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한국에서 약학대학 학사와 북한학 준박사와 박사학위를 따낸 의지의 탈북여성 이혜경씨.
서울에 도착한 지 10년여만에 남한 사람도 도전하기 어려운 학위를 세 개나 따냈습니다. 그것도 함께 탈북한 노모를 돌보고 딸 둘을 키우면서 해낸 것입니다. 탈북 후 딸을 데리러 재입북했다가 보위부에 잡혀 고문당하고 정치범수용소로 넘겨질 순간에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김정일의 대사령으로 풀려난 이혜경씨.
재탈북해 한국으로 들어가 정착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배움의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그의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전수일: 이렇게 박사학위의 성취와 영광은 그 밑바닥에 그만한 대가와 고생이 없이는 이루기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002년도에 한국에 입국하셔서 북한의 약사 학위를 인정받지 못해 김 공장에서 야간 일하고 새벽에는 신문배달과 전단지 삐라 붙이기 등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통일교육원에서 북한 실상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석사과정 지원을 하게 됐다는데
그 얘기를 들려 주시죠.

이혜경 박사: 저희가 오니까 탈북자중에 고학력자 그러니까 대학졸업자들을 대상으로 안보교육단이란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교육단 일원으로 안보, 통일교육을 해왔습니다. 유명교수들도 나오시는데 강연이 끝난 뒤에 청강자들과 교제도 합니다. 근데 대학원생 청강자가 북한에 대한 실상을 꼬치꼬치 캐묻길래 무슨 전공을 한 사람인지 알아보니 북한학을 연구한다고 하더군요.
북에서는 '남조선'이란 말만 해도 매국노 역적으로 여기는데 여기 남쪽 대학에서는 북한에 대한 학과는 물론 준박사와 박사학위 과정까지 있다고 해서 너무 놀랐습니다.
'북한문제라면 나도 잘 알고 있는 것인데 그럼 나도 대학원에 진학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청강생 학생들이 저의 진학 관심을 교수들께 말씀드리게 됐고요. 교수님은 제가 공부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북한의 학력을 바탕으로 준박사와 박사 학위도 가능하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북에서 배웠던 사람이라 학구열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의 주선으로 북한학이 있는 대학원들에 원서를 넣고 입학이 허용돼 공부를 시작한 것입니다. 면접에서 지원하게 된 이유를 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남한에서 북한학을 공부하는 분들에게도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위해 학위를 향상시킬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학우들과의 교제를 통해 남한사회를 이해하는데도 도움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분들이 인정해 주셔서 석사과정에 입학하게 됐죠.
전: 공부 과정에서 남북 간의 문화차이나 북한에서 배운 것과 남한 대학원 과정에서 배우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서 어려우셨을 텐데요, 동료 학생들과 충돌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이: 학생들 가운데는 이론적인 공산주의 특히 북한이 마냥 멋있기만 한 공산주의라는 이념에 물든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또 북한을 자주 드나드는 대북사업자 부류, 예전의 주사파 부류와 주사파에서 전향된 부류 등 다종다양의 학생들로 구성됐습니다. 그것이 논쟁 발단의 한 이유였고 또 하나는 북한의 암기식 주입식 방법에 젖은 제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일단 교과서에 제시된 내용을 정해진 시간 내 정해진 날자안에 확실히 끝내야 합니다. 그러니 달달 암기하는 수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문장을 읽으며 이해하는데 중요성을 두면서 한 이론에 대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식으로 비판적 분석적 시각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 북한에서는 이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고 무조건 주입암기하는 게 원칙인데 여기서는 죽도 밥도 아니게 이런 식 저런식 등올 나열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이론의 갈피를 못잡겠다고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와 하고 웃더군요.
전: 자유세계에서는 모든 이론에 대한 개인 사상을 표현하고 서로 의견을 나누고 하는 환경이 북한에서는 맛보지 못한 것이라서 그런 분위가가 어려우셨을 법도 합니다.
