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비법월경죄로 북조선 회령의 인민보안성 12호 교화소에 2년 반 수감됐다 구사일생해 탈북한 김광일씨. 그가 한국 입국 3년만에 지옥같은 북조선의 구류장과 교화소에서 수용자들이 당하는
끔찍한 인권유린 실태를 수기로 써 냈습니다. 그의 수기는 지난 4월 말 서울의 자유북한방송과 강서경찰서가 주최한 수기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김씨는 이 수기에서 백성들의 굶주림은 죄가 될 수 없으며 오직 이들을 기아로 몰아붙인 북조선 정권이야말로 단죄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2008년10월 탈북해 중국과 타이를 거쳐 2009년 2월 서울에 들어간 김광일씨는 현재 탈북자 단체인 북한민주화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전수일: 수기 내용을 보면 스탈린 시대의 시베리아 수용소 상황보다 더 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김광일: 제가 한국에 입국에서 일제시대 때 이름난 서대문 형무소에 가봤습니다. 북한에서도 서대문 감옥이 얼마나 참혹했는지에 대해 들은 바 있고해서 일부러 시간 내어 가봤습니다. 순국하신 열사분들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그 서대문 감옥이 고문기구만 빼고는 지금의 북한 교화소 보다 모든 설비와 시설이 낫습니다.
전: 그 수기 내용에 ‘구류장에서는…때리는 자들이 고함소리... 매맞는 자의 비명소리...구류장안의 수감자들은 공포에 전율한다. 죽도록 때려 놓고는 감방에 들여보내어 족쇄로 살창에 안지도 서지도 못하게 매달아 놓고는 2~3일씩 굶기며 제대로 불지 않으면 이처럼 된다고 수감자들을 위협한다. 그렇게 매달려 2~3일 있다가 풀어 놓으면 실신한 상태로 죽어나는 수도 있다…이런 고통이 너무도 끔찍해서 변기 모서리를 들이 받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이래도 저래도 죽을 바에야 하는 악만 남아 계호들의 무기를 빼앗아 발악적인 항거를 하는 수감자들도 있다.’라고 적으셨습니다. 검찰소의 체포장 발급이라는 법적 절차 없이 체포 당하는 것도 불법인데, 교화소에 가기 전 단계인 구류장에서 매와 욕설은 물론 죽도록 고문을 당하면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김광일: 너무하죠. 너무한 인권유린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제가 100번 설명해도 이해 못합니다. 지금 임수경이 감옥에 갔다왔다고 말하는데 임수경이 갔다온 남한 감옥생활을 하라면 북한 교화소 수용자들은 웃으면서 합니다.
전: 그만큼 편하단 얘기겠죠?
김: 그렇죠. 이북의 교화소 체험자들에게는 남한감옥이 이렇게 편리한 것인지 상상도 못한 것이죠. 그래서 남한 감옥을 가 봐서 아는 남한 분들은 이북의 감옥생활을 묘사하면 도무지 이해를 못합니다.
전: 북한 당국은 비인권적이고 부당하고 비법적인 절차로 사람을 수감하고 고문하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겁니까?
김: 알고도 묵인 조장하죠. 그렇게 조장해 수용자에게 가혹행위를 가해서 그 사람이 견딜 수 없도록 합니다. 그래서 하지 않은 일도 했다고 말하게…그렇게 말해야 매질이 차례 안지니까 순간의 고통을 피하자고 ‘예’ 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러면 형기는 불어납니다.
전: 김광일씨가 교화소에 들어 서서 ‘사’로 향하는데 -교화소에서는 수용자 감방들이 있는 곳을 ‘사’라고 부른다죠?- “대여섯 명이 커다란 손 달구지에 발들이 비죽 비죽 엇갈려 나와 있는 시체 몇 구를 실어 가지고 어디론가 가는데 이 교화소에 들어서자마자 죽어난 시체부터 보게 된 우리는 야차 하다간 저 신세 되겠구나... 하는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끼는데 수용자들은 무심한 눈길이다.”라고 쓰셨는데 교화소에서 죽어 나가는 수감자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 대체로, 첫 째 너무 먹지 못해 항시적 굶주림 속에 허약해 져서 죽습니다. 그 다음에 교화소 위생상태가 열악해서 병이 들어 죽어요. 온 교화소 안이 균의 둥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면역이 약한데 영양도 약한 상태이니까 인츰(금세) 병에 걸려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일하다 사고쳐서 죽어나갑니다. 이렇게 죽어나간 사람들을 사체보관소에 가져가는걸 제가 교화소 입소
첫 날에 본 겁니다.
