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한국에서 탈북자로서는 처음으로 북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병욱 씨. 북조선에서 도 인민위원회와 군수동원기관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했던 그가 가족과 함께 탈북해 2002년 말 한국 땅을 딛은 지 8년 만입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연구자의 생활, 북한에서는 부모님 성분 나빠 못했던 한을 남쪽에서 풀었습니다. 박사학위 따자마자 탈북자들의 한국정착에 도움을 주기 위한 연구작업에 힘을 쏟고 있는 김병욱 박사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한국에 입국해 어떤일 부터 시작했습니까?
김병욱 박사: 오자마자 처음 시작한 게 컴퓨터 배우기였습니다. 한국정보문화진흥원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컴퓨터나 타자를 할 줄 몰랐습니다. 컴퓨터 배우고 그 다음해에 석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경남대 북한대학원대학을 졸업했고 박사과정은 동국대에서 했습니다.
전: 석사과정에서 전공은 무엇이었습니까?
김: 북한경제를 했습니다.
전: 북한에서는 이공계통의 공부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김: 네. 섬유산업 분야의 이공계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 남한에 와서 인문계로 바꾼 것입니다.
전: 섬유산업을 공부하신 분이 남한에서 왜 하필 북한경제를 공부하게 됐습니까?
김: 섬유쪽을 해 보려했는데 남한에선 사양산업이더라구요. 북한은 여기 남한의 70년대 설비들이었는데 북직기 같은 뒤진 기술가지고 여기서 다시 섬유산업을 배우기보다는 북한문제에 관한 연구를 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았습니다.
전: 그러니까 북한과 남한의 산업발전 수준의 차이로 한국에선 섬유산업이 이미 사양산업으로 됐단 얘기네요?
김: 네. 그것이 우리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북한 전공을 활용하지 못하는 이유의 하납니다. 그래서 육체적 노동 일에 몰리는 원인도 됩니다.
전: 동국대 박사과정에서도 공부를 경제관련으로 했습니까?
김: 거기선 통일정책을 전공했습니다.
전: 석사과정에서는 경제를 배우고 박사과정에선 통일정책을 공부하셨다는 말씀이네요.
김: 네. 탈북자 출신 연구자들은 대체로 북한에 대한 연구 분야의 폭이 넓습니다. 제 경우 2008년부터 시작해서 등재학술지급에 열 군데 논문을 실었습니다. 올 1월에 발표한 논문 주제는 ‘북한이탈주민에 의한 북한이탈주민 전문상담연구’에 관한 것이었고 작년 12월에 발표한 것은 ‘북한사회 수령교와 타종교권 선교에 따른 북한선교’ 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 논문 바로 전에 나간 건 ‘선군시대 북한주민의 사회적 신분변화에 관한 연구’였습니다. 그밖에도 ‘동서독 이산가족교류와 남북 이산가족 교류의 비교’ '북한전시동원공장들의 전시 군생산 자립화연구’ 등 여러 분야의 연구 주제를 다뤘습니다. 한국 연구자들은 한 분야를 다루는 대신에 그 연구의 심도와 이론적인 풀이가 훌륭합니다.
전: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는 것은 그만큼 탈북자들이 여러 분야에 대해 흥미가 있어서입니까 아니면 그만한 지식이 있어서입니까?
김: 우선 저희는 북한 한쪽에 대해서만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 살면서 자연히 비교 기준이 생깁니다. 거기서 아이디어가 나오구요. 그런데 여기 남한에서는 연구방법론이나 이론들이 잘 돼 있습니다. 저희 경험을 이 이론들에 맞춰보면 새로운 연구 꺼리들이 생깁니다.
전: 한국에는 북한학이란 학문이 있는데 북한에는 남조선학이란 학문이 있습니까?
김: 없습니다. 북한 쪽에서는 ‘남조선에 대해 무얼 배울 것이 있겠냐’고 하겠죠. 미국학이란 것도 없구요. 자유민주체제인 이 사회에선 학문의 자유가 많으니 북한학이란 것도 나오는 것이겠지요. 북한에 남조선학은 없어도 남조선 연구소 같은 대남 전문 연구기관들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전문학과로서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전: 박사논문이 북한의 민방위 무력중심 지역방위체계에 관한 연구였는데, 그 내용을 쉽게 설명하면 무엇입니까?
