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아홉 살 때부터 꽃제비를 하던 청년 김혁 씨가 탈북 11년만에 한국의 유수 대학에서 준박사 학위를 따냈습니다. 지난 8월 말, 서울에 있는 서강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에서였습니다.
그것도 북한의 꽃제비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취득한 것이기에 김 씨에게는 더욱 뜻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함경북도 청진에서10년 가까이 꽃제비 생활을 하다 탈북해 몽골을 거쳐 2001년 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한국에 들어가 정착했습니다.
전수일: 꽃제비가 된 사연부터 알려주십시오.
김혁: 부모님이 어릴 적에 돌아가셔서요. 7살 때부터 가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계모인 줄 처음 알았습니다. 계모의 차별적인 행동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형과 함께 뛰쳐나갔습니다. 형은 9살이었고요. 90년대 들어 9살 되면서부터 자주 가출했습니다.
전: 아버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김혁: 95년 말경에 영양실조로 굶어서 돌아가셨습니다.
전: 탈북은 언제 하셨나요?
김: 2001년 9월 14일 입국했습니다.
전: 당시 나이는?
김: 19세였습니다.
전: 석사학위는 서강대학교에서 받았지만 학부는 가톨릭대학교 국사학과에 다녔다고 들었습니다.
국사학은 무엇을 배우는 학문입니까?
김: 가톨릭대학교에서 한국사를 전공했는데요, 한국사에서도 현대사쪽으로 공부했습니다. 그 현대사에는 북한과 남한의 현대사가 모두 포함돼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4학년때였습니다. 그 교수님은 북한학을 전공하신 분이었습니다. 마침 3학년 말이 되어 공부에 재미를 붙이게 됐는데 제가 북한에서 나왔으니 북한에 대해 공부를 해야할 의무같은 걸 느꼈습니다. 그래서 전공을 바꿨습니다.
전: 서강대에 가서 석사공부를 하면서 논문 주제를 ‘북한꽃제비’로 잡았습니다. 한국에서 북한꽃제비에 관해 연구한 석사 논문이 있습니까?
김: 없습니다. 한 분도 안 계시더군요.
전: 본인이 꽃제비 출신이라서 그런 논문 주제를 택했습니까?
김: 첫째는 제가 경험한 것이기 때문이었고. 둘째는 그 주제에 대해 학술적으로 발표된 것이 전혀 없어서 도전하기로 한 것입니다. 셋째는 북한사회를 관찰해 보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런 사회에서 저항적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부류일까 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복합적인 이유로 이런 주제를 택하게 됐습니다.
전: 논문을 쓰실 때 연구자료 같은 건 어떻게 구하셨나요?
김: 관련 연구자료는 상당히 미약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주로 북한관련 정보가 나오는 인터넷 사이트, 에를 들어 북한인권정보센터, 북한인권시민연합 그리고 그밖에 북한과 관련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단체들을 통해 자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자료원은 저의 꽃제비 경험과 북한에서 꽂제비를 했던 탈북자들의 체험입니다. 남들에게는 드러 내놓고 얘기를 하지 않지만 우리 꽃제비 전력이 있는 사람들끼리는 정보를 공유합니다. 그 친구들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전: 그러니까 꽃제비였던 친구들의 사례를 모았다는 말이네요?
김: 네.
전: 일반 청취자가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게 이 연구의 골자를 설명한다면?
김: 꽃제비란 것이 단순히 못먹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로만 취급하지 말고 이들이 북한에서는 가장 저항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집단이라는 점이 핵심입니다.
러시아가 붕괴 당시 무질서한 사회를 정리한 건 마피아 조직들이었습니다. 당시 마피아가 대기업 사장이나 주요인사들의 경호를 하는 사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마피아가 러시아 사회의 질서를 유지시켰습니다. 총질하고 서로 죽이고 하던 혼란한 사회가 마피아가 경호사업에 손을 대면서 오히려 견제역할을 하고 무질서가 줄어드는 결과가 됐습니다.
그런 러시아 마피아 사례를 북한 꽃제비와 비교를 한다면 꽃제비는 시장에서 훔쳐 먹고 주워먹고 때로는 강도 짓도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시장관리 영향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가 상인들을 상대로 세금을 거두고 관리하고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북한시장이 관리되고 있지만 이제는 상인들이 그런 제도에도 불구하고 꽃제비로부터 계속 위협을 받게되자 상인들은 꽃제비들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보호를 받게된 것입니다.
