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탈북자 구출 실화소설 ‘오래된 약속’ 펴낸 인권활동가 윤정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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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때 배고파 목숨걸고 도강한 탈북자들을 한국의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동남아 국가로 구출해 한국행을 성사시킨 윤정은 씨.
그가 탈북자 구출 과정에서 겪은 아픔을 인간애로 승화시킨 회고록적인 소설 '오래된 약속'을 구출 15년 만에 펴 냈습니다. 이 책은 황장엽 전 북조선 노동당 비서가 한국으로 망명한 1997년, 같은 해 10월 탈북자 13명이 한국 활동가들의 도움으로 중국 국경을 넘어 베트남을 거쳐 그 다음해 3월 한국에 들어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이 사건 후 동남아 국가를 경유해 한국으로 들어가는 탈북자들의 행렬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굶주림을 피해 중국과 세계 각지를 떠돌아 다니는 탈북 난민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는 우리의 이야기'라는 작가 윤정은 씨를 만나 봤습니다.

전수일: 책에 춘희라는 탈북여성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도당 신문기자였고, 자신은 그 지역 최고 의과대 학생이었는데 ‘어머니를 설득해 두만강을 건넜고 어머니와 두 언니와 자신이 뿔뿔이 흩어져 중국 농촌의 홀아비와 총각에게 시집을 갔다’고 합니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연변 조선족 마을의 어느 집에 숨어있는 탈북 여성 두 사람이 한국 활동가들이 구출하러 찾아 갔을 때 한 말입니다. “이러다가 우리 둘은 팔려 가지도 못하고 죽는 거 아니오? 아주마이는 굶어서 죽게 생겼고 나도 파라티푸스에 걸렸고, 중국에선 우리를 살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남조선으로 끌려가는가 보오.”

이런 대목을 읽으면서 탈북 여성들이 팔려가는 게 아니라 자발적으로 가겠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윤정은 작가: 네. 여기에서 주인공 ‘만금’이란 여성처럼 자기가 어디로 팔려가는지 전혀 모르고 인신매매 당하는 분도 있었고 자발적으로 중국 조선족에게 결혼을 시켜달라며 오는 분도 있었습니다. 경우마다 다른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배고픔을 피하는 방법은 중국에 가서 결혼을 하든 일하는 곳을 찾아 가든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인신매매를 당하는 분은 많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전: 조선족 마을에는 일종의 먹이사슬이 형성돼 있었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또 조선족과 탈북여성을 연결 짓는 일부터 돈이 오갔다는 얘기도 나옵니다. 그런 먹이사슬에 대해 설명해 주시죠.

윤: 탈북자 얘기를 하면 브로커 등 부정적인 단어를 씁니다. 먹이사슬 역시 부정적인 의미로 들립니다. 실제로는 정말 먹을 게 없어 절박한 상황에서 국경을 넘는 사람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무조건 도와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자들을 파는 사람도 있고 자기 이해관계에서 북한 여성을 데리고 살기도 합니다. 탈북자들의 불법체류자 신분을 이용해 여러 공안들이나 마을 촌장들의 이상한 구도가 형성돼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전: 한국 활동가들이 탈북 여성들을 구출하러 찾아 갔을 때 또 성희 라는 탈북 여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남조선 동무래 머리에 뿔은 어쨌습니까?" 또 "아이구, 우리는 이제 어떡하누. 남조선 사람들은 눈알 빼 먹는다고 하는데 그 신세가 됐구나."
이걸 읽으면서 당시 탈북자들이 남조선 실상에 대해 그렇게도 몰랐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윤: 네. 저희도 97년 당시에는 북한사람들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막상 만나보니 우리가 북한사람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북한 사람들도 남한사회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정말 저도 남조선 사람들이 뿔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남한이나 북한이나 서로를 바로 보는 데 이성이 없이 서로 악마화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 1997년 6월 베이징 아파트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에 탈북자 여덟 명과 다른 한국인 활동가들이 기거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아파트라는 구조가 아래층 위층에서 나는 소리가 여지없이 전달되니 낮에도 걸을 때 발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움직여야 했다." "창문이란 창문은 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더위도 한층 기승을 부리고… 낮 동안은 뜨겁게 달궈 지고.. 후끈한 공기가 창문으로 들어오고...' 또 한 탈북자는 "아파트에 있는 게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다…"라고 썼는데
저는 이런 아파트에 가본적이 없습니다. 중국 내에서 탈북자들 피난시킨다는 안전가옥 소위 쉘터라는 피난처가 이런 답답한 아파트 입니까?