김: 95년도에 미국에서 주 방위체계라는 시스템이 나왔습니다. 예를 들어 워싱턴 같은 주 단위 방위체계 이론인데요, 이걸 한국에서 도입하려 했지만 한국에서는 실현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그만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같은 체계가 북한에서도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그걸 몰랐습니다. 이게 뭐냐면 서울시 지역이 전쟁이 나면 서울시가 자체로 방어를 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그 나라 군의 정규군이 지역방위를 하지 않습니까? 근데 북한은 이런 지역방어를 민간인들로 구성된 민방위 무력이 한다는 거에요. 그럼 정규군 놔두고 왜 민간인이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겠죠. 제 논문이 그에 대한 가설입니다. 저는 북한이 전쟁시 세가지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고 봤습니다. 첫째는 남한을 공격하는 것이고 둘째는 북한지역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째는 한미연합군 해외주둔기지를 공격하는 것입니다. 냉전시기 북한 중국 쏘련 등의 북방3각군사관계가 있었는데 이건 한미일 남방3각군사관계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당시 북한은 전쟁이 난다면 남한 공격만 하고 후방을 지키기만 하면 됐습니다. 하지만 탈냉전시대에 들어 쏘련이 무너지고 중국도 결국 개방으로 돌아섰으니 북한군이 기존 시스템으로 소기의 성과를 얻기 어렵게 된거죠. 그래서 북한은 미사일 개발로 해외주둔지를 공격하고 남한의 공격도 막아내는 대신 북한 후방지역은 거의 민간인에게 맡기게 됐다는 것입니다. 이런 북한의 방위체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전돼 왔고 또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에 관한 연구입니다.
전: 연구하실 때 가장 어려웠던 것은 그 내용보다는 남한식 문장과 표현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고 하던데요?
김: 대학원 시작하지 전에 이곳 탈북자 출신 학자 선배들로부터 들은 얘긴데요, 강의를 들어도 6개월 간 귀가 안 열린다고 하더군요. 그게 무슨 얘긴가 했더니 여기서는 강의에 영어를 많이 쓰는 것이었습니다. 저희들은 북한에서 로시아어를 썼습니다. 영어가 아닌 한국 말도 북한과 개념이 다르니까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거에요. 제가 북한 방위체계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힘들었던 게 우선 그 내용을 개념화하는 작업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선례적인 연구가 없다보니 그 정리된 개념을 여기 남한 분들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는 작업이었습니다.
전: 그래서 그 개념을 남한식 말로 표현하는데 하나하나 사전을 찾아봤습니까 아니면 다른 분들한테 도움을 받았습니까?
김: 사전을 찾아 봤습니다. 사전을 찾아 보고 ‘아, 이런건 이렇게 표현을 하지 않으니 다른 표현으로 돌려야 하겠구나' 하는 식으로 표현 정리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남한 동료 대학원생에게 보여주고 고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논문입니다.
전: 논문 준비 기간 새벽 5시부터 밤11시까지 하루에 18시간 공부한 적이 많다던데요.
김: 강의를 듣는 일 빼고는 나머지 시간에 공부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해낸 것이 성과라면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탈북자로서 한국에서 학위 따는 게 정말 힘듭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 이공계를 전공했다가 여기서 인문계로 바꾼 것이라서 글 쓰는데 익숙지 않아 어려웠습니다. 북에서는 대학 졸업하고 글 쓸 일이 별로 없습니다. 글 쓸 일이라고 한다면 졸업후 어떤 단체의 책임자가 돼 보고서를 쓰거나 생활총화 때 정도겠죠. 그 뿐아니라 여기 남한에서는 연구들이 얼마나 많이 진행돼 있습니까? 연구방법론에 논문적으로 각주를 달고 또 전문 자료를 찾는 법 등등 북한에서는 배운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탈북자로서 남한에서 공부하는게 힘들어요. 제 경우 우리 가족이 여기와서 만 8년째 되는데 아직 한번도 해외에 못나가 봤어요. 제주도에도 못가 봤습니다. 제 집사람도 정책금융공사 연구원이고 저도 연구원입니다. 평시엔 각자 자기 업무에 바쁘고 토요일 일요일에는 연구 주제를 놓고 함께 토론하며 보냅니다.
전: 정말 공부에 매진하고 연구작업을 하는데 거의 모든 생활을 할애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김: 네. 제가 다른 탈북자 분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여기 남한에서 성공할 조건은 이미 가지고 있다. 북한에서 힘들게 살았던 우리들이다. 여기 남한 생활은 얼마나 좋은가? 이 사회에서 이룰수 있는 목표를 세우고 거기에 집착하면 된다." 저희도 그렇게 해왔습니다.
