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지난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동남아 국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처음으로 북한인권주간 행사가 열렸습니다. 아세안, 동남아시아국가연합의 주요 국가이며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의 출신국인 인도네시아에서 이번 행사를 개최한 한국의 인권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은 이번 행사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연구기관, 인권기구, 대학에서부터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과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늘 초대석에서는 이번 행사를 이끈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을 모시고 인권주간 행사 전반에 관한 이모저모를 들어 봤습니다.
전수일: 참석자들이 전시회 그림을 사진으로 담고 탈북동포와 사진찍기도 하면서 아주 분주하게 개막식을 열었다고 하셨던데요 저희 청취자들을 위해 개막식 현장이 어떠했는지 묘사해 주시죠.
김영자 사무국장: 자카르타의 츠마라 갤러리는 다른 인권단체들도 많이 활용하는 곳입니다. 우리 북한인권주간 전시회 전에도 난민을 위한 그림전시회가 열렸던 곳이죠. 인권 의식이 있는 갤러리입니다. 저희 북한인권주간의 개막식에 100명 넘는 분들이 왔는데요, 특히 마르주끼 다루스만 유엔 특별인권보고관께서는 일찍 오셔서 28년간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됐던 탈북자 김혜숙씨의 그림들을 살펴보고 사진도 함께 찍고하셨습니다. 전시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숫자도 세어 보시고 재작년 22호 수용소가 없어졌다는 얘기도 나누시고 했습니다. 개막식 연설에서 다루스만 보고관은 북한은 나라 전체가 수용소이고 창살없는 감옥과 같다고 하시고 북한 정권이 국민을 보호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면 국제사회가 나서서 보호해야 할 것이라고 말씁하셨습니다. 탈북동포와함께 촬영하기도 하시고 담화도 하셨습니다. 그곳의 모든 언론이 촬영때 특히 관심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또 하나 저희가 준비한 것중에 탈북시인 장진성씨의 ‘내딸을 100원에 팝니다’ 시와 ‘사형수’란 시를 인도네시아 말로 번역해 낭독했습니다.
전: 김 사무국장님이 직접 낭송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김: 그렇습니다. 인도네시아 말로는 못하고 한국 말로 낭송했습니다. 시 내용은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해 자막에 올렸습니다.
전: 번역된 자막을 보고 청중이 낭송 내용을 듣고 이해했겠지요?
김: 그렇습니다. 청중이 모두 공감했을 것입니다. 또 우리가 행사 진행하는 건 모두 모두 인도네시아 말로 통역을 했습니다. 개막식 마지막에서는 우리나라의 아이돌 그룹과 같은 블링이란 인도네시아 그룹이 있는데요, 그 그룹의 멤버인 프리실라가 나와 비틀즈의 이매진이란 노래와 인도네시아 국민가수가 불렀던 ‘작은 촛불’이란 곡을 불렀습니다. 이 작은 촛불이란 가사에는 큰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촛불은 작은 방을 환하게 비쳐줄 수 있다는 것인데요, 그처럼 북한에도 밝은 빛이 비춰지길 기원하면서 이 가수가 기타 반주에 맞춰 불렀습니다. 잔잔하게 가슴을 울려줘서 감동 받았습니다.
전: 그 다음날에는 인도네시아의 국립과학원 강당에서 토론회 세미나가 열렸다면서요?

김: 네. 29일은 인도네시아의 국책연구원인 국립과학원에서 100여명이 참석해 북한인권문제를 토론했습니다. 이 국립과학원은 저희와 함께 이번 북한인권주간을 공동으로 주최한 기관입니다. 처음 함께 주최했다는 데에 의미가 있습니다. 연구원들이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많은 발표를 하면서 앞으로 인도네시아에서도 북한인권 문제가 상당히 파급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북한 인권 개선을 위해 걸어온 여정을 주제로 진행했습니다. 세미나 발표 중에서 관심있게 주목할 것은 아세안의 역할의 중요성이 부각됐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아세안의 의제로 북한인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 됐습니다.
