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함경도 출신의 탄광 노동자였던 탈북자가 지금은 한국에서 한 해 3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성공적인 중소기업의 사장이 됐습니다. 1996년 탈북 후 강제북송됐다가 재탈북해 2002년 한국에 들어간 한필수 씨는 그 이듬해 맨주먹으로 시작한 회사 ‘한성무역’을 7년만에 300배로 키웠습니다. 그만하면 주목받는 기업체의 지배인으로 편안한 남한생활을 즐길 만 한데도 한 씨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현재 37명의 탈북자 직원을 3천명으로 늘리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성장보다는 직원의 안정된 남한사회 정착지원을 경영이념으로 내세우고 있는 탈북기업인 한필수 대표를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한성무역 웹사이트 홈페이지에 올라가 봤습니다. 거기에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자서전 제목이 있더군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 정주영 회장을 존경했다고 들었습니다. 언제부터 그분을 알게 됐습니까?
한필수
: 정 회장님은 저희들이 이북에 있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전: 정 회장이 1998년 6월 소 천마리를 2차례 걸쳐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 들어 갔었는데요, 그때 소식 들었습니까?
한
: 네. 들었고 TV에서도 직접 봤습니다. 당시 저희는 중국에 있었습니다.
전: 중국에서 무얼 하셨습니까?
한
: 당시 저희는 중국에 숨어 살았습니다.
전: 그럼 98년도에는 북한을 탈출해 이미 중국에서 살고 계셨군요?
한
: 네. 그렇습니다.
전: 정주영 회장에 대해서는 한국에 와서 그분의 기업가적인 모범이나 행적을 알아 봤습니까?
한
: 그렇죠. 한국에 와서 그분에 대해 현대중공업이나 현대건설과 관련한 책들을 많이 봤습니다. 그분도 빈 주먹으로 와서 기적을 이뤄낸 것이 아닙니까? 그때 정 회장이 남긴 많은 어록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란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 새터민들 자체도 현재 2만명 넘게 여기에 와 있지만 옛날 실향민들이 남한에 왔을 때 보다 사실은 촘촘한 이 시장을 뚫고 나가기가 더 어렵습니다. 근데 우리가 실질적으로 모든 게 빈약하지 않습니까? 옛날 오신 실향민들 진짜 고생도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예를 들어 집에서 비누를 만들었다면 그걸 리어카에 싣고 팔 수는 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아니라는 거죠.
전: 왜 아닙니까?
한
: 지금은 비누를 리어카에 싣고 팔 수 있는 시대가 아니잖습니까? 지금 시대는 우리나라도 경제 강국이고 시장이 매우 경쟁적이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뚫고 들어갈 틈이 과연 있겠냐는 것이죠. 저도 2003년부터 사업을 시작해 2004년, 5년, 6년 7년까지 실제로 누구의 도움이나 금융지원 없이 치열하게 죽을 고비로 여기까지 올라왔습니다. 사업하기 위해서는 융자를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당시 우리에게 대출해준 은행은 없었습니다.
전: 한국에서 대출을 받지 못하는 것은 신용이나 과거의 실적이 없어서 입니까? 한국은행들은 어떤 기준을 갖고 돈을 꾸어줍니까?
한
: 한국에선 융자 신청자의 신용이나 자산 가치등을 따지는데 저희는 자산이란 게 달랑 임대아파트뿐이잖습니까? 거래 실적도 없고 신용도 없고. 그런 힘든 가운데 2003년부터 제가 회사의 매출을 성장시켰습니다. 하지만 2007년까지는 대출을 못 받았습니다. 그만큼 우리나라의 금융실태가 보수적입니다. 우리나라에 2만명의 탈북자들이 있는데 지금도 그 금융벽을 넘을 사람은 얼마 안됩니다. 2007년까지 고생하고2008년부터 사업이 조금 나아 졌습니다. 2007년도 4월부터 50평짜리 창고를 운영하면서 두,세사람 고용했습니다. 지금은 43명이 일하고 있는데 그 중에 새터민이 37명입니다. 제가 작년 10월에 부지 1756평을 매입했습니다.
전: 아주 큰 규모네요.
한
: 그렇습니다. 거기에다 건물 4백평짜리를 지었고요. 8개 부서가 있는데 부서장 모두 새터민들입니다. 이들을 5년 6년동안 키웠습니다. 이들 역시 나와 같은 처지였습니다.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외부 강사를 초빙해 토요일 일요일에 교육 시키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평일에는 자기 업무를 하면서 또 배웠습니다. 이렇게 4년 5년 6년을 교육시킨 결과 8개부서의 부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전: 은행에서 4-5년 동안 대출 받기까지 고생했다고 하셨는데 결국은 은행들이 한 대표께서 차츰 일궈놓은 신용과 노력, 사업에 대한 의지를 봐서 대출을 시작한 겁니까?
