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국군포로 아버지의 유언을 지킨 탈북여성 손명화씨.
손씨의 선친 손동식씨는 1984년 숨지기 전 딸 명화씨에게 자신이 죽거든 남한 고향땅에 묻어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습니다. 아들 한 명과 함께 탈북해 2006년 한국에 들어간 손 씨는 아버지의 유언 29년만인 지난 10월 5일, 함경도에 묻혀있던 부친의 유골을 한국 땅으로 모셔왔습니다. 한국에 입국 후 국군포로 가족 모임의 일을 보면서 지난 7년 동안 선친의 유골을 한국에 송환하기 위해 백방으로 힘을 써 온 것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현재 한국 내 탈북자들의 정착을 돕는 단체 탈북민복지연합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손명화씨를 오늘 초대석에 모셨습니다.
전수일: 아버님이 자신의 고향이 김해라고 알려주셨다는데 언제였습니까?
손명화: 제가 어릴 때는 아버지의 고향이 남조선이라는 건 알았습니다. 지난 물망초 행사에서 바이얼린 독주를 했듯이 학교 때 바이얼린을 좀 켰습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예술 전문쪽으로 사회진출을 하려는데 아버지가 국군포로라서 제한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네가 아무리 사회진출을 하려 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데 왜 하려 하냐'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내 고향은 경상남도 김해인데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휴전 3개월을 남기고 북에 포로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버지 고향이 남조선일 뿐만 아니라 국군포로라는 것을 알게됐죠.
아버지는 사망하기 전에 지하 광산에서 일을 했는데 폐가 나빠져 일을 못하게 되자 심심산골로 보내졌습니다. 광산 갱목을 생산하는 산 골짜기였는데 무산군에서 60리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다른 국군포로 한 분과 5년 세월을 살았습니다. 돌아가시기 10일 전에 집에 내려왔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6남매였는데 아버지는 나만 남겨두고는 모두 밖에 나가라고 하더니 남쪽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 이름, 그리고 고향을 알려줬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특히 아껴줬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자기가 앞으로 죽을 게 분명하다면서 통일이 되든 안 되든 죽으면 자신의 고향에 가서 묻히고 싶다고 말하고 열흘 뒤 아침에 눈을 감았습니다. 그 말을 여지껏 가슴에 묻어뒀습니다.
자랄 때는 아버지를 구박 천대 많이했습니다. 아버지를 잘못 만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헌데 여기에 와서는 우리 아버지를 버린 대한민국을 원망했습니다. 아버지가 받은 설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올3월부터 제가 관계가 많은 단체 물망초의 박선영 이사장님께 상의 드렸습니다. 아버지 유해를 꼭 모셔와야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몇 차례 시도했지만 안 되다가 7월 3일 북한에 있는 동생에게 100만원을 보냈습니다. 아버지 유해를 파헤치라고 했습니다. 14일 동생에게 유해를 다 파헤쳤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북한 국경경비대가 국가보위부로 이전됐기 때문에 유해를 국경 밖으로 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거기다 두만강 물도 불어났습니다. 그래서 9월 10일이 되어서야 아버지 유해를 중국으로 전달받았습니다.
전: 동생을 시켜 아버지 유해를 발굴하라 하셨다고 하셨는데 친 동생이 아직 북한에 있습니까?
손: 네. 우리가 6남매인데 남쪽에는 여동생 둘만 나오고 북한에 아직 오빠 둘과 막내 여동생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동생은 아버지 유해를 파고 나서는 현재 자리에 누어있다고 합니다. 지난 8월 동생이 아버지 유해를 파서 보관하고 있을 때 꿈에 아버지가 나타나 자신의 집이 없다며 계속 갈근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동생은 지금껏 하혈하고 누워있다고 합니다. 아버지 유해를 파헤쳐 해를 받은 것 같습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겠더라구요. 아버지 유해를 모셔온 뒤 오빠와 통화 두 번했습니다. 유해는 오빠와 동생이 합의해 무덤에서 거두기로 한 것입니다. 오빠가 유해를 보낼 때 유해 속에 편지를 넣었습니다. 그 편지를 보니까 오빠의 필체가 분명했습니다. 또 오빠는 나를 지칭할 때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내 큰 아들 이름을 부르곤 했는데, 그 편지에 아들 이름 ‘광희야’ 라고 썼더군요. 또 유해 받았을 때 그 유해의 틀니에 줄칼로 갈았던 자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틀니를 줄칼로 갈았었습니다. 내 아버지 유해가 분명한 것이죠. 그리고 아버지의 발가락 뼈와 손가락 뼈를 주머니에 넣었는데 쪽지에 쓰인 발과 손이라는 필체는 동생의 필체였습니다. 이를 보고 나는 정부에 내 아버지가 틀림없다고 주장하고 대한민국에서 전사자들에게 하듯이 아버지 유해에 태극기를 씌워 유해 인수 행사를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살아온 국군포로와 같이 대접해 달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국군포로 송환법은 있어도 유해 송환법이 없어 나한테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1월 초에 유해 신원확인 검사결과가 나오면 아버지 보상금 등과 관련해 내가 또 투쟁을 해야 할 듯합니다.
