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노정민의 <라디오 세상> 시간입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3년이 됐습니다. 3년 1개월 동안 계속된 전쟁은 민족의 분열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분단 체제를 강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는데요,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비극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 주민은 6․25전쟁과 관련해 사실과 다른 교육을 받음으로써 남북 간의 갈등이 더욱 깊어가는 원인이 되고 있는데요, 그래서 오늘 <라디오 세상>, "6․25 특집 - 아하, 그렇군요" 시간에서는 '6․25전쟁'의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알기 쉽게 짚어보려고 합니다.
<한국 전쟁기념관의 서규화 학예부장과 함께>
- 6․25전쟁은 '남침'인가요? '북침'인가요?
- 6․25전쟁은 당시 한국을 식민지배한 미국이 주도한 것 아닌가요?
-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군사력 차이는 어땠나요?
- 현재 6․25전쟁에 관한 중국의 견해는 무엇인가요?
- 한반도는 어떻게 '38선'으로 나뉘게 되었나요?
특별히 오늘 이 자리에는 북한에서 온 김명희 인턴기자가 함께했습니다.
- 김명희 씨 안녕하세요.
[김명희] 네, 안녕하세요.
- 네. 오늘은 명희 씨와 함께 '6․25전쟁'에 대해 함께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우선 명희 씨는 북한에서 '6․25전쟁'에 관해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해요.
[김명희] 저는 많은 기록영화와 자료를 통해 1950년 6월 25일 평온한 주말 아침, 남한에서 미군 괴뢰도당과 함께 북한을 선제공격했다고 배웠어요. 물론 북한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배우고 있죠.
- 그래서 저희가 사전에 '6․25 전쟁과 관련해 북한 주민이 궁금해할 것 같은 질문'을 선정해 전문가에게 물어봤잖아요. 명희 씨가 북한 청취자를 대표해 북한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궁금한 점을 선정했고, 저희가 질문 하나하나를 한국 전쟁기념관의 서규화 학예부장과 함께 짚어가길 원하는데요, 우선 첫 번째 질문을 해주시겠어요?
[김명희] 네, 저는 '6․25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가 가장 궁금하거든요.
- 네. '남침'은 북한에서 남한을 선제공격한 것을 뜻하고, '북침'은 남한에서 북한을 공격한 것을 말하는데요, 가장 근본적인 사실부터 충돌하는군요. 그럼 서규화 부장의 설명을 들어볼까요?
[서규화 학예부장] 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북한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요, 이전에도 여러 가지 자료가 있었지만, 특히 구소련을 승계한 러시아가 1994년에 비밀문서를 공개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을 만났을 때 공개된 자료를 저희가 인수했고요, 거기에 스탈린과 김일성, 모택동이 주고받았던 비밀문서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스탈린과 중국의 모택동, 북한의 김일성이 합작 모의해서 1950년 6월 25일에 대한민국을 침략한 전쟁이라는 것이 명확히 나옵니다. 또 러시아의 교과서에도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나오는데요,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북한밖에 없습니다.
[김명희] 네. 6․25전쟁을 북침이라고 주장하는 나라는 정말 '북한'이 세계에서 유일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북한에서 6․25전쟁에 대해 배웠을 때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라고 배웠거든요. 그럼 결국 미국의 의도로 6․25 전쟁이 발발한 것 아닌가요? 이점도 궁금한데요,
- 네, 그럼 이 질문에 대해서도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서규화 학예부장] 네, 우선 북한 주장을 살펴보면 미국이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사주해 북침을 하게 했고, 북침한 상황에서 북한이 할 수 없이 남한을 미국의 식민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공격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북한 스스로 한민족에게 아픔을 준 6․25전쟁에 대한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쓰는 술수지요. 그런데 잘 알다시피 우리 대한민국은 유엔 감시하에 자유선거를 하고 1948년 8월 15일에 수립된, 유엔에서 승인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입니다. 국민의 의사가 반영된 정부가 수립됐죠. 그렇기 때문에 식민지는 말이 안 되고요, 그때 유엔 선거관리위원단이 북한지역에 들어가려 했지만, 소련의 지시를 받고 거부했죠. 오히려 소련이 옹립한 북한의 김일성이 공개투표로 수상이 됐기 때문에 엄격히 말하면 북한이 소련의 정부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김명희] 설명을 들어보니 남한이 미국의 식민지가 아니라 오히려 북한이 소련의 종속국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
- 그런데 명희 씨가 또 궁금해했던 점은 당시 남한과 북한 간 군사력 차이였잖아요.
[김명희] 그럼요. '전쟁을 준비한 나라가 당연히 군사력을 더 갖추지 않았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북한의 군사력은 거의 없었다고 배웠는데, 그때 남북한의 군사력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서규화 학예부장] 네, 그것은 병력과 무기 장비로 구분할 수 있는데요, 북한이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예를 들어 남한의 병력은 10만 명이었는데 북한은 20만 명이었고요, 20만 명 중에서도 전투경험이 풍부한 참전군인들이 6․25직전에 많이 입북했습니다. 이 요원들이 남침의 선봉에 섰죠.
장비 면에서는 북한은 야크 전투기를 포함해 전투기가 211대 있었습니다. 남한은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죠. 연습기나 연락기 등 22대를 보유했고요, 공격무기인 전차는 북한이 242대를 갖고 있었지만, 남한은 한 대도 없었습니다. 장갑차만 몇 대 있었죠.
