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는 한 마디도 배워 보지 못한 영어로 미국인과 인터넷 텔레비전 방송을 진행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미국의 주요신문 워싱턴포스트에 북한의 장마당 경제와 젊은 세대의 의식 변화를 알리는 논평을 기고해 한국 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탈북 여성 박연미 씨.
17살 때 어머니와 함께 몽골을 거쳐 2009년 가을 한국에 들어간 박연미 씨가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은 겨우 1년 남짓. 지난달 (6월) 중순에는 미국 서부의 한 대학교 토론회에 참석해 자신의 탈북과정과 북한 김씨체제의 종말론에 대해 열띤 강연을 펼쳤습니다.
오늘 초대석에서는 현재 한국의 동국대학교에 다니고 있는 21살의 박연미 학생과 함께 북한문제에 관한 그의 종횡무진한 생각과 활동에 대해 들어 봤습니다.
전수일: 박연미씨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하신 논평 잘 봤습니다. The hopes of North Korea's black market generation, 그러니까 '북한 장마당 세대의 희망'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는데요, 주체사상은 죽고 시장경제가 뜨고있다는 사실은 북한 정권은 알아야 한다고 쓰셨는데
이 기고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그 핵심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시죠.
박연미: 기고문에서 핵심은 북한 사람의 삶입니다. 친구들이 그렇게 살았고 또 제가 봤던 북한의 삶이고 모습입니다. 북한의 경제, 그리고 사람들의 새로운 생활의 방향의 현주소를 그렸다고 봅니다. 지금까지 북한이라면 고난의 행군 등의 힘든 부분만 알려져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북한의 젊은이가 어떻게 살고 있고 그들의 의식세계가 어떠한지, 즉 북한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세대의 생각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을 쓴 글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전: 이 글에서 북한의 젊은이들의 특징을 세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그 첫째로 젊은이들은 김씨 왕조에 대한 헌신이나 충성심이 없다고 하셨는데요.
박: 전혀 없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친구들과 많이 어울렸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김씨 왕조가 좋아서 그들의 혁명 활동을 공부하고 혁명 충성가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특별한 일이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싫어도 해야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죠. 그런 교육에 다른 소리를 내지 못한 것은 공포정치가 두려워서입니다. 김씨 왕조에 대한 어떤 충성심도 없습니다.
전: 또 장마당 세대들은 한국 드라마, 영화 등 외부 세계의 소식과 문물을 많이 접하고 있는 것도 한 특징이라고 논평에서 언급하셨는데요.
박: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릴 때의 기억은 아침에 눈만 뜨면 수퍼마리오 게임을 했습니다. 게임을 많이 했고, 또 미국의 프로레슬링 프로그램도 보고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도 봤습니다. 미국 영화 타이태닉, 007 첩보영화, 그밖의 액션 드라마도 보고 백설공주 등 서방의 드라마를 많이 보변서 자랐습니다.
전: 그런 걸 어떻게 무엇으로 봤습니까?
박: 디브이디로 봤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친구들끼리 타이태닉, 프리티워먼 같은 영화도 서로 바꿔 봤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점점 발전해서는 장마당에서 빌려 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아랫 동네’ 디브이디를 대출받을 수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물론 비밀리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죠. 최근에는 디브이디 보다는 유에스비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기기가 더 간편화 되어 더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죠.
전: 그렇군요. 그리고 젊은이들의 세번째 특징으로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박: 제가 일곱살 때, 학교가 끝난 뒤 집에서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할아버지 대원수 님은 주체 몇 년도 탄생하셨고, 몇 년도에 일제를 처부셨다는 내용을 외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따위 공부하지 말고 돈만 셀줄 알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텔레비전에서 김정일의 현장지도 장면이 나오면 ‘저 개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냐’면서 텔레비전을 끄시곤 했습니다. 그런 것이 제가 자란 가정 환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한 번도 북한에서 배급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이 뭔지 모르고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돈을 벌어 저희를 먹여 살렸습니다. 그러니까 태어나서 자본주의 경험을 한 셈이죠. 돈이 흐르는 시장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운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장사에 더 집중하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동네 이웃에서 사는 사람들을 잘 모르고 소통이 단절된 분위기였죠. 각자 개인주의가 더 강해졌던 겁니다. 요즘 저희 세대, 또래는 자본주의화 했습니다. 공산주의도 모르고 개인적 성향이 강합니다.