전: 그럼 아버지 유골이 이런 저런 상황으로 확실하기 때문에 유전자 검사를 해도 아버지임이 판명되겠네요.
손: 네. 내가 만일 남에게 돈을 주고 심부름을 보냈다면 그런 확신이 안 서겠지만 친오빠와 동생을 시켜 유해 발굴하게 했고 오빠는 내게 전화해 몇 날 몇 시에 보낸다는 연락을 취해 그 유해를 넘겨받았습니다. 내 형제가 아버지 유해가 아닌 걸 그렇다고 하겠습니까?
전: 근데 탈북은 아들과 함께 했다고 들었습니다. 오빠들과 왜 함께 탈북하지 않았습니까?
손: 제가 탈북 2년 전에 국가보위부 구치소에 구속됐다가 10달만에 출소했습니다. 당시 보위사령부에 '518소'라는 곳이 있습니다. 전국에 2개 있는 양귀비 채취 조직이 하나인데, 거기에서 심부름을 했습니다. 북한은 국군포로 자식이더라도 개 중에 똑똑한 사람은 대패밥처럼 쓰다가 죽이는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6남매 중에 나를 똑똑하게 만들어 낳은 덕분에 제가 드런 일을 하게 됐습니다. 북한 당국의 불법 무역단 조직인데 거기서 4년 근무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일하던 사람이 개인적으로 중국에 양귀비를 조금 팔았던 게 발각돼 우리 518소 요원이 몽땅 하루밤에 수갑 채워져 국가보위부에 넘겨졌습니다.
평양 구치소에 들어가 3개월 동안 죽을 때까지 맞을 매를 다 맞고 고문을 당했습니다. 직위 높은 자들의 자식들은 모두 풀려났지만 43호는 다른 데로 보내라고 했습니다. '43호 저 간나' 라고 해서 그게 나를 지칭하는 말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때 여자는 나 뿐이었거든요. 국군포로에도 43호 라는 게 있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43호는 국군포로 중에서도 전향하지 않은 사람을 일컫는 번호였습니다. 내가 43호라는 걸 알고는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죽으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둘이나 있어서 그러질 못했습니다. 일곱 달 동안 강제 노역장에 끌려가 노역했습니다. 그러니까 2002년 5월 26일 체포돼 2003년 3월 10일에야 풀려났습니다. 반 죽은 채로 물건짝처럼 들려서 평양역에 옮겨졌습니다. 거기서 열차에 실려 고향에 갔습니다. 집에 오니까 신랑은 약을 먹고 이미 자살했고 17살 난 큰아들과 15살 난 작은아들이 아버지 장례를 치렀더군요. 그래서 이세상은 살 곳이 못된다고 생각해 탈북할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하지만 당시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는 탈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년 간 몸과 건강을 추스렸습니다. 큰 아들은 내가 귀가한 직후에 입하나 덜어서 어머니 살림을 돕겠다고 군에 갔고 작은 아들은 2년 뒤 18살이 되어 입대했습니다.
근데 작은 아들이 군대에 간 지 6개월 만에 물자구입차 집에 왔습니다. 나는 아들을 설득해 부대로 보내지 않고 군복 입힌채로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작은 아들은 형을 두고 갈 수 없다고 했지만 나는 남편도 죽고 아들 둘을 모두 남기고 나 혼자 떠날 수는 없어서 아들에게 엄마가 새끼 하나만이라도 데리고 가야하지 않겠냐고 설들했습니다. 아들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해서 3일 시간을 줬습니다. 결국 2005년 10월 30일에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울며 건넜습니다. 그날은 보름달이 뜬 날이었는데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엄마의 얼굴을 보고싶어 찾아갔습니다. 엄마는 자기가 죽지 않고는 갈 수 없다면서 집 앞의 철길에 누웠습니다.
