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미국에 이민 와 가구사업을 하다 탈북자를 구출하고 북한 주민에게 기독교 선교를 하는 활동가로 변신한 스티브 김. 그가 최근 자신의 영문 회고록' The Fearless Passage of Steven Kim'을 펴냈습니다. '두려움 없는 여정'이란 제목의 이 책에서 그는 탈북자들의 제3국 탈출을 도운 죄로 4년동안 수감됐던 중국감옥 생활, 출옥 후 인신매매 희생 탈북자 구출, 대북 기독교 선교사업 등 지난 14년여에 걸친 자신의 북한주민에 대한 사랑의 역정을 놀라운 감동으로 풀어 내고 있습니다.
그는 현재 318 파트너스 (318 Partners Mission Foundation) 라는 선교단체를 세워 북한에 기독교 신앙과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전: 중국에서 사업을 하시다가 탈북자를 돕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김: 태어날 때부터 기독교인입니다. 거기에서도 교회를 다녔습니다. 90년대 후, 95년부터 97년 사이 탈북이 크게 늘어났습니다. 탈북자들은 한국으로 가든가 중국을 거쳐 몽고쪽으로 많이 탈출했습니다. 몽고 내 사역자들이 한 두 사람 붙잡히면서 탈북자들도 몽고 지역을 벗어나 홍콩쪽으로 가는 행렬이 시작됐습니다. 어렵게 구걸해 모은 돈을 가지고 홍콩에 도달하기 전에 중국 남쪽에 내려가 머문곳이 중국 광동지역의 심천시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제가 사업했습니다. 중국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은 말이 통하는 길림성 지역에 주로 자리 잡았지만 광동지역에도 1만명 정도의 한인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1998년, 1999년경이었는데 심천에 교회는 3곳뿐이었습니다.
교인들은 모두 250명정도였고요. 한인 기독교인이 25퍼센트는 된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1만명 중에 적어도 2천5백명은 교회에 나올텐데 그 10퍼센트 정도밖에 안된다면 모두 교회는 안 나오고 어디에 갈까 궁금했습니다. 많은 한인들이 교회 대신에 유흥업소, 마사지팔러 등에 간다는 걸 저희 교회 젊은 집사들에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신문광고를 하자고 했더니 중국 공안에 노출되면 교회가 문을 닫을 수 있다면서 다수가 반대했습니다. 목사님도 반대했지만 우리는 결국 한인 교민소식을 전하는 광동 소식지에 교회 광고를 냈죠. 한인들이 몰려 오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상해 이남에서는 제일 큰 교회가 됐습니다. 그런데 홍콩행을 기다리며 심천에 있던 탈북자들도 우리 광고를 보고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 탈북자들이 교회를 가면 도움을 받는다는 건 알았습니까?
김: 그렇습니다. 이들은 북한에서 도강하면 도움 받을 곳은 교회라는 걸 알고 있었죠. 조선족들도 탈북자들에게 교회에 가면 도움 받는다고 보냈거든요. 그걸 경험한 분들이라서 심천에서도 교회에 발길을 돌린 겁니다.
전: 원래는 그곳의 한인들을 인도하기 위한 광고였지만 그 광고를 보고 탈북자들도 왔다는 말씀이네요.
김: 그렇죠. 하지만 이들이 탈북자 신분이란 것을 알게 된 교회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탈북자가 교회에 나오는 걸 중국 공안이 알게 되면 교회가 폐쇄될 것이란 두려움이었죠. 그래서 돈이라도 주어서 내보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두 명씩 교회에 나오는 탈북자들은 제가 사는 아파트에 데리고 가 묵게 했습니다. 제가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저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파트 방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한 두 사람이 몇 주 지나다 보니 네댓 명으로 늘고 결국 아파트 수용인원을 초과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아예 따로 아파트를 얻어서 탈북자 합숙소로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솥과 식기를 마련해 주고 쌀과 부식도 구입해 주었습니다.
이들이 돈을 벌어 고향으로 가게 해주면 되겠다 싶어서 제가 아는 홍콩계 가구공장에 취직시켜줄 요량이었는데 한 사람 빼고는 모두 한국에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가구 사업가인 제가 한국행을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터라 인터넷에 올라가 검색해 봤더니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자신들의 탈북과정을 수기로 올린 것이 많더군요. 그들에게 한국에 들어간 방법을 물었더니 그걸 알려주는 대가로 큰 돈을 요구했습니다. 그만한 돈을 쓸 수가 없어서 탈북자들에게 각자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일부는 아파트를 떠났고 또 일부는 심천에 남아 가구 공장에서 일하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4,5개월 흐르고 나자 저희 교회 목사님이 탈북자들이 베트남을 통해 한국에 가는 경우가 많다고 알려 줬습니다.
이 때가1999년 말이었습니다.
