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조선 인민군 선전대 작가에서 한국의 대북방송 대표로 변신한 김성민 씨. 김 대표는 5년 전 소수의 탈북자들과 함께 시작한 자유북한방송을 통해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2월 10일 올해의 아시아 민주인권상을 수상합니다. 탈북 후 한국에 들어간 지 10년만에 대만민주기금회가 운영하는 아시아의 주요 인권상을 타게 된 것입니다.
또 지난해에는 그가 이끄는 자유북한방송이 국제언론단체인 '국경 없는 기자회'가 주는 '올해의 매체상'을 수상했습니다. 늦은 밤, 북조선에 방송할 보도 편성에 여념이 없는 김성민 대표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기자
: 먼저 아시아민주인권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지난 달 ‘대만민주기금회의’가 발표한 수상자 결정 보도문을 보니까 후보자 32명이 1차와 2차 심사를 거쳤고 그 결과 김 대표가 수상자로 결정됐더군요. 탈북한지 12년 만인데요, 북한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김성민
: 태어난 곳은 자강도 시평시 전편 노동자구입니다. 두 살때 평양에 가서 대동문 인민학교와 연광중학교를 졸업하고 군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난 곳은 자강도, 자란 곳은 평양입니다.
전
: 김형직 사범대학 작가양성반을 졸업하고 서해안 인민군 212부대에서 선전대 작가로 활동했다던데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는 일이었습니까?
김
: 제가 열일곱살에 군대 나가 10년 간 4군단에서 사병생활을 했습니다. 4군단 사령부는 황해도 해주에 있습니다. 사병생활하면서 인민군 신문이나 군인 문예에 작품을 여러개 했었습니다. 그런데 제대할 때쯤 인민군 창작실에서는 저를 군대 작가로 만들려고 김형직 사범대에 위탁교육을 시켰습니다. 졸업후 212 군부대에 들갔습니다. 이 부대의 비공식 명칭은 최고사령부 작전예비군단이라고 합니다. 남한으로 치면 자주포 군단인데요, 여기서 선전대 작가를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1개군단에 100명정도로 구성된 예술단이 있는데요 이 예술단은 설날, 2월 16일, 4월 15일, 4월 25일, 또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으로 됐던 4월 19일 등 매달 한 번 이상 공연단을 만들어 각 대대마다 순회공연을 하고 군단사령부에서도 공연을 합니다. 군인들의 사상과 전투성에 이바지 하기 위한 목적인데요, 그 공연에 들어가는 모든 원고를 작가인 제가 써야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2월 16일 예술공연을 시작하겠습니다.” 에서 “끝마치겠습니다.” 등 공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대사 부터 공연에 들어가는 선동시, 재담, 사이극, 만담, 노래이야기 등을 모두 썼습니다.
전
: 왜 탈북하셨습니까?
김
: 저는 탈북동기 질문에 ‘북한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남한생활 동경해서’라고 얘기하곤 하지만,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북한 내 23개 군단마다 선전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선전대는 24번째 생긴 후발 선전대였습니다. 다른 선전대는 일본의 ‘야마하’나 미국의 ‘파커드’같은 좋은 악기를 쓰고 있었지만 저희 선전대는 품질이 불량한 북한산 악기만 있었습니다. 당시 작곡을 담당하고 있던 사람이 우리 악기를 바꾸자고 제의했습니다. 개성학생 소년 궁전에 가면 재일교포들이 기증한 일본 악기 있으니 그걸 갔다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질하자는 것이었죠. 당시 제가 세포비서였는데, 그걸 허가했습니다. 그 악기를 훔치고 3년이 지났는데, 무기명 투서가 들어와 들통이 났습니다. 총정치국 중앙당에서 당사자들을 처벌했습니다. 선전대 대장, 작곡가 모두 출당, 철직이 됐는데, 저는 처벌을 안받고 대장 대행이 됐습니다. 그런데 그 무기명 투서의 주인공이 저라는 소문이 났습니다. 대장 자리가 탐나서 그랬다는 것이죠. 저는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고 중앙당 신소과에도 찾아가 봤고 김정일에게 안타까운 심정도 편지로 보내봤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해결 안되고 저는 더욱 궁지에 빠지게 됐습니다. 제 작가적 양심은 더욱 일그러지게 됐습니다. 그런데 얼핏 생각나는 것이 정성산 같은 사람이 탈북해 한국에 가서 대북 방송을 통해 자신의 누명을 벗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탈북을 결심하게 됐고 한국에 오자마자 철책선에서 보내는 국방부 대북방송을 통해서 왜 내가 탈북했는지를 밝혔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인 탈북동기였습니다.