전: 아버지가 장사로 벌이를 하셨다는 말인가요? 장마당 장사를 하셨나요?
박: 아버지는 당원이셨습니다. 시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도 일하며 사회적으로 고위직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2000년 경제개혁조치로 그 이후에는 기업소에서 일했습니다. 근데 기업소에서는 수익금 일정액을 맞춰 주기만 하면 밖에 나가서 장사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기업소에 일정액 수익금을 채워 놓고는 출근을 하지 않은채 밖에서 장사하셨습니다. 금속등 위험한 물품을 중국에 밀수했죠. 신분은 당원이고 지도원이었지만 불법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월급이 없으니 그럴 수 밖에요.
전: 당원도 월급을 그처럼 못 받는 사람들이 많았을텐데, 그런 사람들도 아버지처럼 그런 식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겠네요?
박: 거의 98퍼센트는 한다고 봐야죠. 북한 당국이 주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북한의 월급은 쌀 1키로그램 살 돈도 안 됩니다. 그래서 간부들은 권력을 이용해 뇌물을 받아 살거나 아내가 장마당에 나가 장사해 먹고 삽니다. 그러니까 돈을 버는 경제 활동을 하게 된 것이죠.
전: 잠시 전에 아버지가 조선중앙텔레비전에 김정일이 현장지도하는 장면이 나오면 욕을 하고 무시하는 행동을 보였다고 했는데, 다른 일반 당원이나, 지도원, 중상 계층 사람들도 그랬을까요? 당성이 있고 충성하는 게층인데요?
박: 제가 어릴 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90년도에 소련이 무너지고 동떨어져 남아있는 건 우리 하나라는 말이었습니다. 중국이나 외국을 따라가려면 100년도 더 걸릴것이란 말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이 붕괴되고 공산기가 내려졌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저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여하튼 우리도 중국처럼 경제를 개방해야 한다는 말 많이 들었습니다. 중국이 하루 다르게 경제가 향상되고 있는 걸 보고 북한 사람들도 우리 북한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만 공포정치 때문에 그걸 표출하지 못 할 뿐이었습니다. 잘 못 걸리면 총살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누구도 불만을 나타내거나 반발 하지 못한 것이죠. 비록 한다 해도 즉기 진압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불만이 혁명으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전: 박연미씨가 쓴 워싱턴 포스트 인터넷 판에는 미국인 독자들이 쓴 댓글이 많이 올라 있는 걸 읽어 봤습니다. 그러니까 나름대로의 생각을 써 올린 작은 논평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중에 한 사람의 글을 봤는데, 꾸바와 북한을 비교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과거 몇차례 꾸바를 방문했었다며 꾸바도 20년 전에 장마당이 시작됐고 그게 발전해 이제는 제법 시장경제적인 면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꾸바의 독재자 카스트로 형제가 죽게 되면 아마 꾸바는 완전히 시장경제 체제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썼습니다. 꾸바와 북한의 현재를 비교하는 측면에서 박연미씨는 김정은이 죽지 않고 계속 통치할 경우에도 북한의 장마당이 확산될 것으로 보나요?
박: 네. 그건 너무나 확실합니다. 북한에서 장마당이 무너지면 98퍼센트의 북한 사람은 굶어 죽게 될 겁니다. 김정은 주위의 극소수, 0.1퍼센트의 간부들만 빼고는 북한에서 장마당이 없으면 생존 가능한 사람은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장마당 활동을 해서 먹고 삽니다. 장마당이 북한 경제를 지탱해 주고 있는 것이죠. 거기에다 탈북자들이 북한 가족에게 돈을 보내 주는 것이 북한의 장마당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장마당 무너지면 북한이 무너진다고 봐야 합니다. 전부가 굶어죽는 겁니다. 북한 당국이 장마당 막을 수 있는 방안은 없습니다. 북한 주민은 장마당을 통해 확보한 남한 드라마를 봅니다. 이들도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압니다. 주위 사람들이 수용소에 가거나 총살당한 경우를 압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드라마를 봅니다. 그건 그것을 통해 자유를 맛보는 것이고 그걸로 생활의 스트레스를 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에 대해 배우고 알게 되는 겁니다. 근데 이런 걸 보는 건 일반인들만이 아닙니다. 간부들도 봅니다. 그래서 북한 장마당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확산될 것으로 봅니다.