이: 그렇죠. 그리고 학생들이 마냥 북에 대해 긍정적으로만 보는 부류의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런 학생들에게 북한 공산주의의 이론과 현실은 전혀 다르다고 얘기해 주면 그들은 ‘아무리 달라도 현실이 이론의 절반은 따르지 않겠냐? 전혀 무근거한 걸 이론으로 내세우겠느냐’는 식으로 대응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그게 바로 북한식 사회주의요 공산주의다. 현실과 이론이 천차만별인 게 바로 북한이다’ 라고 설명했죠.
전: 많이 답답하셨겠네요. 한국의 지성인이라는 대학원생들이 그렇게 따지고 드니.
이: 네. 그분들은 제가 북한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이니까 북한을 좋게 얘기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죠. 제가 볼 때 그런 주장도 일리는 있습니다.
전: 특히 북한에 동정적이거나 북한 사상에 비판적이 아닌 사람들은 ‘탈북자이기 때문에 너무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것 아니냐’는 비판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네요.
이: 그말도 맞기는 한데 북한의 현실은 시간이 가면 증명됩니다. 탈북자 대열이 이런 현실을 증명하지 않습니까? 논쟁은 그 정도로 끝냈습니다.
전: 하기야 거기가 지상낙원이고 잘 산다면 왜 고국을 등지는 탈북자 행렬이 이어지겠습니까?
이: 네. 갑론을박 논쟁을 많이 하면서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도 북에서 배운 약사직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삼육대학교 약학대학에 입학하셨다던데.
이: 네. 북한대학원에서 원우들과 교제를 하면서 그들이 제가 북한 대학에서 무얼 전공했는지 묻더군요. 그래서 약사였다고 했더니 그러면 약사하지 않고 왜 여기서 허송세월을 보내냐고 하더군요. 하나원에서 배우길 '북한에서 약사나 의사하던 사람들이 그 직업을 고집하면 여기서는 정착 못 한다'고 해서 '나는 남쪽의 약사는 북한과 전혀 다른 것으로 알고 엄두도 못낸다'고 그랬죠.
그랬더니 우리 원우 중 한 분이 자기 아내가 약사라면서 아내를 만나게 해줬습니다. 그분 얘기가 '세계적으로 과학은 똑 같은데 북한의 약이 남한과 다르겠냐.'며 그렇지 않다고 설명해 주시더군요. 근데 저는 남쪽의 화학기호는 북쪽 것과 다른 줄 알았습니다. 하나원에서도 북에서 한 것은 모두 버리고 새 것으로 시작하라고 했고요. 또 여기 남한에 들어 온 북한사람들에게는 모든 게 신비스럽기도 하거든요. 하지만 그분 말씀을 듣고나서부터 차츰 자신감을 갖고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전: 그러니까 북한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다음에 약학대학에 들어가신 것이죠?
이: 그렇습니다.
전: 한국에서는 북한 약사자격을 인정하지 않아 한국에 와서 약대 4년 전과정을 공부하신 셈인데요, 북한 자격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약학 공부가 다르던가요?
이: 해보니까 다르지도 않더군요. 근데 단지 다른 건 북에서는 한글교과서로 하는데 여기서는 원서로 배우는 게 달랐습니다.
전: 원서라는 건 영문 원서입니까?
이: 네. 미국 교과서를 가지고 합니다. 그렇다고 교수들이 모두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 영문 원서로 공부하려면 영어를 이해해야하는데 어렵지 않았습니까?
이: 처음에는 아예 꿀먹은 벙어리처럼 어려운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걸 상기하면 지옥입니다.
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하셨습니까?
이: 못 했습니다. 제가 애가 둘이 있습니다. 딸 둘. 어떻게 해서든 약대를 졸업하고 약사자격증을 쥐어야만 남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버티고 살아 남을 수 있다라는 그런 주입을 자꾸 받다보니… 남들과는 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포기해도 나는 더 뒤로 물러날 길이 없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께 ‘나는 죽으면 죽었지 그만두진 않을 것’이라고……’죽기전에는 그만 둘 수 없다’고 그랬습니다.