전: 그래서 탈북자들을 베트남에 보내기로 하셨나요?
김: 제가 뭘 안다고 보내겠습니까. 목사님께 베트남에 아는 분이 있나 여쭤봤죠. 우리 교단에서 파송한 선교사가 거기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분께 사연을 전하고 도움을 요청했더니 와보라고 하더군요. 거기 가서 호치민시에 있는 한국 연합교회의 집사님을 소개 받았습니다. 그분이 공장을 운영하는데 그분의 베트남 운전기사의 남동생이 탈북자 안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과 연결이 되어
내가 탈북자들을 베트남 국경까지 보내면 그 사람이 국경에서 호치민시까지 데리고 가는 안내역을 맡아주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탈북자들이 저희 교단 교회에 안전하게 도착했다는 전갈을 확인하는 대로 경비와 대가를 지불하기로 다짐하고 돌아왔습니다.
전: 탈북자 한 사람당 돈은 얼마나 지불하기로 하셨나요?
김: 한 사람당 650불씩입니다. 제가 나중에 중국 감옥에서 출감하니까 인플레가 되어 1300불로 올랐더군요. 당시 제 사업이 잘 돼 물질적 재정적 여유가 있어서 1인당 650불을 마련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데리고 있던 탈북자들을 4명 1조로 만들어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4명 1조로 했던 이유는 이렇게 집단으로 보내면 1인당 브로커 비용이650불에서 450불로 떨어졌습니다. 브로커로서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안내하는 건 같은 일이니까 4명을 한 조로 보낼 경우 450불로깎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탈북자들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안전하게 도착하면 송금을 했습니다. 그 일을 2003년까지 4년 동안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3년 9월 중국 공안에 체포됐습니다.
전: 어떻게 해서 체포됐습니까?
김: 광동 지역 중국인들을 중국 북쪽지역과는 달라 돈벌이에만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라서 인권문제나 탈북자문제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안전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제가 아는 한국 내 목사님 한 분이 연길에서 꼭 데려와야 할 탈북자가 있다며 부탁을 하더군요. 그 분께는 이미 과거 부탁을 받아 탈북자 몇 명을 보내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 받은 사람을 포함해 4명을 연길에서 데려오기로 했고 그 밖에도 별도로 청도 천진 심양 교회를 통해 저에게 보내질 탈북자 5명의 또 다른 그룹이 두 세시간 차이로 기차역에 도착하기로 사전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연길에서 오는 4명 중에 한 명이 중국 공안의 끄나풀이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중국 공안은 저를 잡기 위해 연길에서 남쪽 광동까지 수사대를 보냈습니다. 탈북자 밀수조직을 타진하라는 내부 방침에 따라 탈북자 한 사람을 미끼로 던져 연길 교회에 잠입시켰던 것이고 그 자가 4명 조에 끼어 우리에게 오게 된 것이죠.
전: 4년 옥살이를 하셨다죠?
김: 2003년 9월 공안에 체포돼 2007년 9월, 정확히 4년만에 출옥했습니다. 원래는 5년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1년 감형된 것은 감옥에서 꽃을 수없이 만들고 하루에 4천개 못을 박고 하는 노동을 성실히 한 것이 참작됐습니다.
전: 감옥생활 하는 중에 간수와 살인범에게도 전도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감옥 안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도할 수 습니까?
김: 법적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감옥 법으로 협박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죄수가 종교행위를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감사하게도 미국 시민권자였습니다. 좋은 점은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나한테 욕질을 해도 손은 못 댔습니다. 구타는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영사가 매달 면회를 왔는데 저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 하나는 건강에 대해 묻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인권침해를 받은 것이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질문 외에 다른 질문은 중국 당국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만일 구타당하고 인권침해 받았다고 하면 미국 영사는 중국 외교부에 항의 할 것이고 중국 정부는 그게 신경이 쓰여 간수나 감옥 관계자들이 저를 구타하지 못하게 한 것이죠.
전: 탈북자를 돕다가 4년 간 중국 감옥에 수감되셨는데 출옥해서 탈북자 지원사업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하셨습니까?
김: 출옥해서 미국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니까 많은 기자들이 나왔는데 똑 같은 질문을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제까지는 탈북자들이 저에게 도와달라고 해서 도왔지만 앞으로는 내가 그들을 찾아 다니면서 돕겠다고 했습니다.
전: 그 이유는?
김: 2002년, 2003년에 '목적이 이끄는 삶' 이란 책이 많이 읽혔습니다. 아내가 감옥에 그 책을 보내줬습니다. 그걸 읽고 제 삶의 목적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기쁨이 되도록 태어난 사람이고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안에 형제이므로 나의 삶의 목적은 예수님을 닮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 섬기는 삶을 살자. 섬기는 삶이란 무언가? 복음을 전하고 탈북자를 섬기는 것이 바로 섬기는 삶이다' 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전: 부인께서 중국 내 사업을 대신 하고 김 대표께서는 미국에 돌아와 탈북자 돕기 운동을 또 시작하셨습니다. 그 운동을 어떻게 전개하시게 됐는지 소개해 주시죠.
