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초대석] 북 탁아소 건립기금 모금 미 순회공연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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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손가락 여섯개가 모자라는 장애인이지만 굶주린 북한 주민들과 한국 내 탈북자들을 돕기 위해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열정적으로 피아노 연주활동을 하고 있는 이희아 씨.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통일소녀 등으로 잘 알려진 이희아 씨가 미국 주요 도시의 한인 천주교회를 돌며 11월 한 달 동안 자선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 씨의 미국 공연은 천주교 미주 가톨릭교회와 평화의 모후 선교회가 북한의 나진선봉에 짓고 있는 탁아소의 건립운영기금 모금을 위한 것입니다. 지난 12일 미국 워싱턴 인근에 있는 버지니아 성 정바오로 천주교회에서 열린 공연 현장에서 이희아 씨를 만나봤습니다.

//이희아의 피아노 연주//

이날 교회의 2천석을 꽉 메운 청중들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 영화 러브스토리의 주제가 등 감미로운 곡이 연주될 때마다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열 손가락의 피아니스트도 치기 힘들다는 쇼팽의 즉흥환상곡이 전광석화와 같은 네 손가락에 의해 정신없이 두둘겨 맞는 건반을 튀어 나오자 관객들은 열광했습니다. 신기에 가까운 그 솜씨에 놀라고 그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6년을 피눈물로 연습했다는 데 탄복했습니다.

전수일: 북한동포돕기연주회, 처음 시작은 언제부터 하셨습니까?

이희아: 2007년도 ITF 태권도협회주최로 북측 장애인들을 돕는 음악회를 했습니다. 그 수익금으로 휠체어를 전달했습니다. 하지만 북녘 상황이 장애인들을 위한 의료기구보다는 식량이 더 급했습니다.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제대학교 박제섭 교수님이 경남통일농업협력회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농사하시는 분들의 단체인데 북한에 농사기술을 가르치고 자업자득할 수 있게 돕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업협력회 주최로 처음에 마산에서 그리고 올해는 밀양에서 연주를 한 뒤 10월 19일에도 함안에서 통일음악회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통일소녀라는 별명을 얻게 됐습니다. 그러다 미국의 박창득 어거스틴 몬시뇰 신부님을 알게 돼 이번에 공연하게 됐습니다. 기쁘게 생각하고 하느님께도 감사합니다.

전: 피아노를 치기 시작한 것은 어릴 때부터였죠?

이: 네 제가 여섯 살 때니까 90년도였습니다. 그때쯤 동서독이 통일되는 걸 보고 특히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걸 보고 어린 나이에도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 왕래를 하지 못하다가 통일이 됐구나, 그런데 우리나라는 왜 아직 남북이 분단돼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들어 어머니께 물어 봤던 것이 북한동포를 위한 연주를 하기 시작한 계기가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기에 통일이 되면 좋겠다는 글도 썼었고 금강산에도 한 번 갔다 왔습니다.

전: 미국은 처음이세요?

이: 아닙니다. 밀알선교회 초청으로 일년에 한 두 번씩 왔었습니다.

전: 가톨릭을 믿고 있습니까?

이: 네. 세례명은 히아친따입니다.

전: 연주회의 수익금은 북한동포를 위해 사용되는데요, 처음에는 북한 장애인을 위한 휠체어를 보내는데 쓰였고 그 다음에는 콩우유를 보내는데 사용됐다지요?

이: 네. 그게 바로 경남통일농업협력회를 통해서 하고 있는 것인데요, 지금 한국정부의 대북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한 달에 천원으로 북한어린이들에게 콩우유를 마시게 하자는 지원 운동을 벌이고 있는 농업협력회의 홍보대사로 있습니다.

전: 음악회에서는 통일이나 북한동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주로 어떤 내용입니까?

이: 우리는 아프리카나 캄보디아도 돕고 있는데 같은 민족을 돕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과연 어떻게 보시겠는가, 그리고 북한쪽에서는 이걸 해주면 저걸 또 해달라고 하지만 우리는 지원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는 콩우유를 주면 학교도 지어달라고 하는데 그것도 해줘야한다고 저는 말합니다. 우리 민족이고 우리 부모님들의 고향이고 한 동포이고 한 핏줄이니까요.