전: 결국 두 딸이 이혜경박사님의 약학대 과정을 끝가지 도전하는데 힘이 되고 동기가 됐군요?
이: 그렇죠. 살아야 할 이유와 성공해야 할 이유가 모두 딸들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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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런데 약학대 졸업 후 북한대학원대학교 석사과정을 마치고 2009년 봄 같은 학교 박사과정에 등록하셨죠?
이: 네. 그런데 제가 약대 다니는 4년 기간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제가 북한에서 다녔던 대학 4년의 학력에 대해 통일부장관의 직인 찍힌 학력확인서를 받아 북한대학원대학교에 입학했고 약대에도 그 학력이 고려돼 2학년에 편입했습니다. 저와 같이 편입한 그룹이 5명인데 남한에서 화학이나 영문을 전공한 학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학부의 학점을 인정받아서 1학년 과목이 대체돼 한 학년을 건너 뛰어 2학년부터 수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학점을 인정받지 못해 편입은 2학년으로 했지만 실제 1학년부터 공부를 해야해서 4년을 모두 했습니다. 그런데 약대 4년을하고 나니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학위 논문을 끝내지 않았으니 석사과정 수료만 할 것인지 아니면 논문을 쓰고 졸업하겠는지를 묻는 통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생해서 공부했는데 왜 수료로만 마치겠는가’ 해서 학위 논문을 쓰겠다고 했습니다. 약사 고시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니까 안심하고 대학원으로 다시 돌아와 논문을 썼습니다.
전: 대단하십니다. 남남북녀라고 북녘 여성의 강직한 생활력을 다시 한 번 증명하신 것 같습니다.
이: '의지의 한국인'이라 하더군요. 저는 한국인은 아닌데.
전: 그럼 '의지의 조선인'이라고 해야겠네요.
이: 네.
전: 근데 북한대학원대학교 박사과정에서 연구한 논문 제목이 ‘북한의 보건일꾼양성정책연구-체제수호 전위 양성을 중심으로’ 라는 것이었습니다. 석사학위 논문이‘북한의 보건의료 변화와 파행화에 대한 연구’인데 서로 연결이 되는 건가요?
이: 석사 논문은 90년대 후반기 고난의 행군시기 식량난 때 북한이 보건의료에서 상징적으로 내세우는 무상치료가 유명무실해지고 유상치료로 왜곡되다 시피했다는 내용입니다. 그 고난의 행군 식량난 시기에 폭발적으로 북한의 전염병 사태가 일어났는데요....
전: 무슨 전염병이었습니까?
이: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콜레라 발진티푸스 온갖 티푸스는 다 생겼습니다. 김일성이 94년 7월 죽고 나서 10월에 콜레라가 일어났습니다. 전국에 창궐해 몸살을 앓았죠.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어서는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발진티푸스 등이 전국적으로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났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북한에 보건의료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런 문제점을 논문 주안점으로 삼았습니다.
북한은 건국 초창기에는 단 한 개의 의대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일성이 무상치료를 실시한다고 보건일꾼양성정책을 내놓으면서 전국에 의대와 시설을 확장했습니다. 초기에는 평양의전과 함흥의전 두 개뿐이었습니다. 그 모태가 평양의학대학과 함흥의학대학으로 승격됐습니다. 그리고 나서 전국에 열 한 개의 의대가 동시 다발적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면서 의료인력 양성을 대대적으로 폈습니다. 지방 구석구석에도 의사와 약제사를 배정하기 위한 것이었죠. 그것이 무상치료제를 전국에 도입하는 기본 조치가 됐습니다. 건국 초기부터 견지해온 의료인력양성정책의 바탕이었죠. 그런데 85년부터 의대 6년제가5년제로 됐다가 90년대 후반 식량난 사태로 대학에 위기가 오면서 교육도 부실해 졌습니다. 이에 따라 보건의료의 기본 슬로건인 '정성운동'도 유명무실해졌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슬로건뿐인 정책이 된 현실을 연구한 것입니다.
전: 오랜 세월 석사과정과 약학대과정을 마치고 또 올 2월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기까지 학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벌었습니까?
