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살의 유서’ 회고록 저자 김은주

0:00 / 0:00
회고록 '열한 살의 유서' 표지. 사진-씨앤아이북스 제공
회고록 '열한 살의 유서' 표지. 사진-씨앤아이북스 제공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초대석,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지난 10월 서울에서 출간된 '열한 살의 유서'란 탈북자 회고록은 저자 김은주씨의 말대로 평범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탈북자 대부분이 겪는 북한사회의 굶주림과 탈북, 강제북송과 재탈북, 그리고 한국행 과정에서 겪는 역경 등 전형적인 탈북자의 여정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정작 자유의 땅 한국에 들어가서는 실의에 빠지기 쉬운 여느 탈북자와는 달리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명문 대학에 들어가 미국 유학도 하고
다른 탈북청소년을 돕는 일도 활발하게 펼친 그의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북한에서는 죽음까지 생각했던 열 살 남짓의 소녀가 지금은 3개국에서 펴낸 책의 저자로 화제가 된 김은주씨의 이야기를 오늘 초대석에서 들어봅니다.

전수일: ‘11살의 유서’라는 제목에 청취자들이 굉장히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그 유서 내용을 간략히 설명해 주시죠.

김은주: 지금 생각해 봐도 당시에 쓸 때는 유서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굶고 엄마와 언니를 기다리면서 엿새가 지났는데도 돌아오지를 않아 이러다가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했습니다. 또 엄마에게 버려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혹시 내가 죽게 되더라도 엄마가 돌아와 내가 엄마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지, 엿새 동안 어떻게 기다렸는지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 글을 썼습니다. 내용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며칠동안 굶은 얘기와 엄마를 여러 번 마중 나갔었다는 얘기를 담았습니다.

전: 책을 못 읽은 청취자를 위해 잠시 부연하면 당시 은주씨가 혼자 집에 남고 엄마와 언니는 먹을 것을 구하러 출타하셨었다죠?

김: 네.

전: 당시는 고난의 행군시절이었으니 굶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흔했을 것 같습니다. 당시 11살이었다는데 1997년이었던가요?

김: 그렇습니다.

전: 그 뒤에 결국 어머니와 언니와 함께 탈북해 중국에 가서 2년 살았나요?

김: 3년 간입니다. 99년도에 탈북해 중국에서 3년 살다가 2002년에 북송됐습니다.

전: 이웃의 신고로 체포돼 북송됐고 북에 보내져서는 노동단련대에서 큰 고생을 한 뒤에 다시 탈북했다죠?

김: 그렇습니다.

전: 재탈북 후 중국의 상하이에 가서 한국회사에 취직해 일을 하다 한국이 중국보다 더 잘 산다는 사정을 알고 결국 엄마와 함께 몽골을 거쳐 한국행에 성공했죠. 2006년에 서울에 도착했고. 언니는 상하이에서 중국 남성과 사랑해 결혼을 하셨다죠?

김: 네.

전: 언니는 한국에 있습니까?

김: 네. 책에 쓴 대로 언니는 지금 한국에 있습니다. 저희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언니가 저희보다 나중에야 한국에 온 이유는 몇가지 됩니다. 물론 좋아하는 남성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셋이 모두 가다 잡히면 누군가 도와줄 방도가 없을 것 같아 한 명은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니가 겁이 많았던 면도 있고요. 하지만 언니는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아빠 묘소를 찾아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여러 이유로 나중에 한국에 오게 된 것이죠.

전: 중국인 형부나 시집 부모님들 모두 사람이 좋다고 하셨는데.

김: 네.

전: 조카는 보셨나요?

김: 네. 올해 7월에도 중국에 가서 동생과 조카와 함께 공원에 놀러가기도 하고 좋은 식당에서 밥도 먹고 했습니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1주일 정도 같이 지내다 왔습니다.

전: 이 책은 작년 프랑스에서 출판됐습니다. 이어서 노르웨이에서도 출판됐고요. 근데 금년 10월에야 한국에서 출간이 됐습니다. 프랑스에서 먼저 책이 나온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 사실 제가 책을 쓰려고 계획한 것이 아니라 책을 쓰도록 선택을 받은 셈입니다. 프랑스의 한 출판사에서 공동저자 세바스티앙씨에게 젊은 탈북자의 성공적인 사례를 책으로 내고 싶다고 하면서 극단적인 이야기 보다는 일반적인 탈북자의 삶을 보여줄 인물을 찾아서 써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바스티앙씨는 한국에서 여러 탈북자들을 만나 면담을 했고 저를 선택한 것이죠. 저로서는 처음에 책의 저자가 될 것이는 생각은 못 했습니다. 그건 저보다 훨씬 더 어려웠던 탈북자가 많았기 때문이죠. 제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프랑스 출판사가 원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어서 제가 선택된 것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현지에서 출판이 된 것이고요. 그뒤에 한국의 출판계에 한국어판 출간을 알아 봤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선 탈북자 문제가 아직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다뤄지는 관계로 계속 미뤄 오다가 1년 반이 지난 올 10월에 한국에서도 출간하게 된 겁니다.