한
: 그렇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한편으로는 수출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온라인쇼핑으로 물건을 팔아 왔습니다.
전: 어떤 물건입니까?
한
: 일반 생활용품입니다. 대형 할인마트 같은데서 팔던 일상 생활용품입니다.
전: 생활필수품이 어떤 것들인지 소개해 주시죠.
한
: 비누 치약 샴푸 섬유유연제 등입니다.
전: 수출은 주로 중국쪽으로 한다죠?
한
: 네. 수출은 월 20억에서 25억 원 정도하고 온라인은 10억 원 정도를 하고 있습니다.
전: 월간 10만에서 20만 달러씩 하고 있다는 말인데요, 중국시장부터 뚫겠다고 생각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한
: 중국의 동북3성 사람들 중에는 외국에서 4년 5년 일해 돈 벌고 고향에 가서 사는 분이 많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고 돌아가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물건을 사서 쓴 분들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아시아에서도 질이 좋고 괜찮은 물건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이 중국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우리나라 물건을 찾게 돼 있습니다.
전: 그러니까 한국의 질 좋은 물건을 썼었기 때문에 고향에 가도 한국제품을 그리워한다 그런 말이네요.
한
: 그렇습니다. 그게 틈새시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아직 성공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50에서 60퍼센트 정도 목적을 달성했다고 봅니다.
전: 회사 창립 목표에는 앞으로 탈북자 3천 명을 고용하겠다고 하셨는데 왜 3천명입니까?
한
: 여기서 탈북자 가족을 보통 3,4인 가족으로 봅니다. 탈북자 가장 한 사람을 고용하면 이로써 만2천명이 먹고 살 수 있다는 얘깁니다. 한 가장이 월 3백 5십만 원 이상 가져가면 한 가정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전: 미국돈으로는 3천 달러가 넘겠네요.
한
: 한 4천 달러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남한 사회에서 불편없이 정착해 잘 살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면 그 낙후한 이북땅에서 모든 경제활동 하게 될텐데 그에 가장 앞장 설 사람들이 바로 이 탈북자들입니다. 근데 우리가 고용한 이 3천 명 중에 일을 배워 독립해 새 기업을 세운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더 크다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곱절의 효과가 커집니다. 인큐베이터 같은 효과를 봅니다.
전: 마치 병아리를 부화해 새로운 새끼가 불어나는 것과 같다는 말씀이네요.
한
: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에 중요한 건 인프라 구축입니다. 어떤 회사가 생겨나 제품을 만들기까지 필요한 여러가지 기반시설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2003년부터 2010년까지 그 기반을 구축하는데 4-50억 원이 들어갔습니다.
전: 미국돈으로 400만-500만 달러의 큰돈이네요.
한
: 네. 이런 기반시설 없이 매출을 끌어 올리기는 어렵습니다. 금년에도 매출과 이익을 많이 올려 고용을 많이 하는 게 목표입니다.
전: 작년에 3백2십억 원 미국돈으로 3천2백만 달러의 매출 올렸고 올해 6백억 원, 미국돈 6천만 달러 매출액을 목표 잡았는데 거의 곱절 이상 늘리려면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할텐데 중국시장의 수요가 충분합니까?
한
: 충분합니다. 동북3성에는 우리나라 인구의 3.9배 약 2억 명이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 우리나라 물건에 대한 선호도가 굉장히 높습니다. 그렇다고 대기업이 들어가서 할 사업은 아닙니다. 중소기업이 틈새시장으로 들어가 그곳 사람들이 원하는 제품을 늘리고 선호하는 제품을 개발하면 많이 팔 수 있습니다.
전: 자유시장경쟁인데 한 대표의 회사 말고 중국 동북3성에 들어간 경쟁업체가 없습니까?
한
: 2007년도까지 경쟁업체가 많았습니다. 사업은 경쟁에 따라 성공하고 실패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경쟁 과정을 겪고 견뎌서 살아 남아 여기까지 올라 온 것입니다. 저희는 동북3성에 거래처 체계를 구축했고 현지에 지사도 있습니다.
전: 이만큼 기업을 일구기까지는 어떤 기업 좌표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눔경영’이란 기업이념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죠.