전
: 1999년 남한 입국후 5년만인 2천4년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을 시작하셨는데요, 그 동기도 궁금합니다.
김
: 어느 날 탈북자 단체장들이 모여 식사후 얘기를 나눴습니다. 2003년 12월 쯤으로 기억합니다. 조선일보 기자인 강철환 씨가 지금 남한에서는 철책선 방송은 이미 중단됐고 대북방송이 중단될 위기에 있는데, 우리 탈북자들이라도 대북 방송해야하지 않겠냐고 말했습니다. 그 필요성은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누가 하느냐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제가 KBS방송에서 어나운서 강수정씨와 ‘평양말 서울말’이란 프로그램을 2년 했고 ‘남북의 창’ 이란 프로그램도 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선배나 친구들은 제가 방송에 능한줄 알고 저한테 해보라고 제의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작가도 했고 선전대 연출가도 겸했던 터라, 그 제의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전
: 방송국 운영에 어려움이 많았고, 신변 위협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도됐었는데요, 남한내의 반대를 경험한 얘기를 해주시죠.
김
: 방송을 별로 힘들게 생각지 않고 있다가 막상 하고 보니 방송은 말이나 출연만으로 되는게 아니라 보다 기본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됐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기술적인 요소들이나 프로그램 편성과 다방면적인 안목 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전혀 준비가 안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준비과정에서 남한의 기술자들, 대학생들과 함께 협력하는게 제일 어려웠습니다. 그분들은 ‘어떻게 탈북자가 방송을 할 수 있겠냐’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이들을 힘들게 설득해 어렵게 방송을 시작 하긴 했는데, 당시 노무현 정부에서는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중요시하던 때입니다. 우리 방송은 정부의 대북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죠. 그러다보니 한국정부의 암묵적인 압박을 받았고, 당시 한총련 통일선봉대라든가 한성렬목사의 통일연대 등 민간단체에서도 저희 방송을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시위도 벌이고 해서 힘들었습니다. 또 저희 방송국이 입주했던 건물주는 저희 때문에 장사도 못하고 본연의 업무를 방해받는 다는 이유로 나가 달라고 해서 세번이나 옮겼습니다. 지금까지 합치면 저희가 자리를 옮긴 것은 모두 다섯번인데요, 무엇보다도 방송국의 스튜디오와 설비를 매번 뜯어야 하는 게 정말 힘들었습니다.
전
: 북한의 반대도 있었죠?
김
: 저희가 2004년 4월 인터넷 방송을 시작했는데 2월 16일 시험방송을 했습니다. 그런데 3월 4일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북한은 탈북자들이 하는 방송을 중단하지 않으면 회담을 못하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실시간으로 남북회담장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저희에게 알려주는 기자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국정원과 주변사람들이 많이 우려했습니다. 저도 우리 방송때문에 남북 교류와 회담이 끊길까봐 많이 괴로왔고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많이 했었습니다.
전
: 자유북한방송은 인터넷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다섯 시간 단파 방송으로 늘어났는데요, 주요 내용이 북조선의 경제,사회, 정치, 남북관계 에 관한 보도와 전문가 논평이고, 특히 황장엽 전 조선 노동당 비서의 ‘민주주의강좌’가 인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김
: ‘황장엽’이란 인물의 타이틀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관심있게 듣고있다는 얘기가 우리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처음에 ‘황장엽이 한국가서 무얼 하겠냐?’라는 식으로 생각 했었는데 이제는 ‘남한에서 라디오도 하고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도 하고 있구나’ 라며 바뀐 인식을 보이고 있다는 청취자 반응을 저희가 받고 있습니다. 최근엔 김정일 비화라는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모르는 김정일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시각들을 전하고 있는데요, 북한 청취자들은 ‘장군님’에 관한 얘기니까 흥미를 가지고 ‘아, 이런 일들도 있을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갖게 되겠죠. 또 요새는 휴대폰이 북한에 도입되면서 이를 통해 재미있는 얘기가 많이 저희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전
: 방금 북한 청취자 반응을 말씀하셨는데, 그 반응은 어떤 식으로 받고 있습니까? 서신이나 전화입니까?
김
: 그렇습니다. 북한내에서 저희 방송을 듣고 보내주는 반응가운데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내용을 방송해주기 바란다는 요청도 있고, 무엇보다도 외부사정을 알고 싶다며 부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 중에 친척을 찾아달라는 부탁이 제일 많습니다. 최근에 인상깊은 전화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희 방송을 들었다는 북한 외교관이 많은데요 한번은 동유럽쪽에서 북한 외교관이 저희에게 전화를 해 방송을 잘 듣고 있다면서 혹시 자기의 친척을 찾을 수 있겠냐고 물어왔습니다.