전: 한국 서강대에 재학중이시고 중어중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계시다죠?

김: 네. 복수전공을 하고 있습니다.

전: 중어중문학은 중국에서 8,9 년 지내며 중국어를 배워 할 줄 알아서 선택했다 해도 심리학은 왜 전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김: 개인적인 이유인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들을 무척 좋아합니다. 한국에 와서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해 학벌도 없지만 제 친구들은 언제나 나를 ‘근자감’이라고 불렀습니다. ‘근거없는 자신감’이라는 말이죠. 사실 저는 ‘항상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가지면 실제 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친구들이 어려운 과정 겪으면서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심리학 중에서도 아동심리학에 관심이 있습니다. 심리적 육체적으로 어려운 친구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서 아동심리 전공을 생각한 겁니다.

전: 그런 말을 들으니 생각나는 것이, 제3국, 특히 중국에서 언어장벽 문화장벽 그리고 쫓기는 생활에 심적 충격도 크고 마음의 상처도 클 텐데 그런 상처와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김: 저는 과거를 잊지는 말되 묻혀 살아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정착하기 어려워하는 분들을 보면 과거에 묻혀 사는 분이 많더군요. 저는 한국에 와서 그렇게 묻혀 살기에는 너무 바쁘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여기 오자마자 한겨레계절학교에 들어 갔고 졸업후에는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저 한국사회 정착에 바빴습니다. 그런 어려움에 묻혀 살 여유가 없었습니다. 초기에는 외로움과 우울감이 있었지만 많은 사람 만나면서 바쁘게 살다보니 거기에 빠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상처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전: 서강대학교 40년 이상의 선배가 한국 대통령 아닙니까? 한국 대통령의 후배로서 현재 다니는 학교에 대한 감정도 남다르겠습니다.

김: 네. 저희 학교에 이런 로고가 있습니다. ‘서강 그대 자랑이듯 그대 서강의 자랑이어라.’ 저는 이 문구를 너무 좋아합니다. 서강은 나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모교에 대한 느낌이 남다릅니다. 제가 한국사회에 정착하고 자신을 발전시키고 좀 더 깊은 생각을 하면서 정체성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대학 생활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저는 저의 학교를 무척 사랑합니다.

전: 작년엔 미국에 와서 공부를 하셨다던데, 어떤 일로 오셨나요?

김: 학교 교환프로그램이 아니라 미국 대사관에서 하는 ‘뉴 그래드’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2학기 동안 미국 중부에 있는 미조리 대학교에서 영어도 공부하고 심리학 전공 관련 과목도 들었습니다.

전: 근데 한국에 돌아간 뒤 그 다음해 2007년에는 또 미국과 멕시코에 역사탐험을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김: 네. 110년 전 남미 쪽으로 한국인들이 농사일로 돈벌이하러 이민 갔다고 합니다. 근데 실제 그들이 거기에 도착해 보니 팔려간 것이었다고 합니다. 남북 청소년들이 통일이란 염원을 갖고 우리의 이민인 ‘애니깽’들의 역사를 찾아 탐방 여행을 한 것이었습니다.

전: 그러니까 한국 이민의 발자취를 찾아 간 것이군요?

김: 그렇습니다. 한국 대학생들과 탈북 청년들이 함께 갔습니다.

전: 남한 땅에 와서 정착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탈북민들에게는 한국의 이민들이 생면부지의 땅에 정착하는 것과 비견할만하겠네요?

김: 네. 가서 체험하면서 감동한 것은 그분들이 우리 못지않게 한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아오다 보니 그 자부심이나 조국애를 잘 모릅니다. 그곳 100년이 넘는 이민역사를 살아오고 있는 분들은 조국에 대한 사랑이 대단합니다. 정말 감동 받았습니다.

전: 지금 4학년인데 졸업은 내년에 합니까?

김: 네.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전: 한국에서 대학 졸업생들은 일자리 찾기에 바쁠텐데 김은주씨는 어떤 직종이나 직업을 원하시나요?

김: 이번 학기 전까지만 해도 아동심리학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생각이었지만 가정 사정으로 일단 몇 년은 일하고 난 뒤에 공부를 계속할 생각입니다. 대학원 학비는 장학금으로 마련한다고 해도 생활비도 그렇고 어머니가 몸이 편치않아 어머니를 도와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 이 책의 출간으로 은주 씨처럼 생의 막다른 골목에 부딪혀 유서를 쓰고 싶어할 북한 주민이나 탈북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김: 자유를 누리고 원하는 것을 하는 날까지 살아 있는 게 중요합니다. 최선을 다해 힘들어도 자신의 생명을 지켜 자유를 누릴 그 날을 기다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전: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이군요?

김: 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북한에서 아사 직전의 열 한 살 소녀에서 지금은 한국의 명문 대학교 학생으로 변신해 세 나라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펴낸 탈북여성 김은주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