 크니까요. 그동안 농사만 짓고 살았으면 한국이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하영: 한국에서 매끼 밥을 먹을 때마다 저는 고향 생각을 자주 합니다. 70년대부터 북한에서는 "쌀이 곧 공산주의다"라고 했는데, 여기 남쪽에서 넘쳐나는 쌀을 볼 때마다 더욱 그 말이 생각납니다. 70년대까지는 한국과 북한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오늘의 남과 북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입니다. 솔직히 북한이 못 사는 게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단지 지도자를 잘못 만나 공산주의를 선택해서 누구나 다 잘사는 사회가 아니라 다 같이 못사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나 상관없이 사람들을 잘살게 하는 것이 좋은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남쪽은 국민이 스스로 지도자를 뽑아 생활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민주주의를 해서 정치가 투명해졌고, 그러면서 시장에 의해 경제가 돌아가 성장을 이뤘습니다. 그중에서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회복지로 먹여 살렸습니다. 지도자 선택과 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지금 북한은 거의 모든 농촌에서 가을걷이가 끝났을 겁니다. 여기보다 조금 일찍 추수가 시작되거든요.

노재완: 아무래도 북쪽이 여기 남쪽보다 추위가 빨리 오니까요. 보통 서리가 내리기 전에 추수하잖아요.

이하영: 네, 북한은 보통 9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추수를 시작합니다.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조선중앙텔레비전 등 선전매체는 가을걷이를 다그치는 선전물을 계속 방송하며 '깜빠니아'를 벌입니다.

노재완: 방금 '깜빠니아'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떤 내용을 갖고 선전합니까?

이하영: 이를테면 "한해 농사를 결속 짓는 가을걷이야말로 모두가 떨쳐나 짧은 기간에 해제껴야 할 중요한 영농과업이다. 그리고 모든 역량을 가을걷이에 집중하여 제철에 와닥닥 끝내자." 뭐 이런 식이죠. 거의 전투적 구호입니다.

노재완: 문제는 구호대로 학생들과 도시의 근로자들까지 동원해 가을걷이에 온 힘을 다하지만, 해마다 농사를 망친다는 사실입니다.

이하영: 말은 이상 기후 때문이라고 하지만, 실상 남한은 해마다 풍년이잖아요. 한반도가 무슨 중국 땅처럼 큽니까. 아니잖아요. 실제로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는 남쪽이 북쪽보다 더 심합니다. 그런데도 북한이 농사가 안 된다는 것은 자연재해 때문이 아니라, 인재입니다. 비료를 만들지 못하고 농업 기술이 낙후됐기 때문이죠. 특히 농기계가 부족하고 기계가 있더라도 연료가 없어 돌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아직도 직접 낫으로 추수하는 곳이 많은데요. 그러다 보니 추수하는데도 두 달씩 걸리는 등 가을걷이를 제때 끝마치지 못해 낟알 손실이 큽니다.

노재완: 또 이런 이유도 있지 않을까요. 내가 열심히 일해도 그게 내 쌀이 아니고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벼를 베더라도 한 알 한 알 제대로 베지 않고 대충 대충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하영: 물론이죠. 빨리해서 그 면적을, 그날 수행해야 할 면적이 있으니까 그렇게 대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북한은 해마다 식량이 100만 톤가량이 부족하다고 하는데요. 올해도 과연 어떻게 식량 부족을 해결해 나갈지 걱정입니다. 한국은 산업화 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접어들었음에도 북한은 여전히 기계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만 하려니 힘은 힘대로 들고 또 결과는 점점 나아지는 생활이 아니라 밥도 먹기 어려운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이야기 했을 겁니다. '이밥에 고깃국'을 말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고기는커녕 이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있으니 한심하고 통탄할 노릇입니다. 정말 이밥은 아니더라도 잡곡만이라도 배부르게 먹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노재완: 네, 그런 날이 빨리 와야 하겠죠. 아무쪼록 쌀쌀한 날씨 건강관리 잘하셔서 이 가을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네, 오늘 <남남북녀의 세상사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완 이하영, 제작에 서울지국이었습니다. 함께 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