전: 워싱턴 포스트 신문에 오른 논평을 읽기 전에는 저도 박연미씨가 누구인지 잘 몰랐습니다. 도대체 누구인데 이렇게 수려한 문장으로 미국 유력 신문에 논평을 쓰는지 궁금해서 인터넷을 검색해 알아 봤습니다. 그랬더니 최근에 미국인 케이시 라티그 씨와 공동으로 텔레비전 파드케스트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더군요. 영어로 진행을 하시던데요, 궁금한 것이 영어로 하면 북한은 물론 한국사람도 이해가 어려울텐데 누구를 대상으로 하는 것일까였습니다.
박: 시청자는 당연히 전 세계인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영어가 세계 공통어이니까요. 제가 한국에서 여러가지 텔레비전 쇼를 해 봤습니다만 이건 한국 분들만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프로그램 내용을 세계인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진행하는 쇼를 하게 됐습니다. 모든 세계인들이 시청자인 것이죠. 북한 문제는 북한과 미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 세계가 알고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파드캐스트 프로그램 첫번 것과 두번째 것을 봤습니다. 저희 청취자들을 위해서 두 프로그램의 내용을 소개해 주시죠.
박: 처음 프로그램의 주제는 ‘주체사상은 죽고 시장이 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것은 북한의 세뇌 교육에 대한 것이고요. 국제사회에서 매일 뉴스를 보면 북한의 정치, 핵 문제, 김정은의 동향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김정은과 북핵과 정치만 가지고는 북한을 이해하기 힘듭니다. 북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북한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의 방향을 북한 사람들에 맞췄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 가는 게 남북통일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사람을 우선으로 해야지요. 일반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또 주민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고 주민들이 활동하는 상황을 알리고 또 북한에 태어난 인민들이 어떻게 당국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는지 등을 세계인들이 알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전: 그 파드캐스트 프로그램 아래에는 박연미 씨가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데 대해 한국인들의 댓글이 많이 올라와 있던데요. 영어는 언제부터 어떻게 배웠습니까?
박: 저는 영어를 속되고 우직하게 배웠습니다. 북한에서는 영어를 배우지 못 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영어를 가르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또 좋은 학교에서만 영어를 가르칩니다. 그래서 저는 러시아어만 배웠습니다. 제가 한국에 2009년 말에 들어 왔습니다. 18살 거의 다 되어서요. 그랬는데 에이비씨부터 배워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저는 한 동안 배우지 못했습니다.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손을 놓고 있다가 2003년, 작년에야 영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주로 미국어 텔레비전 드라마와 뉴스를 듣고 봤습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보고 자면서도 봤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할 때에도 영어로 해보고 영어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랬더니 빨리 늘더라구요. 학원에 가 보질 못해서 문법이나 쓰기는 잘 못합니다. 체계적으로 영어를 배운 게 아니라서요.
전: 한국에 들어가서 학교에 다니며 영어 배울 기회가 있지 않았습니까?
박: 한국에 오니 18 살이 다 되었는데 공부과목 수준은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하더군요. 제 나이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요. 하지만 실력이 못 미치니까 일단 중학교 1학년부터 다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규 학교를 못 갔습니다. 혼자서 1년 안에 검정고시 준비해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졸업증을 딴 후에 대학 입학시험을 쳐서 입학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정규 교육을 못 받고 혼자 독학했습니다.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에도 잠시 다녔습니다. 검정고시 때문에 그동안 너무 학과 공부가 많아서 영어에 신경 쓸 틈이 없었습니다. 검정고시 끝난 뒤에 영어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전: 그렇다면 영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건 작년 초라고 할 수 있는데, 정말 대단하네요? 그런데 한국에 들어 간 뒤에 미국에 어학연수인지로 잠시 방문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박: 네. 에프원 비자를 받아 미국의 한 작은 시골 대학에 가서 한 학기를 다녔습니다. 그러니까 작년 1월에 영어를 공부해 6월에 유학 갔습니다. 미국에 4개월 있었고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코스타리카에 2개월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아메리카 나라에는 처음 갔다온 것이죠.