전: 북한이탈주민재단의 지원으로 한 연구사업의 책임을 맡았다는데 박사학위를 따고 맡았습니까?
김: 네. 2월 박사학위 받은후 후원재단에서 연구 공모한 데 응모했습니다. 제것이 당선돼 연구프로젝트를 하나 땄습니다.
전: 북한이탈주민의 소비실태와 합리적인 소비생활방안에 관한 것이라던데요.
김: 그렇습니다. 후원재단에서도 마침 이에 관한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에 제가 그 과제의 연구로 응모한 것이죠. 한국사회에서 탈북자 취업이 어렵고 돈도 제대로 못 버는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탈북자가 험한 노동 직종 근로자나 기초수급자로 전락하는 이유는 돈을 못버는 데에도 있지만 남한사회에서 돈을 쓰는 방법, 소비생활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저의 연구사업의 주제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탈북자들이 다단계 사업이나 다른 사업에 속아 피해를 입고 포기하는 경우 많습니다. 소비자 보호법에 호소를 할 수 있지만 소비자 권리행사라든가 소비자보호법이 없는 북한에 살던 탈북자는 그런 걸 모릅니다. 그러니 그냥 당하는 것이죠. 선배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시행착오로 얻은 경험을 새로 입국한 탈북자들에게 알려주면 그런 피해를 미리 방지할 수 있겠죠. 또 한국사회에서는 탈북자들의 무분별한 과잉소비행태에 눈총을 줍니다. 북한에서 먹지 못하다 이 사회에 와서 탈북자들은 먹는데 소비를 많이 합니다. 이른바 생계비에 먹는 게 많이 들어간다는 엥겔지수가 적용되는 사례이죠. 그런 걸 알려 오해를 푸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논문 지원금이 천5백만원, 만7천불 짜리입니다. 연구비 규모는 크지 않습니다. 연구진과 함께 탈북자 2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할 예정입니다. 언론에 제가 이 연구과제를 맡게 됐다는 보도가 나간 뒤 탈북자 여러분들이 저를 찾아와 무보수로 연구에 참여하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연구 책임자로서 더 큰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탈북자 출신 연구자로서 처음 시작하는 것이니 만큼 봉사하는 마음으로 제 인건비를 줄이더라도 적극 추진할 생각입니다. 이런 기회를 준 지원재단이 고마울 뿐입니다.
전: 합리적인 소비생활 방안은 어떤 것입니까?
김: 북한에서 못 살다 온 탈북자들은 한국에 도착해 1년동안은 마구 사는 소위 과시 소비경향을 보입니다. 이런 소비행태는 한국 생활기간 뿐만 아니라 연령대에 따라서도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탈북자는 소비를 절약해 저축을 많이 하는데 또 어떤 이들은 같은 돈 갖고도 모자랍니다. 이런 것을 분석 연구해서 저희 뒤에 오는 탈북자들이 과소비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고 싶습니다.
전: 실생활에 큰 도움되는 연구가 되겠네요.
김: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연구는 여기의 탈북자들 뿐만 아니라 앞으로 북한이 개혁개방됐을 때 북한 주민, 북한 고객에 대한 기초 연구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겁니다. 북한의 개혁개방 초기 그들은 남한 사회의 우리 탈북자들과 똑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소비 현상을 보이겠죠. 북한시장이 열렸을 때 또 어떤 물품을 들여 보내는 게 좋을 것인지도 엿볼 수 있고요. 어쨌든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 같습니다.
전: 통일 이후에 북한에서 일어날 현상이 지금 현재 남한에 온 탈북자 사회와 거의 비슷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연구가 되겠다는 말이네요.
김: 그렇습니다.
전: 탈북자는 남한연구자들의 도구만 되기 보다는 북한연구에 주체가 돼야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반향을 불러왔는데요.