윤: 아파트인 경우도 있고 도와주는 분들의 집일 수도 있습니다. 당시에는 여덟 명의 기거처를 찾다 보니 아파트였던 것같습니다. 탈북자들은 중국 내에서 불법체류자라서 어쨌든 강제송환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이를 피하려면 옆집에 알려지면 안됩니다. 그래도 아파트가 안전할 것같아 그걸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상황에 따라 거처의 선택은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불안한 신분이라서 대부분 갇혀 살게 됩니다.

전: 또 베이징에서는 일교차가 그렇게 심했습니까?

윤: 그렇습니다. 대륙이라서 낮에는 굉장히 덥고 밤에는 춥고, 또 그 당시 마침 여름이 지나가는 늦여름이어서 밤에는 굉장히 추었던 것 같습니다.

전: 더우면 선풍기를 산다든가 추우면 덮을 이불을 사면 될 텐데 살 돈이 없었습니까?

윤: 탈북 루트가 정해지면 언제든 금방 떠날 채비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것을 모두 챙기기가 힘들었습니다.

전: 그렇지 않아도 그 좁은 아파트에 여러 명이 있다 보니 말다툼과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몇 개 인용한다면 “한국에서 온 여자 둘만, 즉 한국 활동가들이 밖으로 다니고, 나머지 사람들은 유령처럼 몸을 숨기고 사는 장소…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어떤 때는 서로를 할퀴고, 어떤 때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조국을 배신했다는 죄책감 속에서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공간과 시간 안에 갇혀 지냈다.” 또 “김민규와 조학수가 코피 터지게 싸우고 김강민과 김강호 형제가 주먹질 하고…”

어떻게 보면 작은 공간안에서 이들이 다투고 싸울 때 이들을 보호하고 책임지고 인솔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윤: 처음에는 탈북자들 마음 깊은 곳에 조국을 배신했다는 자책감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자책감이 자신에게 투사될 때는 자해하는 방식으로, 타인에게 투사될 때는 갈등과 싸움으로 번졌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갈등하고 싸우는지 몰랐었습니다. 탈북자가 북한 나오기 전에는 다양한 계급 출신이고 각자 상황도 달랐을 텐데 당시 제 머리속에는 북한사람들은 그냥 하나의 이미지였습니다. 그래서 그 갈등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의 조국배신에 대한 자책감도 이해 못 했었습니다. 하지만 탈북자들과 같이 지내면서 비록 그들과 갈등이 심각해 질 때도 있었지만 인간적으로 이해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좁은 집안에서 그런 아파트에서 몇 달 동안 여러 명의 다양한 생각과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갇혀 살다보면 남한사람들이었다 해도 아마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 그 책에 묘사했던 인물들은 서로 다른 배경의 북한출신들로 보위부의 끄나풀이었다는 김민규-국군포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또 함북 무산 광산 노동자였던 강만금씨, 아영이란 활동가와는 가장 친했었던 분이죠, 그밖에 송옥란씨라는 중년여성과 아들 두명 그리고 군복무 끝나고 얼마 안 돼 도강했던 조학수, 또 꽃제비 박철이 등등인데……실제 베이징 아파트에서 보호하고 동행했던 탈북자들의 북한 내 출신 배경도 서로 달랐겟죠?