전: 그런데 수기에는 병방에 갔을 때 열 이틀 동안에 6명이 죽어나갔다고 했어요.
김: 방금 말한대로 교화소 안의 위생상태는 열악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사 바늘 한 대로 2백명 3백명을 찌릅니다. 간혹 예방주사를 놓을 때가 있습니다. 이 남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어느 의사나 간호원이 주사바늘 한 대로 두 명을 놓아도 법적으로 고소 당합니다. 근데 북한에서는 수감자를 아예 사람 취급 안 하고 죽어도 아깝지 않은 짐승처럼 다루니까 2백명 3백명을 찌릅니다. 그런데 이 예방주사를 어느 때 놔주는가? 겨울에 북한 교화소 내에서는 파라티푸스라는 열병이 확산되고 전염됩니다. 영양이 약하고 면역이 약한 사람들에게 전염됩니다. 열 너댓 명을 넣을 감방에 5십6십7십 명을 넣어 놓으니 전염병이 금방 전 감옥으로 확산됩니다. 그래서 전염병 감염자를 열방이라고 하는 곳에 격리 수용합니다. 일반 환자들이 있는 병방과는 다릅니다. 파라티푸스라는 열병 걸린 사람만 구금하는 곳입니다. 제가 그 열방에 들어갔을 때 22명정도 누워 있었는데 12일 동안에 열병 걸려 8명이 죽어 나갔습니다.
전: 교화소에서는 항시적으로 ‘여죄 연루 죄’ 고백을 하게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말 그대로 숨기고 있거나 다른 사람과 연루된 죄를 솔직히 고백하도록 하는 제도라죠? 이 제도 하에서는 ‘반국가음모 가담과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죄가 모두 용서되며 고백한 사건이 가치에 따르는 평가가 있다’ 라고 적으셨는데
비법월경으로 수감된 ‘명철’이란 수용자는 한 끼 배를 불리려고 어머니를 고발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어떻게 고발할 수 있는지 실례를 들어 설명해 주시죠.
김: 북한에서는 교화소를 ‘인간대학’이라고 말합니다. 어째서인가? 거기에서는 인간이 가장 포악해 질대로 포악해지는 한계를 느끼게 되고 또 그 악독한 환경에서도 인간이 사랑을 끝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면서도 인간의 모든 고난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라서 인간대학이라고 부릅니다.
북한 교화소는 항시적으로 사람을 굶기는 곳이라서 수용자들은 배가 너무 고픕니다. 그런데 여죄 연루죄를 고발하면 먹을 것을 줍니다. 사람들이 너무 굶주리면 동물이 됩니다. 먹을 것 없으면 정신이 나가서 눈에서 달이 뜹니다. 먹을것 외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이성을 잃게 됩니다. 이렇듯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남들은 먹는데 자기는 못 먹는 지경에 처하면 친구들에 대해서 고해 바칠 여죄가 없는 사람들은 한 끼 먹자고 자기의 어머니 형제 아버지가 잘못한 것을 다 써서 바치게 됩니다.
당시에 명철이란 사람은 어머니가 권총 탄알을 보관하고 있다는 걸 신고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교화소로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탄알을 보관하게 된 건 미공급 시절에 군인들이 총알을 부대에서 몰래 빼내 중국에 팔아먹는 일이 있었는데 한 알당 만 원씩이었습니다. 잘사는 중국인들은 경호용으로 무기를 소지하고 있었다는데 중국정부는 개인들이 무기를 소지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중국인들은 불법적으로 구입한 총기에 필요한 총알을 북한 군부대에서 남발된 총알을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가 그런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총알 다섯 알 가지고 있었던 걸 여죄로 써서 고해 바쳤던 겁니다. 그래서 교화소는 그 사람한테 펑펑이 떡을 준 것이죠. 펑펑이 떡이라는 건 강냉이를 변성해 튀겨서 가루로 만들어 물에 섞어 만든 것인데 금방 먹을 수 있는 떡이 된다고 해서 북한에서는 ‘속도전 떡’이라고 합니다. 그 떡 다섯 개가 든 그릇을 받는 대신에 자기 어머니를 결국 잡아서 바친 것이죠.