야포, 박격포 등도 북한이 월등히 앞섰습니다. 무기를 보유한 숫자만 봐도 남한은 도저히 공격할 수 없는 전투력이었고요, 북한은 완전히 공격을 위한 무기를 갖췄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군사력에서 균형이 깨졌을 때 전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북한이 월등히 병력과 무기가 많았습니다. 이것은 6․25전쟁이 일어나는 요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 명희 씨, 궁금증이 좀 해소됐나요?
[김명희] 네. 이제야 6․25전쟁이 누구에 의해 시작됐는지 명백해진 것 같아요. 또 이 방송을 듣는 북한 주민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런데 북한에서 6․25전쟁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중국 군인들이 남한의 북침을 막기 위해 북한군과 함께 용감히 싸워주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거든요. 그렇다면 현재 6․25전쟁에 관한 중국의 견해, 입장은 무엇인지, 중국은 6․25전쟁을 남침이라고 하는지 북침이라고 하는지 궁금합니다.
- 네, 그 질문은 저도 궁금했던 점이거든요. 지금 중국은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이 점에 대해서도 서규화 부장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서규화 학예부장] 6․25전쟁은 소련과 중국, 북한이 모의해서 일으킨 전쟁이지 않습니까?
소련은 공식적으로 자기와 관련이 없다고 발뺌을 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실제 전쟁에 가담했죠. 중국은 6․25 전쟁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자기가 참전했던 전쟁과 이전전쟁, (그 이전 전쟁을 '조선전쟁'이라고 하고 이후 전쟁을 '항미원조전쟁'이라 하는데) 중국은 본인들이 직접 참가했기 때문에 북한과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중국도 북침이라고 인정하고 있죠.
그러나 중국에 있는 군사학자들은 남침임을 알고 있습니다. 소련에서 문서가 나왔다는 것도 알고 있죠. 중국이 한국과 수교했고, 6․25전쟁과 같은 민감한 문제는 잘 언급하지 않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는 학자들은 남침을 인정하고 있는데요, 중국 정부는 아직 북한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곧 바뀔 겁니다. 명확한 자료가 많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 역시 중국도 공식적으로 6․25전쟁이 남침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많은 군사전문가는 '북한이 먼저 남한을 공격한 전쟁'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하네요.
[김명희] 네. 6․25전쟁과 관련해 이미 명확한 자료들이 러시아에서 많이 나왔잖아요. 그래서 중국에서도 곧 6․25전쟁과 관련해 올바른 입장을 밝힐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궁금한 점이 또 있는데요, 우리가 6․25전쟁 하면 이산가족도 많이 생각하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면 38선이 떠오르는데, 어떻게 한반도가 38선으로 나뉘게 됐는지도 궁금합니다.
[서규화 학예부장] 2차 세계대전 중에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였는데, 일본이 미국의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습니다. 그렇게 일본군이 너무 빨리 항복했고, 한반도의 무장해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이 '38선 이북은 소련', '이남은 미국'이 한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그래서 38선이 처음 생겼고요. 이후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미국과 소련이 노력하지만, 의견일치가 잘 안 됩니다. 당시 소련은 동부 국가들을 이미 공산화시키지 않았습니까? 또 소련은 북한에 관해서도 자신들의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다 보니 협의가 잘 안됐죠.
결국, 이 문제를 세계 평화를 위해 설립된 기구인 유엔으로 넘겼습니다. 당시 유엔이 결의한 것은 유엔의 감시하에 남북한이 전체의 자유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가 반영된 정부를 수립하도록 결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소련과 북한이 반대했죠. 그때 유엔의 감시하에 선거를 했으면 남북한은 38선이 제거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유엔 결의를 따르지 않은 소련에 분단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네, 명희 씨 오늘 6․25전쟁과 관련해 전문가로부터 배경과 역사적 사실을 들어봤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김명희] 네, 귀중한 말씀 감사드리고요, 한국에 입국했을 때 북한에서 배운 6․25전쟁과 다른 역사적 사실이나 영상물을 보면서 '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나?' 고민이었거든요. 또 '지금 한국과 북한이 냉전상태에 있으니까 서로 자기의 말이 옳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란 생각도 했거든요. 그런데 오늘 전문가로부터 6․25전쟁에 관해 역사적 사실을 하나하나 짚어보니까 이제는 확실하게 '6․25전쟁은 남침이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규화 학예부장] 저희는 6․25전쟁 발발일을 더 많이 기념합니다. 북한에서는 7.27을 정전 협정일을 더 기념합니다. 이유는 6․25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민족에게 많은 고통과 아픔을 준 전쟁이 시작된 날이기 때문에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겠죠. 또 대한민국에서는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하자는 뜻이죠. 우리의 국방태세가 미흡해서 이것을 막지 못했다는 반성의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6․25를 기념하는 것은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방지하기 위해, 또 다시는 잊지 말자는 취지에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6․25전쟁은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민족의 비극이란 말을 많이 하는데요, 6․25를 기념하는 것은 과거의 전쟁을 기억하면서 내일의 평화를 기약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분단과 전쟁의 아픔 대신 이제 남한과 북한이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나가길 함께 기대해봅니다. 명희 씨, 오늘 고맙습니다.
[김명희] 네, 고맙습니다. 저도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노정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