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뉴욕에서 개인전 연 탈북화가 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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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북조선에서 선전작가로 활동하다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만에 미국에서 개인전시회를 연 화가 선무. 북조선에 있을 때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그리는 게 소원이었다는 그가 탈북 후 한국에서 그 소원을 푼 것은 물론 북에서는 철천지 원수의 나라로 알고 자란 미국의 최대 도시 뉴욕에서 그 그림들을 전시한 것입니다. 선전작가로 오직 주체미술밖에는 몰랐던 그가 지금은 북에 두고온 부모 형제와 동포들의 자유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다운 삶에 대한 자신만의 진지한 얘기를 그림에 쏟아 붓고 있습니다. 지난 7월 중순부터 한 달 동안 SB D 화랑에서 전시된 선무 화가의 그림은 북한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있던 미국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뉴욕 방문을 계기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그는 다음에는 뉴욕의 화랑이 아닌 가장 번잡한 길거리 광장에서 전시회를 해 보고 싶은 꿈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미국 전시회를 끝내고 서울에서 열리는 또 다른 전시회의 출품작 제작에 여념이 없는 선무 화가를 전화로 만나봤습니다.

전수일: 어떤 그림들인가를 보기 위해 웹사이트에도 올라가 봤고 신문보도에 소개된 것도 봤는데요 주요 그림들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조선의 예수’ ‘환희’ ‘탈출’ 등과 같은 그림도 있고 김정일 김정은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이라던데 선무 화가께서 강조한 작품이나 인상적인 작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선무: 비슷비슷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조선의 예수’는 북한사회에 있을 땐 몰랐던 종교를 바탕으로 구상한 것입니다. 남한사회에 내려와 보니 종교가 무척 많은 걸 알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흔히 사이비종교에 빠진 사람들의 인식이나 생활이 김부자 숭배와 비교가 됐습니다.

전: ‘조선의 예수’란 그림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김정일국방위원장의 초상화에 예수의 머리를 씌웠다고 하죠?

선무: 네. 북한의 가정집, 공장, 기업소마다 걸려 있는 김정일 초상화에 예수의 머리만 씌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북한을 하나의 사이비종교집단으로 본 것이죠.

전: 김정일국방위원장이 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그림도 설명해 주시죠.

선무: 북한사회가 개방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린 것입니다. 금목걸이는 백성들은 먹을 게 없는데 정일이는 사치하고 있다는 내용입니다. 그 금목걸이에 열쇠를 달았는데 그건 금목걸이처럼 닫혀진 북한사회를 개방시켰으면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 북한에서는 김일성 부자의 그림을 함부로 그리지 못한다고 들었는데요.

선무: 못 그리죠.

전: 선무 화가는 북한에 있을 때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사진을 한 번도 그려보지 못했습니까?

선무: 네. 그리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전: 김 부자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화가는 어떤 화가입니까?

선무: 일단 토대가 좋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실력이 있어야 하겠죠. 토대는 성분인데 그게 중요합니다. 실력이 아무리 좋아도 그 계급에 속하지 않으면 그리기가 힘들죠. 바라는 게 어렵습니다.

전: 미국의 가장 큰 도시 뉴욕에는 처음 와 본 것이라죠?

선무: 네. 처음입니다.

전: 개인전시회도 처음이겠죠?

선무; 네. 처음입니다.

전: 북한에서는 철천지 원쑤의 나라인 미국에 와서 작품을 전시하셨는데, 그 작품에 대해 미국인들의 반응이 어땠을 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선무: 저도 미국 가기 전부터 그게 가장 궁금했습니다. 전시회 시작하는 날 여러 미국사람들이 왔습니다. 다들 좋아하는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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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목걸이를 목에 걸고 있는 김정일국방위원장. (사진-선무 화백 제공)

전: 어떤 점에서 선무 화가의 그림을 좋아했을까요?