전: 그런데 그 고백제도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적으셨습니다. “그 진정한 의도는 인간 개조 목적이 아니고 체제 전복의 사소한 싹이라도 발견하려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김: 맞습니다. 북한에서는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함북 회령 같은 어느 지방에서 무기가 분실된 일이 있다면 북한 당국자들은 그 지역에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김일성 김정일 때도 그랬지만 김정은 역시 그렇습니다. 그 분실된 무기가 어디에 쓰일 지 그 용도를 가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소위 1호사업이라고 해서 보안사업, 경호사업에는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당국자들을 그런 곳에 보내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화소에서는 무기나 폭약류에 대한 여죄 연루죄를 내 놓는 수용자들에 대해서는 평가가 높고 ‘탁’자리란 것을 줍니다.
‘탁’자리 라는 것은 자기는 일을 하지 않고 다른 수용자들을 관리 감시 감독할 수 있는 그런 권한이 부여된 자리입니다. 여죄연루죄 고백으로 사람들을 개조하려면 일반적인 범죄, 예를 들어 살인 강도 강간 등 강인범죄, 한국식으로 강력범죄, 그리고 사기죄 등에 대해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게 기본이어야겠는데 당국자들에게는 죄를 고백하도록하는 것이 교화 목적에서가 아니고 체제보안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반 죄목에 대한 것 보다는 무기 폭약류에 대해 여죄 연류죄를 고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디가서 누가 도둑질을 했다든가 사기를 쳤다든가 훔치는 걸 봤다든가 하는고백을 하면 그런 건 높이 평가하지 않는 다는 말이지요.
전: 그러니까 체제전복의 수단이 될 수있는 무기 폭약류는 가장 엄중히 다뤘다는 얘기군요?
김: 그렇죠.
전: 또 교화소 일이 정말 힘들고 진을 빠지게 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원목운반을 할 때에는 그야말로 한 통 한 통이 역사이다…여름철에는 맨 땅으로 나무를 끄는 것이 도무지 끌리지 않고 뒤에서는 초병들이 매질로 재촉하지 하니 안타 까와 '나무야 왜 가지 않나' 하며 눈물을 흘리는 수용자들도 있다. 이렇게 수용자들이 피땀으로 역사하여 나무들이 끌리어 과에 도착하면 그날 징벌노동이 끝나며 수용자들은 '또 하루 살았구나'하며 한숨을 쉰다."
이건 독일의 나치 수용소나 구소련 시대 스탈린 시대 수용소 보다 더 무자비한 학대로 노예가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 네, 맞습니다. 어느 제도나 범죄자는 독재를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독재도 개조를 위한 독재를 써야지 죽이기 위한 독재를 써서는 안됩니다. 이건 사람들을 완전히 죽여요. 교화소에서는 ‘천날 같은 하루’ 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너무나 고통스럽고 지겨워서 ‘천날 같은 하루’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전: 그런데 교화소에서 가장 생존에 직결되는 ‘먹을 것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는 말이 나오는데요,
식량 배급 정량에 대해 이렇게 쓰셨습니다. “교화소의 배식 정량으로는 누구도 예외 없이 허약으로 죽어날 수 있기에 수용자들은 어떻게 하나 밥 한술 국 한 그릇이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다 한다…소똥 속의 옥수수 알을 먹는다는 건 사실이다…뱀 한 마리에 밥 여섯 덩이, 쥐 한 마리에 밥 두 덩이를 바꾼다…북한의 교화소들에서는 쥐를 먹은 지 너무도 오래 전 일이며 없어서 못 먹는다…”
그런데 더 끔찍한 얘기는 ‘시체들은 처리될 때까지 있노라면 쥐들이 눈 코 귀 발가락 같은 것은 다 파먹는다.” 는 것입니다. 결국 쥐도 먹을 게 없다는 것 아닙니까?
김: 쥐도 물론 먹을 게 없죠.