윤: 네. 출신계급도 다르고 사회적 위치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습니다.

전: 그러니까 이를 테면 같은 탄광 지역의 살던 탄광노동자들이었다면 그래도 그런 마찰이 덜 했을 것 같은데 지역적 신분적으로 많이 다르다보니 더더욱 다툼도 많았겠네요?

윤: 물론 지역적으로 같았다면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여지는 있었겠지만 불안한 신분으로 갇혀 살고 있고 또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그런 불안한 심리와 상황이 갈등을 더 크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전: 신경이 더욱 날카로와져 있었겠죠?

윤: 네.

전: 책에서는 6.25 한반도 전쟁이 북침이냐 남침이냐를 가지고 한국 활동가 나영이와 탈북청년 강민이가 말다툼을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이것이 단순히 북침 남침의 의견차이 하나로만 보이지 않고 마치

아파트가 분단 한반도의 모형 공간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6.25뿐만 아니라 –'인민의 굶주림과 남북분단은 모두 미국의 책임' 이라는 탈북자들의 얘기도 그렇고. 만금이란 여성은 '인민과 당과 수령은 한 몸이다'라는 철저한 사상을 갖고 있고. 그래서 북과 남에서 배운 교육의 차이, 역사의 왜곡, 이념과 사상의 세뇌…이런 것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데 탈북자들과 남한 활동가들 사이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았겠나, 나아가서 한국 내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해 동화하고 정착하는 데에도 커다란 혼란스러움을 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던데요.

윤: 저 역시 아파트가 분단의 모형이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또 거기에 하루종일 갇혀 있으면서 얘기하다 보면 서로 너무 모르고 서로가 가진 생각, 문화, 세계관이 너무 다르구나 하는 걸 깨닫곤 했습니다. 물론 남침과 북침의 예는 하나의 상징으로 쓰였지만 사실 서로 언어만 같지 정말 모든 게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이 남한에 와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많습니다. 남한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남한 사람들의 가치관 세계관에 대해 이해가 많이 부족합니다.

전: 당시 여덟 명은 한 아파트에 있었고, 그리고 나머지 다섯 명은 베이징 시내에 흩어져 있었다고 했는데, 이들 열 세 명의 망명 신청이 거부됐습니다. 한국 대사관이 이들의 망명신청을 거부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윤: 당시에 이 13명 탈북주민의 망명신청은 식량난민으로서는 중국에서 최초였습니다. 그 때 대사관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어떤 얘기도 없었습니다. 단지 중국에서 중국법을 어긴 사람들이라서 한국대사관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그 무렵 황장엽 선생이 망명을 한 직후였고 또 그 때문에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면서 탈북자들이 스스로 제3국에 가서 신청한다면 받아주겠다는 정도의 답변을 들었습니다.

전: 그런데 실제로 동남아 국가에 들어가 이 탈북자들이 한국대사관에 망명을 신청했지만 그 역시 거부됐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서는 왜 안 받아줬습니까?

윤: 거기에서도 '중국이나 마찬가지 상황이다'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일단 한국대사관까지 들어갔다가 국경으로 추방됐습니다. 그 사건이 97년 연말에 한국에서 크게 화제가 됐던 이른바 '핑퐁' 난민사건'입니다. 한국 대사관 안까지 들어갔던 탈북자가 다시 추방되면서 이 국경
저 국경을 왔다갔다 하게된 처지라서 핑퐁난민사건이라고 불렸습니다. 당시 한국정부는 탈북식량난민을 받아들일 의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 주중 한국대사관에서 탈북자들의 망명신청을 거부한 소식이 탈북자들에게는 엄청난 좌절을 주었을 것 같은데요, 당시 그들의 심경이 어땠습니까?

