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아홉살 때 엄마를 따라 처음 탈북했던 소녀가 북송 세 번, 탈북 네 번을 거듭해 한국땅을 밟은지 6년만에 미국에 유학을 왔습니다. 지난해 5월 탈북자 지원단체 물망초가 시작한
해외언어연수사업의 첫 장학생으로 뽑힌 탈북대학생 박혜진씨. 그가 뉴욕(New York)의 바뤀 (Baruch College)대학에서 9개월 간의 영어 공부를 마치고 6월 말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어린 나이에 6년여 중국에서 모진 삶을 살며 터득한 지혜는 돈 없고 힘 없는 탈북난민에게는 공부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입국한 뒤 그는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명문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갔고 여러 탈북대학생 경쟁자 중에서도 언어연수 장학생으로 선발될 수 있었습니다. 뉴욕을 떠나기 전 박혜진씨를 전화로 연결해 그의 유학생활에 대한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전수일: 외국에 나가 영어를 배우면 좀 더 빨리 배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9개월 영어연수 결과가 어떤가요?
박혜진: 기대한 것만큼은 못한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는 했는데 오기 전에 예상한 것만큼은 못한 것 같아요.
전: 주로 어떤 교과 내용으로 배웠는지 영어 배우기 일상을 소개해 주시죠.
박: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에 나가 아침 9시에서 오후 1시반까지 수업을 했습니다. 두 달 학기에 한 번씩 3주 정도 방학합니다. 주말엔 친구들과 만나 박물관을 견학하고 얘기 나누고요. 수업이 끝나도 공부를 했습니다.
전: 수업진행은 어떤 식으로 됐나요?
박: ESL프로그램인데 영어가 외국어인 각 나라 학생들을 레벨 수준에 따라 반에 배정했습니다. 1급부터 10급까지 레벨이 정해져 있는데 한 레벨을 통과할 때마다 그 다음 단계로 진급합니다. 교재가 많아서 선생마다 다른 교재를 사용했습니다.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등 4가지로 수업이 진행됐습니다.
전: 어느 나라에서 학생들이 많이 왔습니까?
박: 아시아권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중국, 대만이 가장 많았고, 한국인도 많았습니다. 중동인들도 꽤 있었고 남미인들도 있었습니다.
전: 전 세계에서 다 온 거네요?
박: 네.
전: 듣기 쓰기 말하기 읽기 중에서 어떤 부분이 제일 어려웠나요?
박: 저 개인적으로는 말하기 입니다. 여기에서 쓰기는 굉장히 많이 늘었습니다. 하지만 말하기는 수업시간에 말할 수 있는 친구들의 수준이 비슷해서 별 도움이 안 됐습니다. 또 수업 후 생활 자체가 한국사람들이 많은 환경이라서 영어 대화의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영어로 말하기를 향상시키는 기회가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쓰기보다는 말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전: 학생 중에는 중국과 대만에서 온 사람도 많다고 했는데, 박혜진 씨는 중국말도 잘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 네, 잘해요.
전: 중국인들과는 중국말로 대화를 잘 했겠네요.
박: 가급적이면 안 하려 했습니다. 영어로만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깊은 대화를 하다가 막히게 되면 중국어 단어를 말했습니다. 어차피 영어 배우러 왔으니까 가능한 영어로만 하려고 했죠.
전: 미국 원어민과 접촉할 기회는 많았습니까?
박: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여기 와서 여러 명 만나고 같이 밥을 먹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기적이 아니라 가끔씩 있는 것이었어요. 뉴욕 도시 자체가 미국인들보다는 세계 각지역에서 이민 오거나 혹은 잠간 다니러 온 사람, 혹은 공부하러 온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각자 쓰는 단어와 억양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리 외국인들끼리 대화하다보니 회화 향상에는 뉴욕시가 어려운 환경인 것 같습니다.
전: 뉴욕 한인사회에 대한 언급을 하셨는데 살고 있는 곳은 한인사회 내 아파트입니까?
박: 그건 아닙니다. 주변 아파트에 세계 각국 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방을 나눠 쓴 룸메이트들이 한국인이고 그들 친구들도 한국인이라서 한국인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았습니다.