그런데 북한 교화소에서는 사람이 하나 죽었다고 해서 그날로 묻어 주는 게 아닙니다. 죽으면 개나 짐승보다 못하니까요. 하지만 한국 교화소에서 사람이 하나 죽었다 치면 아마 금방 사회 문제가 될 겁니다. 북한 교화소에서는 시체가 몇 구 모일 때까지-적을 때는 대 여섯 구, 많을 때는 열두 구- 이렇게 모일 때까지 사체실에 보관해 둡니다. 그렇게 보관해 두면 그 사체실 창고 구석에 많은 쥐들이 나와서 사체들의 눈과 귀를 파먹고 코와 발가락들을 뜯어먹습니다. 그래서 사체들을 불에 태우는 ‘불망산’이란 데에 가져 갈 때쯤이면 그 사체들이 보기 흉측하게 돼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아직 화장문화를 선호하진 않습니다. 화장은 사람을 두 번 죽이는 거라고 생각하는 게 아직 북한 사람들의 정서입니다. 그런데 남한에는 화장이 많습니다. 남한의 화장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고인을 보내는 예식을 하던데 북한은 그게 아닙니다. 화장을 쓰레기 태워버리는 식으로 여깁니다. 커다란 노(화로)에다 사체들을 거꾸로 쳐 넣고 기름을 부어서. 그것도 사체를 대충 태우다 보니 그 화로 안에 타지 않은 사체들이 쌓이고 또 쌓입니다.
전: 시체 보관은 남한이라든가 다른 자유세계에서는 격리된 냉동실에 해서 썩지 않도록 하는데요.
김: 북한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말입니다. 여기처럼 엄숙한 분위기가 보장된 냉동실에 보관되는 게 아닙니다. 여기에서는 몇 년 된 시체도 냉동실에 보관되더군요. 그게 아니고 맨땅의 허름한 창고 안에 사체를 털석털석 재어 놓습니다. 몇 구가 모일 때까지. 그렇게 방치해 놓으니 썩고 쥐들이 파먹고 해서 시체 훼손은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여기 있는 분들은 정말 상상도 못합니다.
전: 교화소를 운영해 나가는데 있어서도 수용자들에게 줄 식량이 태부족이라서 ‘교화소는 수용자들과 가족들의 혈세로 운영해 나간다’ 고 적었습니다. 예를들어 면회자 가족들이 가져오는 음식, 소위 ‘면식’인 펑펑이 가루의 3분의 2를 강제로 떼어 교화소 급식으로 사용하는 형편이라고 했는데요, 그렇다면 가족들의 면식이 없다면 교화소에서 굶어 죽어나가는 수감자는 훨씬 더 많을 것 아닙니까?
김: 그게 없다면 제 생각에 교화소 (수용자의) 70프로는 죽어 나갈 겁니다. 북한 교화소의 규정으로는 분기별로 석 달에 한 번 직계 가족만이 면회를 할 수 있습니다. 원래 면식이란 것도 없었습니다.
근데 93년도에 남한 내 비전향 장기수로 이름 날렸던 조선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씨가 북한에 돌아와 어느 구류장을 돌아 본 뒤에 당국에 건의해서 생긴 겁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 이인모가 쓴 수기를 봤는데 그는 민주인사 김대중을 비롯한 다른 인사들이 남한에 가족친척이 없는 자기에게 영치금을 주어서 그 덕을 많이 봤고 또 서준식 서승 형제들도 감방 몰래 먹을 것을 갖다 주어서 그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썼습니다. 이인모가 북한에 송환돼 와서 교화소를 둘러 보고는 ‘내가 남한에서 34년간 장기수로 살았지만 남한 감옥이 이런 식이었다면 아마 나는 2년도 채 살지 못했을 것’이라면서 당국에 수용자 직계가족이 가져오는 음식은 허용해 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993년 그때부터 북한에서는 직계가족이 가져오는 음식이나 펑펑이 가루를 면회장소에서 먹거나 감방에 가지고 들어가 먹도록 허용했는데 한 사람이 15킬로 이상 받을 수 없도록 규정했습니다. 이런 결정 배경에는 수용자가 너무 많이 굶어 죽어 나가니까 그들을 살리긴 해야 하겠는데 국가에서 배급은 줄 수 없고 하니 가족들이 면회 때 갖고 오겠금 한 것이지요. 그나마 그 15킬로의 면식에서 10킬로는 교화소가 잘라 먹고 나머지 5킬로만 수용자에게 돌아 갑니다. 근데 이 5킬로의 면식 양은 있으나 마나 한 작은 양입니다. 그래서 가족들은 자기 혈육을 살리겠다고 15킬로 규정을 넘겨 30킬로정도를 들여 보냅니다. 규정을 어기는 것이니만큼 면회를 감시하는 보안원에게 뇌물을 고이게 됩니다. 하지만 규정상 뇌물로 돈은 줄 수 없어서 담배를 고입니다. 담배가 환전될 수 있는 뇌물이거든요. 그리고 보안원들은 또 가족들에게 의약품을 싸 오라고 요구합니다. 면회 간 가족이 의약품을 준비해 갔을 리 없으니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그건 바로 교화소 관리원들의 집에 있습니다. 관리원들은 미리 시내에서 의약품을 사서 집에 재어 놓았다가 수용자 면회 가족들이 약을 사러 오면 높은 값을 부쳐서 먹습니다.