전: 동남아국가연합- 아세안 국가 중에서도 인도네시아가 중추적 역할을 하지 않습니까?
김: 그렇습니다. 유엔에서 북한인권 결의안을 낼 때마다 동남아 지역이나 남아프리카 등에서는 반대나 기권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세안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는 인도네시아가 결의안에 찬성으로 돌아서서 이 문제에 관심을 많이 보이면 동남아 다른 국가들도 그걸 따라 올 여건이 마련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에 저희도 인도네시아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것입니다.
전: 국립과학원의 ‘리에프치 무나’ 연구원이 특히 아세안 역할의 중대성을 언급했다던데 그런 의미겠죠?
김: 그렇습니다. 아세안 역할이 이제까지는 미미했습니다. 북한 문제에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것이죠. 이제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넘어서서 북한의 폐쇄성을 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전: 같은 날 자카르타의 한인 국제학교를 방문했다던데요, 열한살의 유서 회고록으로 유명한 탈북학생 김은주 씨가 학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죠?
김: 그렇습니다. 은주씨는 본인이 11살의 유서 책 내용을 소개하고 또 자신의 북한 생활을 학생들에게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은주씨가 한국에 오기까지 어려웠던 과정을 저희가 다큐멘터리 동영상으로 만든 것이 있는데 이걸 보여줬습니다. 학생들은 아이들답게 많은 질문을 쏟았습니다. 북한말은 어떤 것인지 해봐달라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없다’란 표현을 설명해 주자 학생들이 서로 그 말을 주고 받기도 했고, 김정은이 사는 곳은 어디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많은 질문이 있었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못해 답변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50분 가량 진행했습니다.
전: 인도네시아에도 한인 교민이 많습니까?
김: 네. 7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교민 규모로는 굉장히 큰 것이죠. 90퍼센트 이상이 사업하는 분들이라고 합니다. 거기서 성공해 한국인으로 자부심이 크다고 합니다.
전: 교민 어른들을 대상으로 강연도 했다고 들었습니다. 탈북자 김혜숙 씨와 김은주 학생이 출연했나요?
김: 네. 한동대의 원재천 교수님이 탈북자 두 사람과 나란히 앉아 함께 대담형식으로 진행했습니다. 김혜숙 씨는 28년간 수용소에 갇혔 생활했던 경험을 자신이 그린 그림과 함께 설명했습니다. 은주 씨는 11살에 왜 유서를 썼는지를 설명했고요. 식량난으로 아버지 사망하고 먹을 게 없어 엄마와 언니가 식량을 구하러 나가면서 자신에게는 두부 한 모를 남겨주었다는 얘기. 내일 오겠다면 떠난 것이 하루 이틀 삼일이 지나도 오지 않았다는 것. 두부 한 모로 며칠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한 번에 다 먹어버리고 방바닥에 누워서 엄마와 언니를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아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고, 그래서 엄마 앞으로 유서를 썼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날 마침 엄마와 언니가 돌아 왔는데 식량은 못구해 빈손으로 왔다는 얘기. 그래서 셋이 모두 죽으려고 드러 누웠지만 사람의 목숨은 질긴 것인지,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이런 설명에 교민들도 감동했습니다. 이들은 탈북동포위해 자신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해서 저희도 힘을 얻었습니다.
전: 30일에는 그곳 인권위원회들을 찾아 갔다고 들었습니다.
김: 네. 인도네시아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권리위원회를 찾아 갔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과거 한 차례 방문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저희가 두번째로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관계자들은 바뀌었지만 서로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북한인권에 관한 얘기를 나누면서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함께 북한인권에 관해 같이 일하면서 관심을 가져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죠. 여성권리위원회를 방문해서도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같이 고민해보자며 의견을 나눴습니다. 거기서는 거기대로 한국에서 있었던 과거청산위원회 활동에 대해 이런 저런 것을 물었습니다.