전: 영어 배우기가 유학의 주요 목적이겠지만 미국 문화도 이것 저것 보고 배운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박: 한국에선 미국사람들이 총을 소지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했는데 뉴욕은 큰 도시이고 특히 맨해튼 도심이라서 안전했습니다. 밤 늦게까지 다닐 수 있었고 지하철도 24시간 운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안전한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하지만 지하철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힘든 것은 팁(Tip)을 주는 문화입니다. 식당 같은 곳을 가면 원래 가격에 20퍼센트나 15퍼센트 정도의 돈을 추가로 서비스 대가로 줍니다. 수고했다는 뜻으로 봉사원들에게 추가로 주는 것인데요, 그것 계산 하기도 어렵습니다. 미국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문화이겠지만 한국에는 없는 것이라서 아직도 그게 어렵습니다.
전: 학교에서 공부하는 시간 외에 뉴욕사회에서 이런 저런 생활하며 사람 사는 모습에서 느낀 인상적인 것,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박: 한국에선 복장이나 행동 등에 예의범절이 딱 정해진 규범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서로 동의하는 그런 규범 말입니다. 그런데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서인지 복장, 행동도 정해진 게 없고 각자 편한대로 입고 다니고. 물론 장소에 따라서는 정장이나 비정장이 확실히 구별될 수 있지만 대체로 모두가 자기 취향에 맞게 사는 것 같습니다. 미국이 자유의 상징인데 특히 뉴욕은 다양성과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는 게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전: 한국처럼 사회적인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얘기네요.
박: 네. 뚜렷하게 정해진 게 없는 것 같아요.
전: 연세대 정치외교학 전공자인데 미국의 정치나 외교에 관한 문제도 눈여겨 볼 기회가 있었나요?
박: 네, 작년 11월 대통령 선거 때 기회가 있었습니다.
전: 대통령 선거가 미국에서도 가장 큰 행사이지요.
박: 그렇죠.
전: 정외과 학생으로서 미국 대선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했나요?
박: 제 전공 때문에 나름 눈여겨 봤는데요, 일단 투표하는 체제가 한국과 다른 것 같아 신기했습니다. 대중으로부터 다수의 투표를 받아도 대통령이 못 될 수도 있는 그런 투표 체제가 그렇습니다. 특히 롬니와 오바마 후보가 토론하는 게 멋이 있었습니다. 각자 상대방의 정책 전략에 대해 굉장히 잘 알고 있는 것 같았고 자기의 전략을 뚜렷하게 대중에게 소통하면서 무대에서 멋잇게 토론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비판할 건 비판하는 게 좋았습니다. 특히 뉴욕은 진보적인 도시 아닙니까? 투표 당일 선생님들이 아침에 투표하고 왔다고 자랑하고 자기가 지지하는 후보가 당선되자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는 게 너무 멋있었습니다. 자기 개인의 정치적 성향을 표현하는 것은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미국 뉴욕에 사는 사람들이 더 진한 것 같았습니다. 저로서는 굉장히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전수일: 북한에서 마지막으로 탈출했을 때 나이는 몇이셨나요?
박: 15살이었습니다.
전: 그렇다면 북한의 정치체제에 대해서는 북한에 살지 않았던 분들보다 잘 알텐데요, 여기서는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지지하고 찍고 해서 한 후보가 나라의 지도가가 되는데 북한 체제는 안 그렇죠?
박: 네. 아니죠. 북한에도 물론 선거라는 게 있긴 합니다만 누구를 찍어야 된다는 건 이미 정해진 것이죠. 딱 한 사람만 후보로 나오고요. 99퍼센트 이상 그 사람을 찍게 되고. 그리고 결과는 100퍼센트의 사람들이 그 후보를 모두 지지했다고 발표하지요.
전: 미국에서는 자유 투표, 그러니까 각 개인이 원하는 대로 지도자를 뽑는데 자기의 귀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않습니까. 북에서는 정해진 집권자가 한 사람 후보로 나서니 사실상 투표가 없는 셈이네요.
박: 네. 하라고 하니까 하는 것이죠.
전: 인민이 자기들을 이끌 지도라를 뽑지 못한다는 게 큰 차이네요?
박: 네. 큰 차이죠.