그래서 ‘교화소 관리자들이 수용자 가족들의 혈세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인모 건의로 시작된 1993년부터 제가 교화소를 출소한 2007년까지 일반 수용자들의 가족들이 가져온 면식 가루를 모았다면 아마도 북한의 서해 갑문만큼 쌓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양이 교화소 안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 교화소가 나라에서 급식하는 식량으로만 운영이 된다면 수용자의 70퍼센트는 다 죽어 나갈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교화소를 운영하려고 가족들의 등껍질을 벗기는 것이죠. 아예 피를 말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북한 교화소의 현실입니다.
전: 교화소의 열악한 상태와 관련해 병원과 치료 문제도 지적하시던데요, “교화소 자체가 병이 나면 그 어떤 대책도 없다.”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이다.” “간단한 맹장수술도 할 처지가 못 돼 시간 끌다가 죽어나가고…” 그렇게 의료상태가 열악합니까?
김: 뤤트켄 설비라는게 있긴 있습니다. 근데 그게 뤤트켄 1세대 설비예요. 남한에서 말하는 x-ray 라는 거죠. 그야말로 죽기 바로 전의 환자가 아니고는 그 증세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 병원 치료실이 따로 없습니다. 결핵, 간염, 일반 환자 등으로 수용자를 구분했을 뿐이지 환자 수용자들에게 더 나은 음식을 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환자들에게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밥 급식량은 정량보다 더 작은 4급 봉지를 줘요. 그것 먹고 사람이 살아 날 수 없죠. 그리고 환자들에게는 결핵 간염 열병에 따라 약을 줘야하는데 약이 없습니다. 주사도 없습니다. 또 동상을 입으면 –숫한 사람들이 눈길에 끌려 다니면서 손 발 코 귀 모든게 다 얼어 빠져서 동상에 걸립니다- 제일 좋은 치료법이라는 게 남새인 가지를 우린 물에 담그는게 전부입니다. 그 다음에 황경피 나무 껍질을 쭉쭉 뜯어서 말린 다음에 그걸 가루 내어 상처에 붙이는 것이 다입니다. 약이란 게 없습니다.
그래서 크게 앓는 수용자들에게는 가족이 면회 올 때 마이신 페니실린 주사약을 싸오게 하라고 시킵니다. 파라티푸스 열병 예방약도 싸오라고 합니다. 교화소 병원에는 그런 게 없으니 결국 교화소 직원들의 가족에게 사야 하고. 그래서 교화소 관리자 가족들은 약장사를 해서 먹고 삽니다.
그럼 그 약을 사서 들여 보내면 환자 본인한테 가느냐? 안 갑니다. 교화소에서는 외부 약을 수용자가 직접 갖게 되면 그것으로 자살할 수도 있고-실제 해열제를 많이 복용하면 독성이 있어서 사람이 죽을 수 있습니다- 또 페니실린도 장사를 하거나 나쁜 짓에 쓸 수 있고 해서 그런 명목하에 교화소 내의 군의가 모두 보관하고 있습니다. 가족들은 자기 혈육이 아프고 죽는다고 해서 들여보낸 약이지만 교화소에서는
주사약 열 대가 들어오면 기껏해야 한 대만 놔 주고 나머지는 자기네들이 다 돌려 씁니다. 이런 상황에서 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합니다. 특히 결핵환자들은 약간이라도 맥을 놓으면 죽습니다. 허약하면 결핵에 전염되기 마련이고 전염 되면 결국은 다 죽어 나갑니다.
