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중국내 탈북자들의 구출 사업을 돕기 위해 10년째 미국 뉴욕에서 탈북난민돕기 모금 음악회를 열어오고 있는 음악가 서병선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미국 최대 도시에서 뉴욕예술가곡연구회를 이끌고 있는 성악가 서병선 회장은 매년 두 차례 ‘탈북난민돕기모금음악회’를 열어 여기서 얻은 수익금을 탈북자를 구출하고 있는 선교회에 10년째 지원하고 있습니다.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 9월 12일 음악회를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들었습니다. 청중이 많았습니까?
서병선
: 네, 성전이 가득찼죠.
전
: 어디서 했습니까?
서
: 한국분들이 많이 모여사는 플러싱지역에 뉴욕효신장로교회라고 있습니다. 거기서 10년째 탈북난민돕기음악회를 해오고 있습니다.
전
: 음악회 이름이 ‘탈북난민돕기모금음악회’인데요, 청중들은 음악회 취지를 알고 오겠죠? 서 회장님은 음악회 취지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서
: 인류역사상 어려움에 처한 난민들이나 가난한 국민들은 있었지만 탈북난민처럼 어려움에 직면하고 먹을 것이 없어서 먹을 걸 찾아 나선 무고한 생명들을 잡아서 처형시키는 이런 비극은 역사상 일찌기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악회에 오신 분들이 아름다운 가곡을 즐기기 위한 것 보다는 동포애를 품고 이 음악회에 와서 도와야겠다는 뜻으로 오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전
: 그런 취지에 동감하고 동참하겠다는 청중들 못지않게 음악회에 출연하시는 성악가나 연주가들도 그러할 것 같은데요?
서
: 네, 그렇습니다.
전
: 음악회에 출연한 성악가 중에 탈북자를 돕다가 숨진 선교사의 따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서
: 네. 소프라노 박진원씨인데요. 자기 아버님이 어느 선교회에 소속된 것도 아니고 자비로 탈북자들 돕다가 교통사고로 순직한 분이죠.
전
: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을 도우신 겁니까?
서
: 그렇죠. 중국가서 탈북자를 돕고 계속 그 일을 하시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주 귀한 사역을 하신 분이죠.
전
: 서 회장님은 테너를 하시는데, 탈북자 구출 사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하신 동기는 무엇입니까?
서
: 아직도 기억합니다만2000년 1월 12일날 윤성신 씨라는 40대 초반 주부가 전화를 주셨습니다. 탈북자들의 현장을 갔다왔는데 그 다음날 플러싱 식당지하에서 현장 취재 비데오를 상영하려는데 그 자리에서 가곡을 불러달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가곡 두 곡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100여명이 꽉찬 방에서 비데오를 봤는데 탈북자가 어렵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렇게 못먹고 뼈만 남아 쓰러질 지경에 있는 어린이들, 또 그 추운 겨울에 신발 양말도 신지않고 맨발로 다니다 얼음이 배겨 퉁퉁 부은 다리를 이끌면서 먹을 걸 찾는 아이들, 그런 광경을 보고 저는 3일동안 누가 말릴 수도 없도록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래서 ‘아, 탈북난민돕기 음악회’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원래 장애인 돕기 음악회를 계획했었는데 뜻을 바꿔 탈북난민음악회를 시작한 거죠. 2천년 3월 25일 제 1회 음악회를 열었는데, 그때 모금을 8천달러 했습니다. 헌데 이 일이 장기간 계속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탈북자들이 있는 현장에 가서 고생하는 꽃제비 어린이들을 직접 봐야되겠다는 생각이 꽉 찾습니다. 그래서 모금한 8천불을 가슴에 차고 중국에서 10년 동안 사역을 하신 남목사님이란 분하고 도문, 훈춘, 연길 등 탈북자들이 가장 많이 숨어사는 곳으로 갔습니다. 도문에 갔더니 많은 선교사들이 다닥 다닥 붙은 집에 탈북 어린아이들을 숨겨 양육하더군요. 다섯 어린아이가 있는 집을 방문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말을 못하더라구요. 왜그런가 했더니 양분을 섭취하지 못해 정신박약아가 된거에요. 눈만 뜨고 있지 식물인간인 거죠.