김: 두 가지 메세지가 있다고 봅니다. 그 하나는 남한의 연구자 분들께 대한 바람입니다. 탈북자들은 북한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단순히 증언자나 자료수집의 대상으로만 활용할 것이 아니라 직접 그들을 연구에 참여시키고 그들이 연구할 수 있도록 밀어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주체라는 표현은 우리 탈북자들이 북한연구를 독점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 남한 학자분들이 못 보는 분야가 있으니 그런 분야를 저희가 개척하고 또 상호 협조하면서 능동적으로 나서면 좋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다소 파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전: 부인 김영희 씨도 한국정책금융공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는데요, 북한경제를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김: 네. 기본적으로 북한소비에 관한 것인데요. 북한주민들이 일반적으로 키가 작습니다. 이것이 영양실조에 따른 것이라고 하지만 북한의 인민정책에 기인한 바가 더 크다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전: 부인은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김: 북한에서 같이 왔습니다. 여기서 살면서 싸움하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다투다가도 우리는 생사를 같이한 동지들인데 싸울 게 뭐 있겠느냐면서 풉니다. 저는 동지란 말이 친구보다 더 깊이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만나 결혼했고 저희는 가족이 다 나왔습니다. 저는 북에서 대학졸업후 함경북도 도청에 배치받았습니다. 집사람은 대학 나와 남포쪽에 배치 받았구요. 북에서 연구자의 생활, 지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는데 공무원을 했습니다. 위쪽에 갈수록 처세술이 더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려치고 남쪽으로 나가자고 생각했죠.
전: 출신성분 때문에 차별당했다고 하던데요.
김: 네. 제가 여기와서 2009년 발표한 논문 '선군시대의 북한주민들의 사회적 신분 변화'가 그에 관한 내용입니다. 남한 학자들은 북한사회를 논할 때 핵심계층 비핵심계층으로 나누지만 그쪽 사회는 정치신분과 비정치신분이 사회신분 분류의 기본입니다. 그게 큰 문제입니다. 당일군 하던 사람은 행정일군으로 내려가도 되지만 행정일군은 당일군으로 못 올라갑니다. 행정 간부하던 사람이 좌천하면 노동자 밖에 못합니다. 제 경우 어머님이 중국연고자입니다. 지금은 탈북자 가족에 대해 통제를 많이 하지만 80년도에는 중국연고자 가족을 많이 적대시 했습니다. 중국이 개혁개방하면 친척통해 정보가 많이 들어오니까요. 저는 원래 의대에 가고 싶었습니다.
전: 근데 성분때문에 군대에 못갔다는 얘기는 무엇입니까?
김: 그건 언론 기사가 잘못 된 것입니다. 북한에는 직통생이란 게 있습니다. 공부를 잘 하면 군에 보내는 대신에 대학에 보냅니다. 저는 직통생으로 대학에 갔습니다. 실력은 있었지만 성분이 나빠서 그런 이공계 대학에 갈 수 밖에 없었지만요. 고등중학교에서 대학갔고 대학졸업 후 곧장 사회에 나가 일했습니다.
전: 부인과의 사이에 자녀는 몇입니까?
김: 남자 아이 둘입니다. 큰 애는 고등학교 1학년, 작은 애는 중학교 2학년입니다. 북한으로 치면 큰애가 고등중학교 5학년 됩니다.
전: 엄마 아빠 닮아 공부 열심히 잘 하겠네요.
김: 큰 아들은 여기 와서 1년 뒤 장수초등학교에서, 그리고 금옥중학교에서 계속 전교 부회장을 했습니다. 작년 상해 국제청소년과학엑스포에 카이스트에서 양성한 한국 학생 대표 일원으로 가서 영어로 발표도 했습니다. 지금도 카이스트에서 교육받고 있습니다. 동생도 형을 닮겠다고 회장 선거에 나가고요. 여기서 아이들이 잘 되니까 저로서는 상당히 좋습니다. 자식들의 교육 역시 북에서 여기에 온 이유의 하납니다.
전: 북에서 낳고 데리고 온 거죠?
김: 그렇죠.
전: 원하시던 박사학위도 따셨고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많으실 텐데 어떤 일을 가장 하고 싶습니까?
김: 북한에서는 원했지만 꿈에 불과했던 연구활동입니다. 북한개발과 같은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앞으로 남북통합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그런 연구를 하고 싶습니다. 아까 언급한 탈북자의 소비행태를 통합시 북한주민을 고객으로 확대하는 연구도 하고싶고, 한국에서는 한반도통일 비용문제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북한 편입효과에 대한 연구도 해 보고 싶습니다. 제 생각에 북한에 100개를 주는 것 보다 50개를 주고 나머지 50개는 북한이 창출해서 메꿀 수 있다고 봅니다. 이런 연구는 탈북자 출신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한국에서 탈북자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2월 북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병욱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