전
: 동유럽지역에서 자유북한방송의 단파방송을 들었다는 것입니까?
김
: 단파로도 듣고 인터넷으로도 듣고 있습니다. 지난 5년동안 전 세계적으로 단파 수신 애호가들이 우리에게 보낸 영문 수신보고서는 모두2천통이 됩니다. 보낸 사람들은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모든 곳에서였습니다. 우리 방송은 지향파라서 북한에만 나가는 줄 알았는데 세계 곳곳에서 듣고 수신보고서를 보내오고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전
: ‘대만민주기금회’가 낸 수상자 발표문에서 김성민 대표를 선정한 이유를 ‘북한정권에 대한 용감한 저항과 독자적인 소식과 정보의 전달’에 공이 인정됐기 때문이라고 썼던데요 자유북한방송의 독자적인 소식과 정보를 어떻게 확보합니까? 북한내외에 소식통이 있습니까?
김
: 우선 제가 용감하다는데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탈북자들은 탈북 자체만으로 모두 용감한 사람들이라고 황장엽선생이 얘기한 바 있습니다만, 여기서 앉아 방송하는게 뭐가 용감하겠습니까? 하지만 소식통들의 확보를 위해서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북한 각 도에 두 명 이상의 통신원들을 두고 있습니다. 그들을 통해 북한내 동영상이라든가 내부자료를 확보하기도 하고 이번 화폐개혁 소식도 바로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북한 기상청의 것이 아닌 주민들이 실제 경험하는 날씨도 전하려 합니다. 그리고 북한 내부 청취자들과 생방송 연결도 할 생각입니다. 이런 계획이 내년 새해의 과제가 될겁니다. 가슴아픈 것은 근래 북한이 간첩사건이라며 저희 통신원들을 정치범수용소에 잡아 넣었습니다. 작년 7월에 발표된 간첩사건인데요, 이제는 공개된 일이니까 말씀드릴수 있는데 그 사건이 바로 저희 통신원들이 연루된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이후 북쪽 통신원들을 다치게 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해 북한내 통신원 활용을 중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중에 많은 사건이 벌어지더군요. 김정은 후계 문제부터 시작해서… 그래서 비록 인적인 희생은 있더라도 남북한과 국제사회에 알릴 것은 알려야 하겠다고 생각해 새로 북한내 통신원 업무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저희 방송 출범 기념일인 12월28일부터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는데요, 북한 통신원들로 부터 들어오는 북한 내부의 정보를 역으로 북한에 전달하는 내용입니다. 새 편성에서는 저희 방송시간의 첫 프로그램으로 이 북한 소식을 전할 예정입니다. 기존의 종합뉴스는 그 뒤로 물리게 됩니다. 그래서 저희 기자들은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통신원들과 전화통화하기에 바쁩니다.
전
: 정치범수용소 수감이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자유북한방송을 위해 일하겠다는 통신원들은 누굽니까?
김
: 저희들은 [통신원들에 대해] 경제적인 지원[보수]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북한 사회의 변화는 경제적 변화에서 시작돼야 한다는 신념에서 경제적 지원을 우선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북한사회서 사는데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저들[통신원]에게 북한의 민주화의 중요성과 북한 내부 상황을 주민에게 알려야 할 필요성과 함께 그런 일에 따르는 철저한 보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논리를 가르쳐 줄 수 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정말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에 고민하는 [북한]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돈 [보상]보다는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할 겁니다.
전
: 통신원들이 자유북한방송에 보내주는 소식의 정확도나 신뢰성을 어떻게 보장합니까?
김
: 첫째로 우리는 교차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차 정보를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2차정보는 사진, 동영상, 강연자료, 혹은 중앙당 녹음자료와 같이 객관적으로 봐서 북한의 것이며 북한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전
: 아까 언급한 북한 화폐개혁에 대한 소식은 북한내 통신원에게 통화로 받은 내용입니까?
김
: 보통은 전화를 언제 몇시에 한다는 약속하에 통신원들에게 전화기를 켜놓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건은 그곳에서 먼저 우리에게 전화를 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오후 12시10분경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특수한 사건이라서 저희는 여기 저기에 전화를 해, 이 소식을 재확인했습니다.
전
: 현재 방송국내 직원은 몇명입니까?
김
: 19명입니다.
전
: 모두 탈북자들입니까?
김
: 다섯명은 남한 청년들입니다. 사무장을 비롯해 분야별로 영어를 잘 하는 분, 컴퓨터 전문가 등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탈북자들입니다. 그리고 북한에 통신원들이 있고 중국에 출장소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방송국 본사에서 나가있는 한 분이 있고 현지 통신원 교포분들이 있습니다.