전: 자카르타에 롯데쇼핑몰에서 행사를 하셨다고 하는데, 한국의 롯데그룹 것입니까?
김: 그렇습니다. 한국의 롯데가 진출한 것입니다. 쇼핑몰이 엄청 큽니다. 그곳 3층 에 넓은 공간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알리는 플래쉬몹을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학생 45명과 한국 교민학생 15명 해서 60명이 한사모- ‘한국을 사랑하는 모임’ 라는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이 한사모 회원들이 우리에게는 당연한 인권이 북한에는 절실한 빛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내걸고 밀양아리랑 노래에 맞춰 플래쉬몹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관람하면서 박수 쳐줬습니다. 아리랑 연주에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남북한이 함께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리랑 아니겠습니까? 그 노래를 들으며 여기 외국에까지 와서 북한인권문제를 외쳐야 하나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행사 마지막에는 한반도 지도를 만들어 거기에다 통일을 염원하는 손도장을 찍고 퍼포먼스를 벌였습니다.
전: 저희 청취자들 위해 ‘플레쉬몹’이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사람들이 특별한 계획없이 갑자기 무리를 지어 모이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죠?
김: 그렇습니다. 원래는 그렇게 하는 것인데 이번에는 60명이 저희 행사를 위해 미리 동작을 맞췄습니다. 그 자리에서 또 하나 놀란 건 행사를 구경하러 온 인도네시아 여학생들이 저희에게 다가와 우리 한국어로 말을 붙였습니다. ‘안녕하시냐?’ ‘한국말 배우고 있다’ ‘한국에 가고 싶다’고 했습니다. 한국의 한류가 이렇게 까지 피부로 느껴질 수 없을 정도로 다가왔습니다.
전: 인도네시아 청소년들도 한국 가수와 배우들의 영향을 많이 받는 모양이죠?
김: 네. 그렇습니다. 많이 받습니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이루’라는 가수가 인기가 좋다는데 곳곳에 이루 가수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습니다. 한류를 직접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 그런데 ‘크로싱’이란 영화를 상영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탈북자의 어려움 주제로 한 이 영화는 미국에서도 자주 상영됐었습니다. 이번 인도네시아 북한인권주간에서도 이틀 간 상영하셨다죠?
김: 그렇습니다. 영화 대사를 인도네시아 말로 번역해 자막처리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분들도 이 자막을 읽을 수 있어서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모두 감상후에 감동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첫 날 50여명이 시청했고 둘쨋 날은 100명이 넘어 상영장소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많은 관람객이 이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영화 상영이 끝난 뒤에는 탈북자 김혜숙 씨와 김은주 학생이 관객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듣고 관객도 울고 통역자도 우는 바람에 눈물 닦느라고 통역을 제대로 못하고 시간도 걸렸습니다. 관객들은 이 영화를 며칠 더 상영할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하고 디브이디를 주고 갈 수 있겠냐고 청하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저희는 인도네시아의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이 영화를 방영할 수 있다면 북한인권 문제를 널리 알리는데 큰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전: 그 영화가 탈북자의 비극을 생생하게 그려 세계 그 어느 곳에서 상영하더라도 보는 분들의 느낌이 같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감동했습니다.
전: 5월2일 마지막 날에 김은주 양이 무스타포 대학에서 강연을 했다던데요. 어땠습니까?
김: 네. 무스타포 라는 훌륭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이 대학교를 설립했다고 하는데요, 이 대학에서 저희들이 북한인권주간 행사를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저희에게 와서 강연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원재천 교수님과 김은주 학생이 함께 가서 강연을 했습니다. 근데 5월 1일은 메이데이 노동자의 날이고, 2일은 금요일이고 3일은 토요일이라서 학생들이 아무리 관심이 많더라도 얼마나 많이 올 수 있겠는지 궁금했습니다. 또 그 날짜들이 마침 대학교 중간고사 기간이었거든요. 하지만 그런 우려는 금세 불식됐습니다. 120여명 넘는 학생들이 와서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젊은이들 사이에 북한인권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앞으로 북한문제에 대한 인식이 인도네시아에서 크게 확산될 것으로 생각이 됐습니다.