전: 이희아씨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이: 저는 서울입니다.

전: 부모님 고향은 어딥니까?

이: 아버님은 경남 사천이고 어머님은 고성입니다.

전: 그럼 부모님이 실향민이란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네요.

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저희 아버님은 1967년도에 북한군 때문에 상이용사가 되셨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님은 저에게 우리 민족이 통일이 돼야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그런 점도 제가 통일소녀가 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전: 1967년에 상이용사가 되셨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이: 당시 연천지구에 공비가 많이 내려왔었잖아요. 그때 군인으로 공비 토벌을 하시다가 그렇게 되셨어요.

전: 이희아씨는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있습니까?

이: 금강산을 관광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전: 북한에 초청돼 연주한 일이 없습니까?

이: 네. 꼭 하게 되길 기도하고 있어요.

전: 1992년에 전국학생음악연주평가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셨고 또 장애극복 대통령상과 장애인 극복상도 타셨는데, 북한 아동들이 굶주림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장애인들이 장애를 극복하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 더 긴박하고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네. 대북지원을 천천히 하자는 분들이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북한의 상황은 아프리카 국가나 다른 나라들보다 더 심각합니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 하루 근근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특히 미국에 사는 동포들과 머리가 노란 미국분들도 북한의 굶주림에 관심을 가져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제 연주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보잘것 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자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처럼 우리 크리스찬들이 자선을 실천해 주면 좋겠어요.

전: 지금 그리스도 신앙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북한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없는데 북한이 만약 기독교 신앙을 가질 경우 북한에 어떠한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 제가 이렇게 얘기하면 북녘에서는 저를 안 좋게 볼 수 있겠지만 북한정권이 무너지고 참된 신이신 하느님을 믿으면 배고픔을 면하고 참된 구원을 얻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전: 북한을 방문했던 분들이나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으면 북한에서 장애인들에 대한 제도적인 차별은 상상을 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 차별에 대해 장애인의 한 사람으로서 생각하는 바가 있을 텐데요.

이: 우리나라가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기 때문에 지금도 장애인은 누구의 죄 때문에 태어났냐고 묻는 경우가 많아요. 근데 성경에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한 장님을 가리키며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본인이나 부모나 그 누구의 죄도 아니고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장애인의 몸으로 연주하고 찬양하고 부제도 되고 사제도 되고 목사도 된다면 하느님이 영광을 받게된다는 것을 전해드리고 싶어요.

전: 그러니까 장애인이든 장애인이 아니든 모든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차별을 해선 안된다는 말씀이시네요.

이: 네.

전: 근데, 북녘 동포뿐만 아니라 한국 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도우려 연주활동을 하고 계신데요, 지난 7월에는 탈북청소년들의 대안학교 설립운영기금 모금을 위한 음악회에 김철웅 탈북자 피아니스트와 같이 출연하셨죠?

이: 네. 참 뜻 깊었습니다. 그분은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음악의 자유 때문에 탈북하셨는데 중국에 있을 때 교회에 피아노가 있다고 해서 교회를 나가 하느님도 알게 되고 한국에 와서 새 삶을 살면서 한국여성과 결혼도 하고. 그분하고 연주한 것은 정말 뜻 깊었습니다.

전: 앞으로 계속해서 북한동포들을 위한 연주활동을 하실 겁니까?

이: 네 저는 제가 살아있는 한 늘 북녘동포들을 잊지않고 이 일을 계속 할겁니다. 그리고 제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통일이 되는 게 제 소원입니다.

전: 지금 몇살이죠?

이: 스물 다섯 살이요.

전: 5년 남았네요.

이: 네. 하루빨리 통일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이희아씨의 피아노 연주…//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굶주린 북한 주민들과 한국 내 탈북자들을 돕기 위해 미국 주요 도시 순회 공연 중 버지니아의 성 정바오로 한인 천주교회를 찾은 네 손가락의 피아니스트 이희아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