한
: 저희 같은 기업은 탈북자들이 뭉쳐서 만든 기업 아닙니까. 몽땅 이북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는 기업인데요. 이들에게는 성장보다는 나눔과 분배가 먼저입니다. 왜냐면,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에게 기업 성장을 이유로 월급을 조금만 준다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에게 성장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이들이 우선 안정정착하는 것을 돕습니다. 이들이 정착하게되면 스스로 열심히 회사 일을 배웁니다. 그러면서 2년 3년 4년 그렇게 열심히 배우고 일하면 회사의 주인이 됩니다. 그게 우리에겐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겁니다.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배양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 그런데 이익을 많이 내 재투자 하기 보다는 탈북자 직원들에게 가정생활에 보탬이 되라고 보수로 더 주게되면 투자확대에 조금은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한
: 그렇죠. 그런 문제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을 [탈북자] 고용하면 국가에서 회사에 고용지원금을 줍니다. 월 50에서 70만 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걸 직원들 월급에 얹어 줍니다. 예를 들어 어느 탈북자 직원이 채용 때 첫 연봉이 천6백만원이었다고 하면 월 130만 정도를 가져가게 됩니다. 그런데 통일부에서는 고용지원금으로 첫 해 매월 50만 원 둘째 해와 셋째 해에 각각 70만 원을 지급하는 것을 탈북자에게 추가로 얹어 주면 매월 180만 원을 월급으로 타 가는 셈입니다. 물론 4대보험에 가입도 돼 있구요. 직장생활 초반에 아무 일도 모르는 사람이 180만 원을 집에 가져가면 가정생활도 안정되고 심리적으로도 안정이 됩니다. 그러면 직원도 스스로 일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세 해가 지나면 탈북자 직원들도 기능공이 될 수 있습니다.
전: 거기선 상품을 제조하는게 아니라 이미 만든 걸 포장하는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특별히 배울만한 일이 있습니까?
한
: 배울 것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중국에 수출을 하니까 수입선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와야 하고 주문 받으면 여기서 물건을 매입한 뒤에 이를 컨테이너에 넣어 보내는 것 등입니다. 또 온라인쇼핑 사업에서도 고객의 주문을 받고 관련 상품을 매입하고 포장하고 하는 일인데 모두 중요한 업무들입니다.
전: 그러니까 유통과정에 대한 일들이네요.
한
: 유통과정 업무 뿐만이 아닙니다. 경리부도 있어야 하고 발주팀과 수출부도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수출부에서는 수출면장에서 부터 시작해 인보이스 패킹리스트 비엘 등 모든 수출 과정 업무를 배우게 됩니다. 누가 물건을 코 앞에 갖다 주면 그걸 포장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수출단계에 필요한 직능 기능 지식 기술을 습득해야 합니다. 또 경리부에서는 매입 매출부터 시작해서 거래처 관리, 세무관리, 재무관리. 이런 것을 모두 다 우리 직원들이 해야 합니다.
전: 그 모든 걸 총괄하는 한 대표께서는 그런 일들에 대해 대강은 모두 알고 계십니까?
한
: 그렇죠.
전: 그런 걸 언제 공부하셨어요?
한
: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습니다.
전: 공부는 어디서 하셨나요?
한
: 자습했습니다.
전: 혼자서 책이나 인터넷을 찾아가며 하셨나요?
한
: 네. 그렇죠.
전: 이해하기가 쉽던가요?
한
: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다보니 이해가 되고 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한국분들과 대화하면서 배우고 했습니다.
전: 2002년에 한국에 도착하셨다는데 단신으로 들어 가셨나요?
한
: 북한에 있던 가족과 같이 왔습니다.
전: 자녀는 몇입니까?
한
: 세명입니다. 딸 둘에 아들 하나인데 나이는 아직 어립니다.
전: 탈북 노인쉽터도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한
: 그렇습니다. 저희가 하반기부터는 부지를 천평 정도 확보해 쉼터를 확장할 계획입니다. 우리나라에 요양원 경노당 실버타운 요양원 등 다양한 복지시설들이 많은데 우리 이북에서 온 어르신들은 거기에 섞이질 못합니다. 그 이유는 이분들이 6,7,8십년대를 살아온 문화가 다르고 언어가 틀리고 또 이 사회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분들은 이 사회에 대해 배우거나 이북 사투리를 고치질 못합니다. 그래서 밖에 나가길 두려워 합니다. 그러면 집안에 앉아 티비와 싸움만 합니다. 그러니 고독할 수밖에요. 그런데 저희가 쉼터를 운영해 보니 이분들이 상당히 좋아합니다. 왜냐면 같은 [북한]문화속에 살던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노래도 부르고 얘기도 나누고 또 여기 복지사가 한국의 문화도 가르치고 치매예방법도 알려주고 하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 쉼터는 하루 종일 운영합니까 아니면 시간제로 합니까?
한
: 월요일부터 금요일 까지 9시부터 -7시까지 여는데 어르신들은 점심과 저녁을 여기서 들고 귀가합니다.
전: 그분들은 쉼터에 오고 가는데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합니까?