선무: 내용도 그렇지만 스타일도 좋아한 것 같아요. 북한에서 하던 프로파간다 방식을 가져와서 여기에서도 내 방식대로 표현한 것이 그렇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단 북한이란 나라에 대해서 호기심이 컸던 것 같습니다.

전: 미국인들에게는 북한이란 나라가 은둔의 나라,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일텐데 실제 거기에서 화가였던 분이 와서 그림을 그렸으니 그에 대해 관심도와 궁금증이 높았겠죠.

선무: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전: 보도에 미국인 관람객 한 사람이 선무 화가에게 작품을 그릴 때 영감을 어디서 얻냐고 물었더니 김일성 김정일한테 얻는다고 대답했다죠?

선무: 네. 김일성 김정일 부자에게 얻었다고 했죠. 물론 농담 삼아 얘기한 것이지만 진담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 사회 그 체제 아래에서 살지 않았더라면 이런 그림이 안 나오겠죠. 그런 점에서 그 둘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죠.

전: 뉴욕 전시회에 걸린 그림 중에 이미 팔린 것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선무: 네. 지금까지 몇 점이 팔린지는 모르겠지만 전시회를 오픈하는 날 한 점이 팔렸습니다.

전: 어떤 그림이 팔렸는지 기억 나십니까?

선무: 김정일이 목거리를 한 그림입니다.

전: 미국인이 샀습니까?

선무: 네.

전: 뉴욕에 있을 때 미국 화랑, 갤러리를 들러 보셨나요?

선무: 로마(화랑)와 여느 화랑도 돌아 봤습니다.

전: 미국 화가들의 작품을 보셨을텐데 어떤 느낌이 들었습니까?

선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그림을 그리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는 좀 달랐습니다.

전: 어떻게 달랐습니까?

선무: 너무 추상적인 면이 많고, 자유를 표현한 건지는 몰라도 어지러웠습니다. 그런 작품에 반감을 가진 건 아니고 다양성에 대해서도 인정하려 하지만 나의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아직은 거부감이 있더라구요.

전: 구경한 작품들이 주로 어떤 주제였습니까?

선무: 로마(화랑)에 가니까 옛날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있었는데, 피카소나 디샹 등 여러 화가들의 그림이 있었습니다. 요즘 현대 미술작가들의 작품이 더 와 닿는 것 같았습니다.

전: 그런 그림들은 어떤 그림들입니까? 초상화입니까 풍경화입니까?

선무: 북한에서는 그런 것들을 보지도 못했고 또 그림으로 인정도 하지 않을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긴 한데 사람같지 않게 기형적으로 그린 그림들이 있습니다. 입체적이라고 하는 작품인데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의 것이라고 합니다만 나는 잘 모르겠더라구요.

전: 뉴욕에 1주일 계셨나요?

선무: 네. 일주일 있었습니다. 그 기간에 뉴욕을 안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안 가본 것 보다는 낫습니다.

전: 뉴욕 시내도 구경했습니까?

선무: 네. 허드슨강, 자유여신상 등을 가봤습니다.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그쪽에서 더 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습니다.

전: 뉴욕 거리를 직접 돌아다녀 보셨나요?

선무: 네.

전: 미국 최대 도시 뉴욕의 거리를 돌아 다니면서 느낀 것이 있을 텐데요.

선무: 타임스스퀘어를 가 보니 엄청나게 현란하더군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거기에서 어떤 작품 전시를 해보고 싶더라구요. 번잡한 도로가 겹치는 자그마한 광장인데 건물들도 엄청 높고요. 그것이 미국이라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습니다. 좀 더 겪어 봐야 그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겠지만요. 일주일의 경험이었지만 공원에 가면 사람들이 굉장히 태평스럽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은 무시무시 하고요.

전: 어떤 점에서 그렇게 무시무시 했습니까?

선무: 얼굴색이 모두 다른 사람들이 돌아 다니는 걸 본 것은 첫 경험이라서 그랬습니다.

전: 백인 황인 흑인 등 다인종이 살고 있으니 그렇게 느꼈겠죠?

선무: 네.