이: 아까 언급한 신문배달, 전단지 부착, 그리고 방학 때에는 드라마 영화 찍는데 따라다니고 청소부도 해보고 별에 별 짓 안 해본 게 없습니다.
전: 영화 찍는데 따라다니셨다구요?
이: 네. 알바 없으면 그런데 다니면서 돈벌이 하러 다녔습니다.
전: 배우한 게 아니겠지요?
이: 배우가 아니고요 엑스트라 라고 사람들을 모집하는 게 있습니다. 대중이 필요한 장면을 찍을 때 공고를 냅니다. 자격여건 필요 없고 웅성웅성대는 대중만 필요하거든요. 밤 새워 출연하면 6, 7만원씩 법니다.
전: 그럼 대한민국의 영화에도 출연을 하셨다는 말씀이네요?
이: 아이고…
전: 무슨 영화인지는 몰라도 그게 디브이디 알판으로 북한에 들어가 사람들이 보면 이혜경 박사님을 찾아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언제 한 번 아이들이 드라마 보면서 ‘저기 엄마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엄마 좀 숨기라도 하지 왜 정면에 나오냐’고요.
전: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네요.
이: 네.
전: 북한에서 주는 배급이나 받고 봉급만 받으며 생활하다가 이렇게 남한사회에 와서 그야말로 본인 스스로가 홀로 서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을 하시면서 ‘북한이 편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까?
이: 북한에서도 그만한 노력은 하면서 살았습니다.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도를 열정적으로 보여주는 노력 혁신 같은 것입니다. 보건일꾼으로 병원에 있을 때 진짜 사경기의 환자가 나오면 피도 뽑아 헌혈하고 피부이식수술에도 참가하면서 정말 충성 노동은 다 해봤거든요. 근데 거기서는 그렇게 해도 보수는 차례 안 지고 단지 노동당 입당이나 국가 표창만 나오죠. 하지만 여기서는 노력한 만큼 대가가 차례지잖아요. 노력한 만큼 제 것이 생기는데 북한에서는 그런 것 없이 무형의 헌신을 그만치 하면서 살았습니다. 제가 그런데 숙달이 되어서 모든 게 공짜로 이뤄지는 게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압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 노력으로 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제가 전단지 부칠 때도 다 데리고 나가 같이 했습니다. 엄마가 단순히 공부만 하고 사는 게 아니라는 걸 아이들에게 알게 하고 자기 관리와 학력 향상을 위해 이렇게 노력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말 없이 하는 교육아닌가요?
전: 정말 대단하십니다. 통상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자기가 힘들게 노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을 텐데요.
이: 저는 애들을 어려서부터 강인하고 척박한 조건에서도 일어나야한다는 개척정신을 주고자 했습니다. 애들이 문방구에 가서 준비물을 마련해야한다고 할 때에도 언니와 동생이 서로 토론해서 하고 가급적 새로 사는 거는 금하라고 합니다. 용돈도 만원씩 밖에는 안 줍니다. 아이들을 너무 잔인하게 길렀습니다.
전: 하지만 그건 두 딸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자기 생활을 가꿔나가려면 그런 바탕이 있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 그렇죠. 그것이 아이들 공부에는 정신적인 양식이 되거든요.
전: 두 딸은 몇 학년이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습니까?
이: 큰 애가 고등학교 2학년이고 작은 애는 중학교 1학년입니다.
전: 아이들이 엄마 닮아서 공부는 다 열심히 하겠죠?
이: 작은 애는 ‘우리는 엄마가 너무 강해서 우리가 힘들다’고 해요.
전: 고등학교 2학년짜리는 이제 곧 대학교에 진학하게 될텐데요.
이: 그렇죠. 여기에서는 70, 80프로가 모두 대학을 가는데 가겠죠.
전: 그런데 약학대학을 졸업하셨는데 학사 자격증을 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제 2라운드는 약사 자격증을 따는 것이죠.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한국에서 약학대학 학사와 북한학 준박사와 박사학위를 따낸 의지의 탈북여성 이혜경씨의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