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6.25 전쟁 기념일이 되면 미국 곳곳에서는 미군 향군단체와 지역 한인단체들이 3만4천명의 미군 전사자들의 넋을 기리고 생존해 있는 참전용사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이번 61주년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6.25 기념행사와는 상관없이 한국전 참전 미군에 대한 감사와 위로의 행보를 꾸준히 지속하고 있는 한국인이 있습니다. 심호명 씨. 2007년부터 벌써 다섯 차례나 미국을 찾아 병상에서 투병하고 있는 한국전 참전 노병들을 위문하고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감사의 말과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심호명 씨는 6.25 전쟁의 치열한 전투의 와중에도 가평 마을 어린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준 미군 40보병사단 장병들에 대한 보답으로 캘리포니아 주에 주둔하고 있는 사단 기지를 매년 찾고 있습니다. 올해도 6.25 61주년에 즈음해 한국전 참전 노병들을 위로하고 40사단장의 묘지를 참배한 뒤 워싱턴을 방문한 심호명 씨를 만나봤습니다. 심호명 씨는 현재 자신이 세운 기업 제주물산의 회장이며 세계적인 시민운동 봉사단체인 밝은사회국제클럽(GCS INTERNATIONAL) 한국본부 부총재로 활동하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한 장학사업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전수일: 심호명 회장님 반갑습니다. 한국전 참전 미군 노병들을 찾아 위로하고 위문하며 여러가지 좋은 일을 하고 계신데, 벌써 몇 차례 되셨죠?
심호명 부총재: 다섯 차례 됐습니다.
전: 지난 3월에도 오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한국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다 죽거나 다친 영웅들을 오랫동안 잊고 지낸 사실에 충격을 받고 더 늦기 전에 그들의 헌신과 희생에 작은 보답을 하고 싶다고 말씀 하셨던데, 2007년 때는 그 지역 보훈병원에 30 명이던 노병이 지금은 많이 줄었다고 하죠?
심: 네.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그분들을 찾아 뵈었을 때는 30분 정도였습니다. 한국전 당시 중상을 입어 오키나와 기지에서 1차 응급조치를 받은 뒤에 미국 본토로 후송된 분들인데요, 당시 나이가 18세부터 30세 까지였다고 합니다. 생명은 건졌지만 몸이 온전하지 못해 아직도 60년 동안 집에 가지 못하고 그렇게 보훈병원에 누워 계신 분들입니다. 원래 캘리포니아 지역에는 480 명 정도가 병원에 계셨지만 제가 올 때마다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30명이 23명으로 줄고 또 그 다음 해에는 9명으로, 이번에는 5명이 남았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숨지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 그분들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전: 나이 많은 분들이 투병하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겠죠.
심: 그렇습니다. 나이가 보통 86세에서 95세 정도가 되는 분들입니다.
전: 지난 3월에는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국립묘지를 참배하시고 회장님 자비로 제작한 '참전용사 소형 추모비' 제막식을 올렸다고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한국전 참전 전사자가 많이 묻혀 있다고 하죠?
심: 네. 캘리포니아주 출신의 참전용사만 2,495명이 묻혀 있습니다. 참전용사 모든 사람들의 이름이 화강암 돌비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개미 한 마리 살 수 없는 그 사막 묘지에 용사들이 안장돼 있는 걸 보고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전: 이번에도 미 육군 40사단 방문했습니까?
심: 네. 거기서 초청이 왔습니다. 6.25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 때 연천지구의 전투가 치열했었습니다.
그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40사단이 인근 가평 마을에 있는 어린이들이 가마니를 깔고 막대기를 가지고 공부하는 것을 보고 학교를 지어줬습니다. 당시 40사단장은 그렐랜드 장군이었는데 전쟁 후 돌아가신 뒤에도 부인에게 유언을 통해 자신의 연금으로 그곳 학생들을 도와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 2월 17일 졸업식에서도 그렐랜드 장군이 시작한 장학금이 전달됐습니다. 40사단은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사단내에 모금함을 만들어 장학금 사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걷힌 장학금을 가평고등학교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국에 당시 격전지가 많아 추모비나 전적비가 수없이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60년동안 한국 청소년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속 잊지않고 지원해 주는 곳은 아마 미군 40사단이 유일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의 희생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지난 60년 시대는 많이 변했습니다. 그 사이 베트남전 아프간 전, 이라크 전 등 전쟁이 많았지만 6.25 전쟁만큼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은 없습니다. 이런 전쟁이 잊혀져선 안됩니다. 투병하는 노병들. 그들의 부모는 벌써 세상을 떠났고 형제자매들도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 찾아 주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이들 덕분에 우리가 7대 수출 대국에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됐는데 이들을 잊어선 안됩니다.
전: 미군 40사단은 어디 있습니까?
심: 캘리포니아주 오렌지 카운티에 있습니다. 미 방위군사령부입니다.
전: 이번에 오셔서 6.25 당시 가평고를 설립한 조셉 클렐랜드 사단장이 나온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클렐랜드 장군이 거기에 묻혀 있다죠?
심: 네. 작년 7월에 클렐랜드 장군과 그의 부인과 가족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싶다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40사단에서 묘소에 대한 연락이 와서 참배하고 왔습니다.
전: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들에 대해 지속적이고 극진하게 위문하고 계신 데 대해 지난 3월 캘리포니아 주 하원에서는 결의안을 채택해 심 회장께 감사장을 전달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과 미국 관계를 흔히 맹방, 혈맹이라고 표현하는 건 많이 봤고 들었지만 혈맹관계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는 심 회장님의 감사와 위로의 실천에 미국민이 감명을 받은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심: 일제 치하와 해방 이후 공산주의나 민주주의가 뭔지도 잘 모르던 우리나라가 공산주의자들의 남침에 의한 6.25 전쟁으로 초토화 된 때에 미국이 유엔 일원으로 참전하고 주도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그 후 우리는 다행히도 민주 자유 평화주의 지역에 살아 오늘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 됐습니다. 만일 우리가 공산화 됐다면 지금 북한처럼 살지 않겠습니까? 감사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이미 돌아가신 분들의 넋을 기리고 아직 보훈병원에서 투병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분들을 찾아 뵙는 게 우리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전: 6.25 전쟁 참전국은 미국외에도 다른 나라들이 있습니다. 이들 나라 참전용사들의 위문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심: 그렇습니다. 하지만 고령의 참전용사들 대부분이 숨지고 있는 게 안타깝습니다. 또 보훈병원에 있는 참전용사들을 찾아 보면 자신들의 계급이나 나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60년 동안 찾아주는 이 많지 않고 잊혀진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분들을 보는 게 충격입니다.
전: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와 위로 활동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는 투철한 애국심과 국가안보를 강조한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작년 6.25 전쟁 60주년에 일어난 북한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사태로 한미동맹과 국가안보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셨을 것 같은데요.
심: 저희 한국에서는 6.25나 호국보훈의 달에는 많은 행사가 있습니다. 전국 각처에 유엔군 묘지 혹은 격전 사적지가 있어 지역대로 행사도 하고 있고 영국, 호주 그밖의 유럽의 참전국의 용사들도 정부의 초청으로 전쟁 당시의 참상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사적이나 현재 한국의 발전상을 견학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참전을 주도한 미군을 직접 만나 우리가 늘 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있으며 잊을 수도 없다는 점을 확인시켜 드리고 또 감사의 표시를 하는 건 중요합니다. 미국에 우리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분들에게도 그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들의 위문에 앞장서고 있는 심호명 밝은사회국제클럽 부총재의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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