전: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때 알아 듣기 힘들거나 여러가지로 어렵지 않았습니까?
박: 언어연수가 아니었습니다. 일단 언어는 돼있으니까 미국 친구와 어울리고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서 한 것인데요, 힘들지만 버텨냈습니다.
전: 특정 과목을 듣지는 않았습니까?
박: 거의 봉사활동만 했습니다.
전: 어떤 봉사활동을 하셨고 또 어떤 보람을 느꼈는지요?
박: 미국 가서 놀란 것이 너무 잘 사는 나라인데도 홈레스센트에서 노숙자 분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 식사 돕고 청소해 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잘 사는 나라에서 희망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내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잘 했을까?'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가족도 잃고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렀어야 했는데. 이분들은 태어나서부터 자유가 주어진 것 아닌가?' 그런 자유에 대해 그분들은 감사하는 걸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소중히 여겨야 할 자유인데요. 그래서 이분들에게 내가 북한에서 오게된 얘기를 해 줬습니다. 내가 자유 얻기 위해서, 그리고 입고 싶은 것 입고 말하고 싶은 것 말하기 위해서 몽골 사막을 건너 온 것이라고요. '여러분들의 자유는 거저 얻은 게 아니다, 값 싸게 얻은 게 아니다. 누군가 목숨을 바쳐 얻은 것이다.'
저의 그런 말에 그분들이 희망을 얻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이야기는 북한인과 남한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북한의 인권 침해 문제도 남북한만의 문제가 아니고 전 세계가 모두 안고 가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요즘 하는 일에 많은 보람을 느낍니다. 이런 말을 자유롭게 하고 있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전: 현재 동국대학교 경찰행정학과에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박: 네. 3학년입니다.
전: 한국에서 경찰은 북한의 인민보안성 보안원 같은 것 아닙니까?
박: 그렇죠.
전: 왜 경찰행정학을 전공하게 됐나요?
박: 지금은 다른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경찰학과를 전공한 배경이 부끄럽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제가 중국에서 살 때에는 경찰복, 그러니까 공안 옷을 입은 사람들만 보아도 너무 무서웠습니다. 마치 호랑이 보듯 무서웠습니다. 잡혀 갈까봐 너무 떨렸습니다. 중국에서는 저와 어머니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와서 가족을 지키겠다는 생각에 경찰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경찰이 되면 제 가족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한 해 한 해 지나다 보니 한국의 경찰이 너무 든든한 겁니다. 치안도 잘 돼 있고, 한국 경찰이 어머니도 잘 지켜줘서 걱정할 일도 없고. 그래서 지금은 제가 좀 더 잘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전: 탈북해서 어머니와 같이 한국에 들어가셨는데, 언니가 먼저 탈북했다지요?
박: 네. 언니가 탈북하기 나흘 전에 집을 나갔습니다. 그래서 저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셋만 중국으로 갔지요. 아버지는 중국에서 장암으로 돌아갔습니다. 엄마와 나는 7년간 언니를 못 찾았습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죽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작년 12월에 한국에 왔습니다. 기적적으로 살아 와서 만났습니다. 언니는 올해 하나원 교육을 받고 이제 나온지가 두달도 안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인터넷도 배우고 문자하는 것도 배우는 중입니다.
전: 하지만 연미씨가 있으니까 언니가 배우는데 많은 도움이 되겠네요.
박: 네. 열심히 옆에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한국에 입국한지 4년여만에 영어로 미국인과 인터넷 텔레비전 방송을 공동 진행하면서 한국 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21살의 탈북 여대생 박연미 씨와 함께 북한문제에 관한 그의 종횡무진한 생각과 활동에 대한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