북한 교화소에도 병 보석이란 게 있습니다. 근데 병 보석을 제대로 주는가? 안 줘요. 다 죽게 된 사람만 내보내는데 일단 밖에 나가면 거기서 죽습니다. 그나마 여론이 나빠질까봐 웬만해서는 안 내보냅니다. 교화소 내에서 수용자가 죽으면 가족에게 사망 통지서 하나만 보냅니다. 제가 병동에 있을 때 8명이 죽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하루에 14명이 일을 하다가 사고로 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가족들에게는 사망통지 하나만 보냈지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전: 사고로 죽는 사람도 많다고 쎴습니다. '각종 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한다…나무에 치어 죽는 사고, 굴이 무너져 죽는 사고, 도끼에 찍히는 사고...'
그런데 건설현장 사고로 여러 명이 한꺼번에 죽는 사고들도 있었다던데 사례를 하나만 소개해 주시죠.
김: 예를 들어 회령 전거리의 북한 인민보안성 12호 교화소는 그 기본적인 목적이 동광을 캐는 것입니다. 원래 동맥도 얼마 없고 수출할 길도 없어서 광산을 막아 놨었는데 중국의 어떤 사업자가 동을 다시 수입하겠다고 해서 폐갱했던 굴을 다시 뚫고 들어갔습니다.
원래 폐쇄됐던 갱이라서 한번 무너지면 모두 무너집니다. 거기서 착암기로 일을 하던 중에 수직갱이 무너져 너댓 명이 깔려서 죽었습니다. 광산의 돌은 푸석한 게 아니라 딴딴한 화강암들이라서 그걸 맞으면 즉사합니다. 또 4월 15일이 김일성 생일인데 김일성에게 충성한다고 교화소에서 건물을 하나 지은 적이 있습니다. 건물 짓는데는 시공규정이 있습니다. 브로크 (벽돌)를 쌓을 때 하루에 다섯 단 이상 안 쌓게 돼있습니다. 근데 마른 브로크도 아니고 젖은 벽돌을 하루에 다섯 단이 아니고 열네 단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 위에 들보를 올려 놓으니 그 젖은 브로크가 견뎌 내겠습니까?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무너지는 순간 14명이 깔려 즉사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통나무 끌다 눈길에 다리를 잘리는 사고는 너무 보편적이라서 매일 한 두 건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집단사고도 잇따라 발생합니다. 하지만 안전설비라는 건 없습니다. 또 폐갱했던 곳이라서 굴을 따라 전선을 설치했습니다. 근데 그 전선이라는 게 피복제가 없는 고압선 3천3백볼트 세 선을 갱도 옆으로 놓은 것입니다. 그 밑에는 또 조명선 두 선을 깔았습니다. 모두 다섯 선인데 거기에 몸이 붙으면 찍소리 없이 죽습니다. 굴 너비가 1미터에서 1.5미터 정도인데 구불구불합니다. 환한 전등이 없고 벌건 다마를 50미터에 하나씩 꽂아 놓았는데 굴이 구불구불하고 어두워 수용자들이 앞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수용자들은 막대기로 전선을 견제하면서 마치 장님처럼 두르리며 갑니다. 남한에서 노동자 보호 설비 없이 그처럼 일을 시켰다가는 그 사업자는 교도소 갔을 겁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노동자가 죽어도 상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시커먼 굴속을 나무찔통 메고 일하러 들어가야 합니다. 사고가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습니다. 사고 환경이 조성돼 있는 겁니다. 교화소 수용자 하나 죽었다 해서 아까와 할 사람 없습니다. 이런데서 내가 살아남았다는 게 지금 생각해도 정말 기적입니다. 아니면 하늘이 날 도왔든지... 스스로도 탄복합니다.