억지로 엄마를 아들 집에 보내고 작은 아들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두만강 건너 중국집에서 하룻밤을 잤는데 동생이 전화해 '어제 저녁 보위부원들이 언니와 아들을 잡겠다고 형제들 집을 몽땅 숙박검열했다'고 알리면서 '국경연선에 있지 말고 멀리 어디로 떠나라고'했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데리고 버스 타고 베이징으로 직행했습니다. 중국과 북한 당국은 나를 잡겠다고 국경연선을 봉쇄했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중국집에 들러 쥐약을 얻었습니다. 만일 붙잡히면 나는 쥐약을 먹고 자살할 작정이었습니다. 쥐약 두 봉투와 물을 베낭에 넣고 떠났는데 어떻게 그 도피가 성공을 해서 한국까지 오게 됐습니다.
전: 그렇군요. 정말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 한국에 가셨는데 탈북 하실 때 오빠들과는 상의 하셨나요?
손: 당시 국가보위부 체포령이 내린 상태에서는 형제들도 몰라야 했습니다. 그때 나는 내 집에 있을 수가 없어서 단련대장의 집에 숨어있으면서 밤에만 활동하고 낮에는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쪽지로 심부름 시켜 일을 봤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떠나 올 때 오빠를 못 만났고 우리가 가는 것 조아 오빠는 몰랐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찾아 간 것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전: 한국 군당국은 화장한 상태나 유골 상태로 한국에 송환된 국군포로는 손동식씨 것을 포함해서 6차례라고 합니다. 또 한국정부는 북에 500여명 이상, 560명 정도의 국군포로가 생존한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손명화 회장님은 생존 포로가 아마 100명도 안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던데요, 그건 국군포로가 병들고 숨졌기 때문인가요?
손: 아닙니다. 아버지 주위에 있던 친구들이 명절 때이면 모이고 했는데 그 친구들이 모두 돌아갔습니다. 한 명도 없습니다.
3년 전에 국군포로 한 분이 탈북 후 북송됐습니다. 정상운씨인데요, 한국행을 기도했기 때문에 북한에 송환돼서는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습니다. 근데 그 어르신 딸이 저와는 학교 동창입니다. 그 딸은 3년 징역형을 받았고 국군포로 어르신은 5년 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 딸이 지난주 저와 통화했습니다.
저는 '네가 3년 전에 붙잡혀 갔는데 살았구나' 했더니 그 친구는 3년 교도소 생활을 모두 끝내고 8월에 나왔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살아 계시냐고 물었더니 아버지 나이가 84세인데 현재 전거리교화소에 영양실조로 누워있다고 하더군요. 그 얘기 하면서 우리 둘 모두 울었습니다. 그 친구는 엄마도 사망했고 산에서 남의 농사일 해주며 살고 있는데 아버지를 면회할 돈이 없어서 못 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아버지 가서 보라며 50만원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내가 정부와 협조해 도울 길을 모색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 친구에게도 물어 봤고 우리 오빠에게도 물어 봤습니다. 우리 국군포로가 얼마나 있냐고?
무산군 광산에 국군포로들이 있었으니 아직도 생존자가 있을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무산군에 살아있는 포로는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젊은이도 먹고 살기 힘든데 누가 80을 넘어 살 수 있겠냐’는 것이었습니다. 3명에게 물어 봤는데 똑같은 대답이었습니다. 한국정부는 2003년부터 2006년 사이에 많이 귀환한 국군포로들의 말을 통해 각자 고향에 있는 국군포로 생존자 수의 증언을 취합해 560명으로 추정했는데 그것도 10년이 지났습니다. 제 생각에는 현재 생존자가100명도 안 될 것 같습니다. 명이 긴 사람은 아직 살아있겠지만 북한은 한국처럼 행복하게 살 수 없어서 그렇게도 안 될 것입니다. 자식들이 괄시해 자살한 사람도 많고 자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한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처녀 때 북한에서 사로총 사업을 했었지만 당시 목을 매어 죽은 포로도 많았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29년 간 북한에 묻혀있던 국군포로 선친의 유골을 최근 한국에 송환하는 데 성공한 탈북여성 손명화씨를 모시고 얘기를 나눠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