전: 이번의 뉴욕 경험이 앞으로의 작품 구상에도 활용이 되겠습니까?

선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전: 뉴욕 개인전시회 말고도 해외 전시회에 출품한 적이 몇 차례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도이췰란드 오스트랄리아 이스라엘 등인데 도이췰란드의 베를린 전시회에는 작품 출품과 동시에 직접 방문하셨죠. 도이췰란드는 남북한처럼 동서독으로 갈라졌던 나라이고 20년전에 통일이 됐는데 분단국가라는 점에서는 느낌이 남 달랐을 것 같습니다.

선무: 네. 남 달랐고 또 거기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 우리와 공통점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나라인데 거기 사람들은 택시 기사들도 북한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조선말도 잘 모르는 우리 교민 2세3세들이 남북한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고 관련 행사에 적극 참여하면서 열의가 대단하더군요. 남한 사람들 보다 나아요. 남한에서는 아예 무시하는데 무시한다고 해서 남북분단문제가 없어집니까?

전: 베를린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은 주로 어떤 것들이었습니까?

선무: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는 그림하고 김정일이 침대위에 누워 있는데 아이들이 콜라 약을 주는 것 등이었습니다.

전: 오스트랄리에 갔던 때는 거기에서 국제북한인권대회가 열렸고 거기서 전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 오스트랄리아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선무: 그곳 국제대회에 참가했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봤죠. 책을 통해서나 사람들의 말로만 듣던 북한사회가 그걸 이미지 (그림)로 표현한 것이 서로 어울리니까 좋아하고 앞으로도 제 작품에 기대를 많이 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 한국에서도 여러차례 전시회를 열었는데, 개인전시회는 몇 차례나 열었습니까?

선무: 너 댓차례 연 것 같습니다.

전: 출품작에는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교복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얼핏 선전 포스터 같은데 상징성과 메시지는 분명 포함돼 있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선무 화가가 그림에 담으려는 메시지 주제는 어떤 것입니까?

선무: 나의 삶이죠. 내가 살아왔던 삶과 지금 계속 이어지는 삶을 그리는 것인데요, 내가 어릴 때 노래 부르며 세상에 부러움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하던 모습, 그게 나와서 보니 어린애들 조차 프로파간다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 점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이란 사회는 오직 김일성 김정일의 세상이니까요. 기독교에서 예수 언급 안하면 기독교가 아닌 것처럼 김일성 부자는 나의 삶의 종교였죠.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거죠. 개혁 개방 그리고 아이들의 일치화된 모습을 통해 북한 사회와 북한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전: 북한에서는 30년 살고 1998년 탈북해 중국에서 2-3년 머물다가 타이와 라오스를 거쳐 한국에 2002년 초 입국하셨죠?

선무: 네.

전: 북한에 계실 때도 미술대를 나오고 화가였었죠?

선무: 네.

전: 거기서도 그림을 그렸을텐데, 왜 이 사람이 탈북했을까 청취자들이 궁금할 것 같습니다.

선무: 탈북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김일성 김정일이 나의 전부요 그들을 위해 죽을 각오까지 돼 있었지요. 조국이라고 믿었던 땅을 떠나고 싶지는 않았죠. 그런데 삶이 어려워 두만강까지 동냥질 하러 나갔는데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아 어떻게 중국까지 가게 됐습니다. 중국에서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북한을 다시 돌아보게 됐죠. 그리고 조선사람으로 살고 싶어서 남쪽으로 오게 됐고요.

전: 한국에는 미술대학의 수가 135개, 미술대학생이 8만여명 된다고 합니다. 한국 내 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건 내로라하는 서울대와 홍익대학의 미술대를 나와도 어렵다고 합니다. 홍익대 미술학과의 학사와 석사 학위를 따셨는데 거기 다니면서 학교를 포기할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군요. 그만큼 경쟁이 심했습니까?

선무: 경쟁보다는 이사회가 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았고 또 내 그림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내가 한국사회에서 그림을 그려야 하나’라는 혼돈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강사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전: 어떤 말씀이었습니까?