김: 하느님이 뭔가 시켜주실 것으로 생각하고 기다렸습니다. 미국에 귀환 후 2주 지나서 워싱턴의 수잔 숄티 여사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비록 4년 징역형을 다 채우고 나왔지만 숄티 여사는 제 구명운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숄티 여사가 제게 워싱턴 디펜스포럼에 와서 중국 감옥에서 경험한 인권상황을 얘기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워싱턴에 내려가 수잔이 그 동안 서명 운동했던 상 하원 의원들을 만나고 수잔과 함께 북한인권 일을 하게 됐습니다. 워싱턴 주재 중국 대사관 앞에서 시위도 했습니다.
그런데 2008년 5월 3일 워싱턴에서 벌어진 북한자유주간 행사 종료 하루 전날 갑자기 하느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인신매매 탈북여성을 구출하라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비록 인신매매 문제는 한국 내 여성탈북자들을 통해 들은 것이었지만 저에게는 그것이 하느님의 명령으로 믿게 됐습니다. 그날로 318 파트너스 선교회를 만들게 됐습니다.
전: '318파트너스'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됐습니까?
김: 중국정부에서 내게 5년 징역형을 선고한 법적 근거가 중국형법 318조입니다. 타인비법월경죄 및 조직죄인데요, 타인이 국경을 넘도록 도운 죄입니다.
출옥 뒤에 제 얘기를 영화나 책으로 펴내보라는 권고를 몇 차례 받고 그 제목을 생각해보다가 그 318조가 떠올랐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다 보니 그 318이란 숫자가 하느님 말씀에도 있지 않겠나 싶어 성경을 찾아 봤습니다.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납치돼 끌려갔을 때 그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자신이 소유한 사병 318명을 동원해 납치범들을 좇아 조카를 구출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중국정부는 318조로 하느님 사람을 가뒀지만 하느님은 318명의 사람을 보내 구출했습니다. 그래서 318이란 숫자가 탄생했습니다. 그때부터 318파트너스선교회를 이끌면서 갇혀있거나 핍박 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북한 여성들은 탈북해 중국에 가면 거의 100퍼센트 팔려간다고 보면 됩니다. 유부녀든 처녀든 구분이 없이 팔려갑니다.
전: 318 파트너스 주요 활동 목적은 인신매매 탈북여성을 구하는 것이었습니까?
김: 네. 그렇습니다. 인신매매범들로부터 도망쳐도 갈 곳이 없고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다시 팔려갈 탈북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2008년부터 2009년까지 2년 간 전적으로 그 일만 했습니다. 그런데 2009년 어느 날 수잔 숄티여사의 모임이 있어서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건 북한을 자유케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북한을 자유케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반문했더니 북한 안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란 대답이 떠 올랐습니다. 즉 북한 내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 북한을 자유케하는 첩경이란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두 번째 사역으로 북한 안에 지하교회를 구축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전: 그렇군요. 그러니까 북한 내 지하교회 구축하는 사업은 2009년부터 시작된 거네요.
김: 네. 그렇게 마음을 주시니까 필요한 사람도 주시더군요. 중국에서 추방된 뒤 저는 중국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 내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저는 미국과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 등 동남아에서 사역을 하고 그분은 중국에서 선교사를 훈련시켜 북한에 들여보내는 사역을 했습니다.
전: 탈북자들이 북한에 들어가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게 대단히 위험한 일일 텐데요.
김: 사람을 붙들고 예수를 믿으라는 그런 사역이 아닙니다. 우리를 쓰는 하느님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저도 작년에 북한에 들어갔다 왔습니다만 거기에는 예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북한 주민들에게 성경책을 주고 기독교 신앙을 전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말입니다. 북한에 들어가는 선교사는 탈북자가 아닙니다.
전: 작년에 방북 했다고 하셨는데 어떤 일로 방문하셨었나요?
김: 북한에서는 통신 전기 교통 등의 인프라 기반시설이 없으니까 누군가가 들어가서 북한에 그런 시설 건설을 해 주길 바랍니다. 특히 한국의 해외동포가 경제적 사업적 지원을 해 주는 걸 환영합니다. 근데 저는 원래 사업가였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런 계기로 북한에 들어가 87년 제가 중국에 사업차 갔을 때의 북한과 얼마나 바뀌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를 통해 북한에 하느님의 축복이 주어지길 바라기도 했고요.
전: 북한에 들어가셨을 때 교회에서 예배를 보셨습니까?