전: 세 번 북송에 네 번 탈북, 죽을 고비를 넘기고 2004년에 마지막으로 탈북해 2년 뒤인 2006년 한국에 들어가 명문대학에 입학해 공부하셨습니다. 그리고 2012년 한국에 입국한 지 6년만인 작년에 미국에 장학생으로 오신 것인데요, 불과 10년 안에 북한 중국 한국 미국 사회를 고루 경험한 셈이네요.
박: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요.
전: 미국에서 공부하고 미국 사회를 직접 보면서 자신의 파란만장했던 지난 삶을 되돌아 볼 시간이 있었습니까?
박: 네.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보다 더 많았습니다. 여기서는 여행도 많이 하고 영어 공부만 하니까
생각할 시간이 더 많았습니다.
전: 한 생각 좀 들려 주시죠.
박: 너무 많은 생각들이 있었습니다. 일단 제가 10대에 겪은 나라는 사회주의 공산주의인 북한과 중국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북한만큼 자유가 없진 않지만 정치적 면에서는 일당독재이니까 정치적 자유가 많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살 때에 저는 '내가 사회를 이끄는 그룹으로 들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성분이 있어 이미 태어날 때 정해져 있기 때문에 아무리 똑똑하고 돈이 많아도 성분이 안 좋으면 지도층 계급에 들어 갈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든, 가난한 시골 출신이든 아니면 아버지가 회장인 집에서 태어났든 불문하고 대학교 다니며 기회가 주어질 수 있는 게 좋습니다. 저처럼 북에서 왔고 사회적 약자인데도 그런 약자에게 도와주고 기회를 주려는 한국 문화가 좋았습니다.
미국에서는 지난 8개여월 동안 감사하다는 생각 많이 했습니다. 미국처럼 넓은 세상에 와서 경험하면서 더 큰 것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단지 북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로 제게 주어진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전: 물망초 첫 장학생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박혜진 씨의 뒤를 이어 미국에 올 후배 장학생에게 권고나 충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박: 사람을 만날 기회를 놓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밥먹으로 나가든, 공원으로 산책 가든, 그런 기회에 미국인들과 사귀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미국인들은 친구 사귀기를 스스럼 없이 잘 합니다. 우리 문화는 남을 경계하는 문화인데 여기서는 사람과 사람 간의 경계의 벽이 높지 않습니다.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여기 오면 그런 기회를 놓지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 만나는 게 미국을 배우는 것이죠. 저도 얼마 전에야 이걸 깨달았습니다.
그게 아쉽습니다.
전: 미국에 오면 부끄럼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럼 없이 주위 미국 분들과 과감하게 얘기를 트고
사귀라는 말이군요.
박: 미국인이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아프리카나 중동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출신 지역에 대한 선입견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미국에 오기 전에 흑인이라고 하면 저는 많이 무서웠습니다. 아프리카 출신의 친구도 사귀면서 그들의 성격이 활발하고 친절하고 멋있다는 것을 느끼게 됐습니다. 또 중동이라고 하면 테러 생각이 제일 먼저 나지만 중동 친구들도 사귀어 보니 멋있고 신앙심 깊고- 자기 종교에 대한 열정이 깊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런 선입견을 없앨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전: 정치외교학과 4학년 졸업반이죠?
박: 네. 졸업 준비해야죠.
전: 학업 마치는 게 우선적인 일일텐데요, 이번 미국 유학경험이 원래 자신이 지녔던 삶의 방향이나 진로에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까?
박: 네. 많이 영향을 미쳤어요. 일단은 세상을 크게 볼 수 있게 됐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대학원을 미국에 와서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 방향에 따라 한국에서 공부를 더 할 것이고요. 또 영어를 좀 더 잘 해야겠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영어로 세계에 북한을 알리고 북한 주민의 생활을 더 잘 알릴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전수일: 정치외교학과인데 미국에 오면 전공과목도 같은 걸로 할 생각인지요?
박혜진: 사회과학으로 할 것 같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북한과 중국관계를 연구하고 싶고요. 하지만 여기에는 북중관계만 전공하는 것이 없어서 동아시아지역을 다루는 전공으로 공부하고 싶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한국 땅을 밟은 지 6년만에 해외 언어연수 장학생으로 뽑혀 미국 뉴욕의 바뤀 대학교 (Baruch College)에서 유학생활을 마치고 최근 귀국길에 오른 탈북대학생 박혜진씨의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