윤: 한국에서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 듣고 굉장히 충격에 빠졌었습니다. 왜냐면 그 전까지는 한국정부가 자신들의 정보가치를 고려하고 정치선동에 이용할 것이란 기대를 갖고 ‘나의 가치를 어떻게 높일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러면서도 ‘내가 끝까지 조국을 배반해야 하나?’ 같은 문제를 고민했던 터였는데 이제는 아예 자신들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고 하니까 정말 많이 절망하더라구요.

전: 그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구출하려던 윤 작가를 포함한 활동가들도 낙심이 대단했을 것 같습니다.

당초에 망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었습니까?

윤: 어느정도는 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눈물의 영상편지’라고 해서 탈북자 13명이 도와 달라는 호소를 담은 영상을 찍어 김수환 추기경에게 보냈습니다. 김 추기경이 김영삼대통령을 직접 만나 이들의 안전을 담보하고 전원 남한에 수용할 것을 요청했었지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탈북자들은 한국대사관이 수용하지 않으니까 ‘그럼 우리는 어디에 가나? 우리는 어디에 가야 안전하게 살 수 있나?’ 울면서 우리 남한 활동가들에게 호소했었습니다.

전: 한국정부는 당시 황장엽 노동당 비서의 망명을 허가하고 또 실제 망명을 도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런 김영삼 정부가 일반 탈북자들의 망명, 한국 입국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게 좀 놀랍습니다.

윤: 저희들로서는 그렇게 밖에 이해가 안 됐습니다. ‘사람의 생명에도 등급이 있구나. 그러니까 어떤 누구의 생명은 소중하게 여겨지고 또 어떤 누구의 생명은 정말 가치없이 버려지는 구나……’그런 생각에 많이 슬펐었습니다.

전: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13명의 망명 신청을 돕던 한국 사람들도 앞으로의 일들이 암담했다. 가영은 다시 단식에 들어 갔다…가영은 며칠째 굶었다. 세상의 차가운 벽에 부딪혀서 땅에 떨어진, 날지 못하는 새처럼 가영은 바닥에 웅크리고 잠만 잤다."
정말 대단한 얘기입니다.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일면을 보여주는 표현인데, 여기에 나오는 활동가들, 김가영, 김나영, 김다영, 그리고 남자들 김일영, 김이영, 김삼영 그리고 윤정은 작가의 분신인 아영…이분들은 모두 실존한 인물들입니까?

윤: 네. 실존 인물들이고 캐릭터들도 다 그대로입니다.

전: 이분들이 왜 이렇게 헌신적으로 탈북자들을 도우려 나섰는지 저희 청취자들이나 그밖에 방송을 듣는 이들이 참 궁금할 것 같습니다. 우선 김가영이란 분은 무엇을 하던 분인가요?

윤: 당시에 회사에 다녔고 남자 활동가 일영의 친구입니다. 일영이 중국 출장을 갔다가 실제 조선족 마을에 갔었는데 조선족들이 ‘남북한은 같은 민족인데 식량 구하러 오는 탈북자가 너무 많다’며 좀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조선족 몇 사람과 국경을 실제 방문했는데 거기서 국경을 넘다가 생명을 잃은 탈북자도 보게되고 수많은 탈북자들을 만나면서 그들의 비참하고 너무나 절박한 상황을 알고는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알리게 됩니다. 친구들은 당시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탈북자들을 도와줄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생각에 모두들 하던 일을 그만두고 연변으로 모였죠.

전: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탈북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나영과 다영이란 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윤: 나영은 가영의 지인입니다. 나영은 탈북자들이 먹을 게 없어 죽어가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형편상 어떻게 해서든 뒤에서 도우려 했었습니다. 그 와중에 책에도 나오지만 공중화장실 앞에서 성추행을 당합니다. 그런데 자기의 애인이 도와서 가해자로부터 합의금을 받아 그걸 갖고 중국 연변에 가서 탈북자들을 도왔습니다.

전: 약혼자가 책에 ‘삼영’이라고 돼 있죠?

윤: 네. 삼영입니다. 결혼도 중국에 와서 하게 됩니다.