김: 북한의 교회에서 예배 보지는 못했습니다.
예배 드리는 게 저희의 목적이 아니었고 거기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책과 찬양집을 갖고 들어가 이분들과 매일 사적으로 만나 예배하고 또 북한에서 만나는 사람들, 안내원들을 위해 마음속으로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전: 지하교인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김: 아닙니다. 지하교인들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지역마다 다르기도 하고요.
전: 그럼 북한에 들어가 만났다는 선교사라는 분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김: 저와 같은 마음으로 거기에 들어가 거주하는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가족들도 데려가 있습니다.
전: 결국 사업가의 지위로 북한에 들어가 있는 분들인가요?
김: 그렇죠.
전: 그럼 지금 현재 2차 소명이라는 북한선교를 하신 게 2009년부터인데 아직도 그런 일을 하고 계십니까?
김: 네. 전에는 북한을 떠난 사람들, 탈북자나 인신매매 당하는 사람을 돕는 소명을 주셨는데 지금은 북한을 떠난 사람보다는 그 안에 있는 2천4백만명 모두를 품으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탈북해 한국행을 바라는 사람들을 돕기보다는 중국 국경을 넘어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합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북한에 있을 때 의사, 간호사, 교원, 농사꾼, 상인 등 다양한 직종 경력이 있는 사람들인데 이들 모두가 하는 말은 한 마디로 배가 고프다는 것입니다. 이들 중에 한국 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두 중국에서 돈을 모으면 고향땅과 가족이 있는 북으로 다시 들어가 굶고 있는 가족과 형제들에게 약과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합니다.
전: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간 주민들이군요.
김: 네. 안내자 없이 자발적으로 도강하는 사람들인데 배가 고파서 넘은 분들입니다.
전: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도웁니까?
김: 그분들 원하는 것은 배고픔의 해결이니까 그들이 북한에 돌아가서 뭔가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죠.
예를 들어 그들이 장마당에서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저도 장마당에 가 봤는데 많이 발전했습니다. 북한 당국이 아무리 없애려 해도 없앨 수 없는 북한사회의 필수적인 것으로 된 장마당은 축복인 것 같습니다. 가 보니 인터넷 동영상에서 보아 온 그런 장마당이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남대문 동대문 시장처럼 질서정연하게 갖추고 물건도 많고 카펫이나 가구 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장마당에서 체계적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장마당에서는 떨어진 골목에서도 먹고 살기 위한 상행위가 많이 이뤄지고 있는 걸 봤습니다. 그래서 도강하는 분들이 고향에 돌아가면 장마당에서 뭔가 할 수 있게 도와주면 자기들 삶도 여유 있을 것이고 또 우리가 원하는 복음도 전할 수 있습니다.
전; 물론 스티브 김 대표께선 직접 들어갈 수 없으니 그쪽의 파트너, 선교사를 통해 이 일을 하시겠군요?
김: 그렇죠. 저는 중국에서 추방당해 다시 들어가지 못했었지만 하느님이 다시 중국 문을 열어 줬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중국에도 마음대로 드나듭니다. 그리고 북한 문도 열어 주셔서 북한에도 들어갔다 왔고요. 중국 감옥생활 대 만난 귀한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이 파트너입니다. 중국 분들입니다.
전: 이 책에 보면 모든 장마다 성경구절을 쓰셨더군요. 하느님 믿음을 바탕으로 탈북자 구출과 선교를 하신 걸 알 수 있습니다. 영문판으로 책을 쓰셨는데 미국인이나 세계인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고 싶으셨나요?
김: 우리가 어디에 살든 가장 큰 우리의 적은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앞서면 우리의 목적과 활동을 펼 수 없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온전하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진다는 걸 중국 감옥에서 경험했습니다.
감옥에서 저희 예배를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이 안보였습니다.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완전히 반신불수가 됐더군요. 또 저를 공격한 사람이 그렇게 된 것도 봤습니다. 두 번이나 이런 일을 경험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의지할 때 중국 감옥과 같은 험악한 곳에서도 천국 같은 생활을 할 수 있고 항상 기쁨과 감사함 가운데 살 수 있다는 메세지를 이 책을 통해 나누고 싶었습니다.
전: 왜 책을 한국어가 아닌 영문으로 펴내셨습니까?
김: 한국에서는 출판해 주겠다는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책을 내 주겠다는 출판사가 있어서 영문으로 펴낸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에서도 토기장이 라는 출판사가 책을 만들겠다는 언질을 주어서 한글판 원고의 집필이 거의 끝났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미국에 이민 와 가구사업을 하다 탈북자를 구출하고 북한 주민에게 기독교 선교를 하는 활동가 스티브 김씨와 함께 그의 최근 펴낸 영문 회고록 'The Fearless Passage of Steven Kim' '두려움 없는 여정'에 관해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