전: 각종 건설관련 사고가 많았지만 사고 중에는 도주사고가 가장 엄중하고 큰 사고 라고 쓰셨습니다. “배고파 제 정신이 아닌 수감자가 도주했다 잡히면 사형인데 어떤 도주자는 3년 가형이란 전례 없는 가벼운 처벌 받았다. 그 이유는 수용자들 사이에 도는 얘기로 유엔인권운동의 앞을 피해 공화국이 사형을 자제한다고 했다고 한다” 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다면 외부세계, 국제사회의 북한인권문제 제기가 ‘효과’를 본 다는 얘기 아닙니까?
김: 능히 효과를 봅니다. 그래서 제가 현재 ‘북한민주화위원회’ 라는데서 작은 힘이나마 북한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북한도 저희들이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 살 수 없다는 걸 모르지는 않습니다. 북한이 94년부터 98년까지 미공급 시절에 함경북도 회령에서는 하루에 9명을 쏴 죽였습니다. 사형이 너무 빈번해 사람들은 가 보지도 않게 되자 당국은 법적으로 강제적으로 사람들에게 사형장을 가라고 모집할 정도였습니다. 사형도 가끔해야지 너무 자주하면 사람들이 너무 치를 떨고 신물이 나서 보려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외국에 그대로 알려집니다. 비법 월경으로 중국을 다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국제사회에 안 알려질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알려져 너무한 인권유린이라고 하면 북한당국은 아니라고 부인하겠지요. 하지만 실제 사형 현장의 장면들이나 증빙자료들이 나오고 하니까 북한으로서는 ‘아, 이러다간 세계적인 압력을 더 받겠구나, 그래서 더 살기 어려운 고립에 빠지겠구나’ 해서 이를 탈피하려고 미국과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고 좀 자제하는 분위기 였는데 마침 그때 교화소를 도주했다 잡힌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례없이 정말 기적적으로 3년 가형으로 됐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왜냐? 도주자는 잡히는 순간부터 무차별적인 구타 폭행으로 기가 질려서 얼마 못 살고 다 죽습니다. 그 사람 이후에 도주자가 잡히면 가차없이 다 쏴서 죽였다고 합니다. 제가 출소 직후 두명이 도주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산속 눈밭에서 얼어 죽은 뒤에 그 사체가 부패됐는데 교화소는 사체를 교화소에 끌어다가 전시했다고 합니다. 또 2004년 제가 교화소에 들어가기 전 해에는 도주한 수용자를 잡아서 교화소 정문에 들어오기도 전에 트럭에 밧줄로 목을 매어 맨땅에 끌면서 철문 안으로 들여와 운동장을 두어바퀴 돈 다음에 총살했다고 합니다.
전: 도주에 대해서는 엄정히 처벌한다는 본보기를 삼았다는 얘기군요.
김: 그렇습니다. 노동교화소라는 것은 말 그대로 노동을 시켜 사람을 교화시켜야 하는 곳인데 말입니다. 도주사고가 나면 담당 보안원들도 처벌을 받기 때문에 도주사고에만 초신경입니다.
또 다른 예로 어느 수용자가 도주해서 골짜기에 숨어 있었답니다. 추격해온 경비원들이 도주자에게 나오라고 해도 안 나오니까 에이케이 소총으로 쏴서 벌둥지를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범죄자에게 함부로 총을 못 쏘지 않습니까?
김정일이 한 말이 있습니다. 총을 쏠 줄 모르는 건 보안원이 아니다. 즉. 총 쏠 줄 모르면 여깃말로 경찰이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대한민국 같은 자유국가에서는 피의자라고 해도 총으로 쏴 죽이면 그 사람은 당장 법적 처벌을 받겠죠. 근데 북한에서는 그 어떤 법적 처벌이 없어요. 도주자는 그 자리에서 쏴 죽이면 돼요.
전: 2004년에 교화소에 들어간 뒤2007년 2월, 만 2년 5개월만에 출소해 어머니를 만나 뵈었는데
그 앙상한 뼈만 남은 손을 쥐고서 이런 말을 했다고 적으셨습니다. “77살 된 어머니를 이토록 고생시킨 내가 너무도 원망스럽고 나와 어머니를 이 운명에 몰아버린 이 땅이 억울했고 저주스러웠다.”