다영은 가영 나영 일영 이영과는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북한의 식량난이 남한사회에 알려진 다음에 중국에 들어왔던 인물이라서 순서상 다영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분은 서울에서 공무원 일하다 북한의 식량난과 탈북자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동안 하던 일을 그만 두고 중국에 왔습니다.

전: 그 다음에 이영이란 분은 부부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맞벌이해서 번 돈을 탈북자 구출에 내놓기도 했다는데?

윤: 이영은 일영의 친구입니다. 선배 형인데 일영과 절친한 사이라서 이영이 보낸 보고서와 국경상황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전달받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뒤에서라도 일영과 가영 나영의 활동을 물심양면 돕는 분이었습니다.

전: 그러면 아영은 왜 그런 일에 참여하게 됐습니까?

윤: 아영은 이영과 같은 모임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저의 분신이죠. 저는 당시 이영이 전달한 북한 식량난 실상 보고서를 읽고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는데요 사람이 밥이 없어, 먹을게 없어 수 십만 명 죽어간다는 상황을 알고 어떤 일이라도 돕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북한의 식량난을 접하고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다른 일들은 생각할 수도 없었습니다.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뭐든지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었습니다.

전: 윤정은 작가는 그때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윤: 저는 직장에 갖 들어간 상황이었습니다. 대학을 막 졸업하고.
전: 정말 대단한 일인데요, 이 13명을 구출하러 중국에 갔던 윤 작가를 포함한 한국의 활동가들, 당시 20대, 나이 많이 든 분은 30대 정도 됐었나요?

윤: 가영 나영은 스물 아홉 살이었고 저는 스물 넷, 일영은 서른 하나, 둘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청장년들처럼 북한의 굶주림, 주민들의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하던 한국 젊은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윤: 우리들은 직접 봤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돌아와서 한국에 있는 지인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을 때 정말로 믿으려 하지 않더군요. 저희는 눈으로 직접 봤고 북한식량난민들을 만났기 때문에 믿지만. 한국에서는 98년 연말까지도 북한의 식량난 자체를 믿지 안으려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리고 탈북자의 존재에 대해서도 많이 무관심했었습니다. 최근에야 이런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꽤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전: 벌써 15년 정도가 됐습니다. 그런데 이런 헌신적인 활동가들의 노력이나 사랑에 대해 탈북자들이 했던 질문이 떠오릅니다. “당신들이 왜 우리를 도와준다는 겁메까?” 라고 탈북자들이 구출가들에게 자꾸 질문을 하던데 윤 작가는 이에 대해 쉽게 대답을 할 수 없었다고 적었습니다.

윤: 네. 북한을 지원하는 민간단체 분들 만나면 이런 얘기를 합니다. 그들이 거리에 나가 북한어린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하면 아프리카 어린이는 도와도 북한어린이는 도울수 없다는 반응이 한국의 현실이라고요. 그렇다면 왜 저 멀리 있는 아프리카 어린이는 도우면서 북한 어린이들의 굶주림에는 고개를 돌릴까요? 우리 마음에 북한에 대한 두려움과 적개심이 있어서 절박한 상황에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려움을 걷어내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고자 하는 당연한 양심과 인도적인 마음은 자연히 우러나오지 않을까요? 그런데 북한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큽니다.
왜 도와야 하는지 그 이유를 굳이 찾으려 하고 설득하려 노력을 하는데 저는 당장 먹을 게 없어 죽어가고 있는 아이들, 식량난으로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는 데는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 다시 탈북자들을 인도한 행로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한국정부가 망명 신청을 받아 주지 않아 결국 동남아 국가로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남행선 기차를 타고 며칠 동안 동남아 국경지역으로 이동하는데. 기차에서 중국 공안의 검열이나 그밖의 위험은 없었습니까?