전
: 영양실조가 심해서 그렇게 됐다는 거군요.
서
: 그렇죠. 근데 꽃제비 어린이들의 3분의1이 모두 그런 지경이라고 들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속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전
: 서 회장님 고향은 어디십니까?
서
: 경기도 광주입니다.
전
: 이산가족이 북쪽에 있습니까?
서
: 아무도 없습니다.
전
: 그러니까 북한에 혈육이 있거나 이남으로 피난 온 배경도 없군요.
서
: 그렇죠. 그런데 그 밑바닥의 동기는 제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했을때 물만 마시고 잠을 잔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굶주린 고통은 실제 당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습니다. 배가 끊어지는 듯이 아픕니다. 그런 고통을 아니까 탈북자와 못먹어 배고픈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우러나서 지금까지 전심전력으로10년 간 음악회를 하고 있는데 그 뜻에 동참하는 한인들의 감동적인 동포애에 깊이 감사하게됩니다. 지난 음악회에서는 보통 10,000불을 걷었는데 이번 음악회에서는 11,000불을 걷어 전해 더욱 기쁩니다.
전
: 서 회장님은 음악가신데요, 성악을 전공하셨죠? 서: 그렇습니다. 서울 음학대학교 3년을 마치고 1969년에 미국에 와 1970년부터 줄리아드에서 공부했습니다. 문: 미국에서 유명한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공부하셨군요. 그리고 나선 뉴욕에서 음악가로 계속 활동하셨구요.
서
: 네.
전
: 근데 이번 음악회에서 11,000불을 모아 전달해 주셨다는 탈북자 지원단체, 그 단체를 소개해 주시죠.
서
: 8백여명의 탈북자들 한국으로 구출했고 70여명의 난민을 미국으로 입국시킨 두리하나 선교회입니다.
전
: 구출이 돼서 미국에 온 탈북자들과 만나본 적이 있으십니까?
서
: 네.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전
: 언제였고 어떤 분이었는지 소개해 주시죠.
서
: 영어이름은 그레이스라고 하는 탈북자인데요 키는 자그만한데 얼마나 꽃처럼 아름답고 우아한지 몰라요. 이 분이 저희 도움으로 몇년 전 미국에 왔는데 작년에 음악회 끝나고 전화가 왔어요. 그 음악회[성금]덕분에 2년동안 헤어졌던 자기 엄마가 구출됐다고 울먹이면서 감사하는 전화였어요.
전
: 그러니까 어머니와는 헤어져 먼저 구출된 경우였군요?
서
: 그렇죠. 그레이스는 먼저 구출됐었구요. 근데 작년에 저희 음악회 수익금으로 탈북자 9명이 구출됐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그레이스 엄마였습니다. 그래서 그레이스가 엄마를 만나러 서울에 얼마 전에 갔다왔습니다.
전
: 그러면 그 엄마는 구출되어서 한국으로 간 모양이죠?
서
: 그렇습니다.
전
: 굉장히 좋았겠네요.
서
: 아주 감격스런 순간이었죠. 헤어질때는 다시 만날 수 있을 지도 몰랐으니까 아주 감격스러웠습니다.
전
: 탈북난민돕기 음악회 벌써 10년째인데요 앞으로도 계속 하실겁니까?
서
: 네. 제가 살아있는 날 까지. 왜냐면 이 지구상에 오직 하나뿐인 잔악한 독재자를 붕괴시키는 길은 탈북자를 한 사람이라도 자유의 품으로 더 껴안아야 하고, 이것이 북한정권 붕괴의 직접적인 힘이 된다고 믿습니다. 또 죽어가는 생명을 하나라도 살리는 것이 인류애의 실천이고 해서 살아있는 날 까지 할 각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