전: 대학생들이 이런 북한인권 개선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학생들을 상대로 북한문제에 관해 수필대회, 에세이 컨테스트도 했다고 하셨죠?
김: 그렇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올 해에 북한인권주간 이란 행사 자체는 처음이지만 작년과 재작년에도 북한인권개선을 위한 켐페인은 두번 했었습니다. 이번이 세번째라서인지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된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에 ‘템포’라는 유력 시사주간지가 있습니다. 그 주간지의 ‘마리아 ‘기자가 북한인권 문제에 관심 갖고 취재를 해오고 있습니다. 그가 저희에게 대학생 에세이 컨테스트를 하면 좋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그곳 대학마다 에세이 컨테스트에 관한 포스터를 붙이고 SNS를 통해 홍보했습니다. 모두 33개 에세이를 받았습니다. 마리아 기자와 아드리아 박사 그리고 콘트라스의 부대표가 심사해 그 중에 2개의 에세이를 선정했습니다. 1등은 여학생, 2등은 남학생이 뽑혔습니다. 1등 한 학생은 인도네시아와 한국 간 왕복 항공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등을 한 학생은 갤럭시 핸드폰을 받았지요. 일등한 이 학생이 상품 수여식에 한 말이 이 항공권으로 북한까지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국에 가게 돼 기쁘고 다음 달 한국에 가면 북한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고 활동하고 싶다고 했고요. 행사가 끝난 뒤에 그 학생이 저희에게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인턴 실습사원으로 일할 수 있겠냐고 물어 왔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3개월 간 그 학생이 인턴을 할 수 있도록 여권 문제를 알아 보고 있습니다.
전: 정말 훌륭한 일입니다. 혹시 1등과 2등 학생의 수필 내용에 대해 들으신 것이 있나요?
김: 1등을 한 학생은 법학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학생은 북한인권을 국제법적으로 어떻게 풀어 나가는 게 좋은지에 대해 썼다고 합니다. 현재 그 에세이는 한국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전: 5월 2일 행사 마지막 날, 북한 대사관 앞에서 봉변을 당했다는 얘기는 무엇인지요?
김: 봉변이라기 보다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폐막식 날 북한인권 개선을 촉구하고 북한에 인권침해를 중단하라는 자카르타 공동성명서를 그쪽 공동주최측인 콘트라스와 함께 냈습니다. 저희가 그 공동성명서를 북한 대사관 앞에 가서 다시 낭독하고 그걸 북한 대사관에 전달하려는 행사였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대사관 앞에서 공동성명서를 읽으려 할 때 대사관 관계자가 나와서 저희 행사를 방해하고 저희가 들고 있던 현수막을 뺐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다시 빼았았고요. 그러면서 북한 대사관 관계자는 우리들 사진을 찍었고 우리도 그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런 실갱이가 있은 뒤에 우리는 공동성명서를 봉투에 넣어 북한 대사관 건물 안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공항으로 떠났죠.
전: 근데 북한인권주간 행가 기간인 4월 28일부터 5월 2일 사이에 탈북자를 구했다는 소식을 전하셨던데요.
김: 네. 우리가 늘 하는 일이 중국에 숨어 체류하고 있는 탈북자들 중에 위급한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인도네시아에서 북한인권주간 행사를 위해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탈북자 세명으로부터 구출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모금을 위해 관련 단체들에 서신을 보낸 뒤에 출국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인도네시아에 가 있는 사이에 그 세명이 무사히 구출됐다는 소식을 연락받은 것이죠.
전: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김: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했죠.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지난 4월 말부터 5월 초까지 동남아 국가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처음으로 북한인권주간 행사를 개최한 한국의 인권단체 북한인권시민연합의 김영자 사무국장을 모시고 행사 전반에 관한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