윤: 언제나 위험은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남한 활동가들 역시 엄청난 심리적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넘는 과정, 국경에서 맨 몸으로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포함한 탈북자를 이동시켜야 하는데
언제 어디서 어떠한 위험이 닥칠지 몰라 언제나 노심초사하면서 움직였습니다.

전: 결국 활동가들도 탈북자들과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고 봐야 하네요. 그러니까 중국공안에 잡힐 경우 구금되고 억류될 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윤: 그렇습니다.

전: 여러 어려움을 겪고 국경지역에 도착하지만 ‘강폭이 이 삼 백 미터 되고 수심은 수 미터에서 수십 미터이고 악어도 있는 강을 건너야 한다’는 말에 질겁을 했다던데. 강 건너기는 얼마나 위험했습니까?

윤: 저는 거의 기적적으로 13명의 탈북자가 무사히 강을 건넜다고 생각합니다. 강 주변에는 언제나 변경수비대가 양쪽에서 순찰을 돌아서 위험했습니다. 주변은 지뢰밭이었습니다. 그 마을에 사전 조사하러 갔을 때 곳곳에서 마을 주민들 중에 발목과 손목이 없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전: 지뢰가 터져서요?

윤: 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살 세고 물도 많이 불었었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일어난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다가 어떤 일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전: 그러니까 어느정도는 죽을 각오도 해야된다는 얘기군요?

윤: 네.

전: 그런데 실제로 거기 악어가 있었나요?

윤: 네. 악어가 있었다고 그래요.

전: 결국 이 탈북자들은 활동가들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천신만고끝에 그 다음해인 1998년 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하던데요 이들이 한국에 정착한 지 벌써 만 14년이 된 것 같습니다.
함께 동행하면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탈북자 13명, 특히 윤 작가의 경우 베이징 아파트에서부터 함께 했던 탈북자 8명이 한국에서 어떻게 정착 생활을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윤: 주인공 강만금은 정착에 굉장히 성공한 경우입니다. 마지막 후기에도 썼지만 자기가 북한에서 왔다는 말을 이웃에 거침없이 하는 분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말이죠. 많은 경우 한국사회에서 탈북자에 대한 차별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금이란 여성은 그렇지 않고 굉장히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착을 힘들어 하는 분도 있습니다. 대부분 자기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고요. 당시에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아이들 둘이 있었는데 그 아이들도 학교에서 탈북 경험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고 탈북자 신분에 대해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탈북자란 딱지를 떼어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전: 가장 친했던 그 강만금이란 분은 그동안 무슨 일 했습니까?

윤: 어느 대학교에서 청소일을 했습니다. 꽤 오랫동안 한 가지 일만 했습니다.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 작은 가게 하나를 열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전: 결국 지금 말씀 들으면 어렵게 제3국을 거쳐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한국사회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적응하기 어려운 현실을 어떻게 풀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 직면합니다. 윤 작가의 경우 탈북자 구출에 실제 참여했던 활동가로서 그리고 아직도 탈북자들의 정착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는 분으로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윤: 주인공 만금은 이름만 가명을 썼을 뿐 캐릭터에 허구가 거의 없습니다. 실존 인물입니다. 그런 만금이 북한에 아이를 두 명 두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정착 초기에 북한의 식량난 뉴스를 들을 때마다 제게 전화를 걸어 '우리 아이들이 죽었으면 어떻게 하냐, 어젯 밤 꿈에 아이들을 봤다, 아마도 식량난이 심각하다니까 우리 아이들이 사는데 곤란하지 않겠냐'는 걱정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자신들은 남한사회에서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가족, 친지, 친척은 다 북한에 있으니 북한의 소식에 늘 매여 있습니다. 언제나 북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기 때문이죠.
북한의 식량난이 해소되고 해결 되는 것이 일차적으로는 가장 시급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남과 북이 앞으로 더 많은 교류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넓혀야 될 것 같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1990년대 중반 탈북자 13명을 한국의 동료 활동가들과 함께 동남아 국가로 구출해 한국행을 성사시킨 윤정은씨의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