한
: 저희 회사에 셔틀 승합버스를 이용해 먼데 계신분은 모시고 오고 가까이 사는 분들은 지하철까지 모셔다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 탈북노인분들이 많아서 쉼터를 확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분들이 늦게나마 대한민국 자유의 품을 찾아 와 이곳에 모여 하루 하루를 즐겁게 지내시면 마지막 생을 즐겁고 보람있게 살다가 가실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입니다.
전: 나이 드신 분들은 홀로 탈북했습니까 아니면 가족과 같이 탈북했지만 홀로 집에 남게 되는 분들입니까?
한
: 홀로 오신 분들고 있고 가족들과 함께 오신 분도 있지만 요즈음 가족들도 생계에 바쁘니까 혼자 계신 분들이 많죠.
전: 8월에 기숙사를 준공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한
: 그렇습니다. 기숙사를 짓는 이유는 지방에서도 올라와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전: 지방에서도 하나센터같은 곳을 통해 그곳에서 취업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서울까지 와서 일을 하려는 것입니까?
한
: 한국에서 탈북자들이 취업하는 곳은 대체로 힘든 일을 취급하는 데가 많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거기에서는 우선 회사의 성장을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업의 성장 이전에 개인의 정착을 도울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탈북자들이 가장으로서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겠금 기반을 마련해 주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방에 있는 중소기업에서는 그 사람들의 정착 지원보다는 기업의 성장을 먼저 도모하려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힘이 듭니다. 성장을 따르기 위해서는 탈북자들에게는 적어도 3, 4년의 기간은 필요한 데 그동안에 평균 3-4인 가정을 이끌고 있는 가장이 월 100만 원이나 120만 원을 받고 어떻게 가정을 꾸려갈 수 있겠습니까?
전: 한성무역 웹사이트에 올라가 봤더니 직원들이 조회 때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셨습니다’ 라는 구호를 세번 씩 외치고 웃고 박수치는 모습을 봤습니다. 조회 때 서로 인사하고 격려하는 것도 한 대표님이 생각하신 겁니까?
한
: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예의교육, 인성교육이라는 겁니다.
전: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안녕하십니까? 수고하십니다’ 를 할 줄 모릅니까?
한
: 할 줄 압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북에서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그런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한국)에 와서 북에서 태어난 곳이 다 틀린데다가 여기까지 오면서 마음이 닫혀지게 됐다는 거죠. 아픈 추억이 많다 보니 마음이 많이 닫혀 있어요. 저희가 출퇴근 셔틀버스를 운영하는데 첫 해와 둘째 해에는 버스를 타면 동료가 타는 지 마는 지 관심이 없고 인사나눔도 없어요. 그리고 외부에서 손님이 와도 무관심 하고요. 손님들 보기에도 회사 분위기가 딱딱하고. 그래서 이래선 안되겠다고 생각해 작년부터 일주일에 한번 종합 조회를 열 때 예의교육과 인성교육을 시작했습니다. 서로 ‘수고했다, 좋은 아침이다’ 라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고생하셨어요’ 라고 인사하면서 가까와 지고요.
전: 또 동료애도 생기겠네요?
한
: 그렇죠. 그러다보니 직장에 대한 애착감, 동료 간의 따듯한 정이 생기죠.
전: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어떤 직원의 비디오를 보니 스무 군데나 돌아 다니다 현재 한성무역에 와서는 4년째 일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굉장히 오래 직장에 붙어 있는 셈인데요.
한
: 네. 그 직원은 우리 수출팀의 본부장인데요. 21살 때부터 일을 배우라고 얘기를 했었어요. 그때는 제가 고용할 형편이 안됐었지만 언젠가는 함께 일을 하자고요. 그래서 일단 어느 유통업체에 들어가 일을 배우다 제가 회사를 만든 뒤 들어 오게 됐습니다.
전: 직원들의 생일 축하 파티, 연회하는 것도 있던데요. 케이크를 놓고 생일을 축하해 주고 노래를 부르는데 굉장히 흐뭇해 보였습니다.
한
: 매월 해당 달에 생일인 사람들을 모아 함께 생일 케이크를 준비해 생일 축하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품권 3만원짜리를 마련해 가족이 함께 식사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온 2만1천 명이 정착을 잘해 가장이 가장답게 살고 애들도 공부 잘하고 가정이 화목하면 여기 탈북자들은 저부터 시작해서 적어도 1년에 한번은 북한에 있는 형제 친척들에게 돈을 보낼 겁니다. 그돈으로 이북에서 형제들이 쌀도 사먹고 다른 것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정착 잘하는게 이나라를 도와주는 것이고 그게 북한 주민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또 언젠가 통일이 되면 여기 탈북자들이 선구자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함경도 출신의 탄광 노동자였던 탈북자 한필수 씨와 함께 그가 세운 한성무역이 한국사회에서 주목받는 성공적인 중소기업이 된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