결국 탈북을 재차 결심하는 계기가 된 것 같은데요.
김: 네. 어머니 말이 나오니까 마음이 짠해지고 힘들어 지네요. 제가 출신이 나빠도 정말 순진하게 일하며 살았어요.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하며. 그리고 그렇게 힘든 고난의 행군에도, 먹지못해 사람이 그렇게 많이 죽어 나가도 나는 차마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영영 달아날 생각은 못했어요. 왠가? 어느땐가는 잘 사는 나라가 되겠지... 그러니까 북한 정권이 우리를 계속 굶기는 데도 우린 그만큼 세뇌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2년, 3년, 5년,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나아지는 것은 없고 점점 법은 인민들에게 가혹하게 조여들었고 살기 힘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들고 뛰는 탈북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북한을 떠나지 못 했습니다. 그게 반역같이만 생각이 되어서. 북한땅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먹고 살기위해 북한에서 하지 말라는 비법월경을 했죠. 그런데 종당에는 나를 죄수로 만들어 놓더라구요. 그때 내가 구류장에 앉아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야 말로 너무도 모자란 놈이었구나.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구나.’ 법이란 게 살아갈 수 있게 만든 법이여야지 살아갈 수 없는 법을 만들어 놓고 그 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독재를 실시한다면 이것은 법이 아니라 강권이죠. 그리고 내가 출소한 날 나를 뒷바라지 해온 어머니를 보니까 너무도 죄스럽더라구요. 어머니가 무슨 죄가 있다고…34살에 수감되어 내가 34년 살면서 그렇게 까지 이 땅이 저주스럽고 이 나라를 원망해 본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의 인생을 전환할 수 있는 결심을 다지게 만들었습니다. “이 땅에서는 못 산다, 이땅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다”라는 결심으로 정말 죽을 것을 각오하고 대한민국을 찾아 왔죠. 어머니를 숨져 보낸 다음이었습니다.
전: 지금 한국에 오신 지가 만 3년 지났는데 왜 그렇게 힘들었고 괴로왔고 다시 기억하기도 싫을 수용자 생활을 수기로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시게 됐습니까?
김: 탈북자들이 한국에 들어오니 보편적인 인권을 생각하고 동정의 눈길을 보내주시는 국민도 있지만
통일을 절실히 바라지 않는 것이 대체로 국민정서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또 탈북자라고 하면 범죄자들이 왔다고 하고 또 북한정권은 우리를 변절자 쓰레기라고 말합니다. 그말을 그대로 받아서 여기에 종북하는 사람들, 소위 진보라고 하는 사람들은 탈북자들을 변절자 쓰레기 그리고 범죄자라고 합니다. 여기에 온 탈북자 2만4천명은 북한법으로 따지면 두만강 압록강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황장엽 선생부터 방금 어머니 등에 업혀 도착한 아기까지도 독재의 대상이 됩니다. 북한 법을 위반한 범죄자가 되는 겁니다. 그럼 왜 이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두만강 압록강을 넘을 수밖에 없었겠는가? 왜 법을 어겨야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 북의 제도인가? 이걸 이해시키고 싶있습니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하라고 하는대로 하면 굶어 죽을 일 밖에 없습니다.
국가에서 하라는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기 싫었기 때문에 북한 법을 어긴 겁니다. 북한법은 사람을 죽이는 법인데 그 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북한법으로는 그들이 범죄자는 맞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지게된 원인 제공자는 북한정권입니다. 그 정권은 범죄를 지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어 놓고는 그 법을 어겼다고 독재를 실시하는 정권입니다. ‘그러면 살아보겠다고 뛰쳐 나온 우리가 범죄자인가? 쓰레기인가? 만일 우리가 쓰레기라면 그 쓰레기를 양산한 건 바로 너희 북한정권이다.’ 그래서 제 책 제목이 ‘무죄’입니다. 이 사실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남한과 전세계에 알려서 조금이나마 북한 인권을 개선하는데 이바지하려는 마음에서 썼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비법월경죄로 북조선 회령의 인민보안성 12호 교화소에 2년 반 수감됐다 탈북한 김광일씨와 그가 쓴 교화소 실태 수기에 대해 얘기를 나눠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