선무: 그분은 세계 여러 곳에서 전시도 하시고 한국에서 열린 비엔날레에서도 한국 대표로 나가신 분입니다. 그분이 저에게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의 작품을 보여주고 현대미술 쪽으로도 많은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나도 세상에 대해 할 얘기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그림을 쭉 그려 온거죠.

전: 그러니까 화가로서 나도 나만의 스토리, 나만의 얘기가 있다, 그걸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지 않겠냐 하는 생각이었군요?

선무; 그렇습니다. 내가 화가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사람으로서 내 삶과 많은 사람들의 삶을 얘기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죠.

전: 북한에도 미술계라는 것이 있을텐데요?

선무: 북한의 미술계라는 것은 딱 하나. 주체미술이죠.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여기 남한에는 학연 지연 등으로 여러 회(단체/모임)가 있는데 거기서는 그런것을 용납 안합니다. 남한과는 많이 다릅니다.

전: 남한 미술계를 경험하면서 생활, 경쟁, 사회진출, 성공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북한과 얼핏 비교가 됐을 것 같습니다.

선무: 많이 비교가 됐죠. 북한에서는 그저 하라는 대로만 하니까 그 사회에서는 ‘자신’이나 ‘나’라는 건 없습니다. 여기는 ‘나’라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열하고 비굴하면서 성공도 바라는 그런 식의 사람도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티스트, 화가로 성공하기 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삶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전: 굳이 예술가이기보다는 한 인간으로서 하고 싶은 얘기를 그림으로 펼쳐보이고싶다는 것이군요?

선무: 네.

전: 그런데 제가 듣기에 부모형제들이 생각나고 보고 싶을 때마다 붓을 잡는다고 하던데요, 그분들이 아직 살아 있을까요?

선무: 잘은 모르지만 살아 있다고 믿는거죠. 그런 이유로 신상을 공개 안하고 활동하는 거죠. 실명을 밝히지도 않고 얼굴도 밝히지 않고.

전: 그래서 서방언론에서는’ 얼굴없는 화가’라는 표현을 쓰더군요.

선무: 그렇죠.

전: 남한에 들어 간 지 10년 다 됐죠?

선무: 네.

전: 결혼을 해서 딸을 하나 뒀다고 들었습니다.

선무: 딸 둘이 생겼습니다.

전: 나이는?

선무: 작은애는 18개월이고 큰애는 다섯살입니다.

전: 부인은 남한분이십니까?

선무: 아닙니다. 중국에 살았던 교포입니다.

전: 큰딸에게 고향 얘기를 해 줍니까?

선무: 하죠. 할머니와 오빠 언니 다 있다고 얘기해 주죠.

전: 무슨 얘긴지 알아 듣습니까?

선무: 잘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보고 싶다고 하고 가보고 싶다고 해요.

전: 9월에 서울에 있는 유럽상공회의소에서 전시회를 연다고 들었습니다?

선무: 북한에서 북한작가들의 작품을 여러점 수집해온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 작품들과 내 작품을 같이 전시해보자고 했습니다. 북한 안에서 사는 작가들이 그린 그림하고 그 땅을 벗어난 놈의 그림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림을 통해 남북한 현실을 보여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 앞으로의 꿈이라면 어떤 게 있겠습니까?

선무: 뉴욕에 갔을 때 들은 생각입니다만 이 세상은 남북한뿐이 아닌 중동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이 존재한다는걸 새삼 느꼈구요 그런 사람들 인간들의 삶에 대한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지역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이 사는 삶이 왜 그런 식의 삶이어야 하는지 누구 때문에 그런 건지, 그와 같은 사람 사는 얘기를 담은 작품 전시회를 하고 싶습니다.

전: 북한 가족과 재회하는 것도 꿈이겠죠.

선무: 당연하죠.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북에서 선전작가였다 탈북해 한국에 정착한 지 10년만에 미국의 최대도시 뉴욕에서 개인전시회를 연 선무 화가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