전
: 교포라면 조선족입니까?
김
: 그렇습니다.
전
: 서울 직원중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무엇 하던 분들입니까? 북한에서 방송이나 기자하던 분이 있습니까?
김
: 북한에 있을 때 기자 지망생이나 작가 지망생이었던 사람도 있고 영화음악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방송학과, 창작학과를 나온 세 사람이 있습니다. 김일성 종합대학에서 공부한 사람도 있고 북한의 도 선전대에서 화술을 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방송차에서 방송을 하던 사람도 있습니다. 북한에서 대남 방송을 하던 2군단 방송 요원도 있습니다. 또 최근 탈북자들이 만든 영화 ‘선택’의 주인공 역을 한 여성도 있습니다. 북한민주화에 대한 뜻과 희망과 꿈을 품은 의욕있는 사람들이 저희 방송국에 모입니다.
전
: 그처럼 적지 않은 인력을 꾸리고 방송도 다섯시간씩 하려면 운영 예산과 자금 조달이 필요할 텐데요?
김
: 저희는 시작할 때부터 미국의 NED 민주주의기금재단에서, 그리고 작년부터는 미국 국무부 인권노동국에서 지원을 받아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미국쪽에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잘 지원이 안되고 있는게 안타깝긴합니다. 그리고 일본에 있는 자유북한방송의 후원회와, 또 올해부터 시작된 ‘국경없는기자회’와 ‘유럽의회’의 지원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 탈북자들과 북한 민주화 단체들과 애국 인사들의 지원을 합쳐 약 100만불의 예산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방송 전파임대료가 가장 많습니다. 인건비는 가장 적습니다. 하지만 우린 북한 민주화 운동가라고 생각하니까 보람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전
: 탈북은 혼자하셨습니까? 북한에 남은 가족이 있습니까?
김
: 저는 누님들이 북한에 있고 부모님은 다 돌아가셨습니다. 누님들은 제가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를 겁니다. 누나들에게 혹시 변이 생길까봐 저 혼자 탈북했습니다. 누나들하고는 아직 연락이 안되고 있습니다.
전
: 탈북때 나이는?
김
: 서른두살이었습니다.
전
: 그럼 남한에 가서 결혼하셨나요?
김
: 한국에 와서 결혼하고 애도 나았습니다. 제가 중국에서 숨어살 때 도와준 중국내 조선족 의사와 결혼해 살고있습니다.
전
: 그럼 남한에서도 의사를 하고 계신가요?
김
: 자격증이 없어서 못하고 현재는 중국말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
: 아들 딸이 있습니까?
김
: 열세살 난 딸이 있습니다.
전
: 북한으로 치면 고등중학교에 다니나요?
김
: 그럴 나이 입니다.
전
: 아시아민주인권상을 수상하게됐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가족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김
: 워낙 제가 가정생활을 잘 못하고 있다보니 처가 저에 대해 많이 실망해 있습니다만 이번 수상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겠죠. 그래서 이번 상 받을 때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처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요.
전
: 12월 10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시상식에서 상과 상금 10만달러, 북한돈으로는 화폐개혁 전으로 따져 2억원 정도가 되는데요, 이 돈으로 무얼 할 겁니까?
김
: 이 상금은 제 개인보다는 저희 방송에 대해 주는 상입니다. 방송을 위해 이 돈으로 무얼할까 저희 이사진들과 토론을 했습니다. 그 결과 이 상금으로 저희가 늘 하고싶었던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북한내에서 몰래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을 모아 서울인권영화제를 여는 것입니다. 북한의 실상을 정말 객관적으로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동영상입니다. 몰래카메라로 찍은 것 말입니다. 그런데 북한의 내부 동영상은 저희들만 아니라 다른 단체도 많이 빼내 옵니다. 이런 가공되지 않은 동영상, 만들어 지지 않은 동영상, 한국이나 외국으로 나오는 동영상들을 상대로 영화제를 열어 북한 인권문제를 부각시키고 또 참가자들에게는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 입상한 사람에게는 상금도 주는 것입니다. 이번 상금이 종잣돈으로 쓰일 겁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 지난 5년동안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신분을 밝히지 않고 우리 방송 통장에 후원금을 보내주신 고마운 단체나 개인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분들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 못했습니다만, 이번 상금의 일부를 이들에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상을 받았습니다’ 라고 감사하는 신문 광고 비용으로 쓸 예정입니다.
전
: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조선 인민군 선전대 작가에서 한국의 대표적인 대북방송인 자유북한방송의 대표로 변신한 김성민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