전: 어떤 대가를 준다는 겁니까?
김: 보호 명목으로 꽃제비에게 돈을 주거나 물건을 줍니다. 그러니까 다른 꽃제비로부터 보호를 받기위해 꽃제비를 고용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국가에서 보호 명목으로 걷는 세금이 점차 꽃제비에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이런 현상이 미약하고 시장이란 곳에 한정이 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점차 꽃제비 활동이 조직화되고 있어 그런 현상은 더 확산될 것으로 봅니다.
전: 그렇다면 꽃제비가 상인 보호 명목으로 대가를 받아 그걸 꽂제비 조직화에 쓰고 운영하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말이네요?
김: 네. 90년대 초기에 이들 조직 규모는 대략 10명 내외였습니다. 근데 지금은 30명에서 40명 정도입니다. 굉장히 커진 것이죠. 한 조직이 그 정도 규모로 유지된다는 건 북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그만큼 커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꽃제비 조직은 국가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점입니다. 북한당국의 강력한 사회통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건 꽃제비의 사회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저항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의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죠. 그와 대조적으로 일반 주민들은 어쨌든 먹고 살기위해 회사를 나가고 집에 거주하면서 살기 때문에 보안 조직의 통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꽃제비의 경우 일정한 거주지가 없고 거주지가 있더라도 통제를 받지 않는 곳입니다.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다보니 단위 조직 규모도 10년 만에 3, 4배가 됐습니다. 그리고 조직원은 더욱 단합이 되고. 이것은 북한 내 시민사회의 형성이나 아래로 부터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주목할 현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 하지만 꽃제비 조직이 남한이나 자유세계에서는 깡패나 범죄조직과 같은 것인데 그것이 치외법권적으로 당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조직이더라도 그게 어찌 체제의 도전세력이 되겠습니까?
김: 체제 도전세력 여부와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것이 북한체제는 예전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강력한 통제가 가능했는데 이는 인민반 학교 공장 등 각종 통제 기관들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런 기관들이 활성화 되어 있을 때는 통제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식량위기를 겪고 나면서 시장이 형성되고 시장을 통해 개인주의가 발달되고 스스로 장사를 하게 됐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자본주의화하고 있습니다. 이럴수록 꽃제비 세력은 커지고 조직화하면서 좀 더 뚜렷한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목표를 가진다는 건 어찌보면 북한사회가 역설적으로 정상적인 사회가 된다는 것이죠.
꽃제비가 북한사회에서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그나마 가장 저항적인 세력이 될 수 있다는데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북한사회가 싫어서 자유롭고 싶어서 나온 것이 탈북자라면 북한 내에서 탈북자와 같은 세력은 가장 저항적인 꽃제비인 것입니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북한에서는 가장 강력한 통제의 대상인 것이죠.
전: 말을 들어보니 꽃제비들은 어린 청소년뿐만 아니라 나이를 먹은 꽃제비도 있기 때문에 그런 조직이 가능한 것이겠죠?
김: 제가 꽃제비 인구에 대한 추정치를 논문에도 언급했습니다만 지금 10대에서 20대 연령만 계산해도 약 80만 명 정도가 됩니다. 90년대 말부터 2천년대 사이의 꽃제비 규모 추정 결과입니다. 그 기간 북한에서는 가족이 많이 붕괴됐습니다. 하지만 연령대에 상관없이 가족단위로 나가서 꽃제비를 하게되면 약 2백3십만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북한 인구의 약 10분의 1이 실질적으로 사회 통제를 벗어난 꽃제비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전: 박사학위도 도전해 볼 생각이십니까?
김: 네. 박사학위를 해야하는데 가장 걱정거리가 영어입니다. 박사과정을 하려면 영어를 잘 해야하는데 제가 영어 실력이 너무 뒤쳐져서 두렵기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는 꼭 공부하고 싶습니다.
전: 지금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김: 통일교육 전문강사입니다.
전: 어떤 걸 강의합니까?
김: 학생들에게는 북한사회를 이해하고 남북한 통일을 위해 어떤 사고를 갖고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또 성인들에게는 통일을 위해 어떤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등을 집중적으로 교육합니다. 초중고등 학생들로부터 성인들까지 대상으로 합니다.
전: 꽃제비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은?
김: 꽃제비들이 가장 저항적인 사람들이란 측면에서 그들이 끝까지 살아 남아 더욱 조직화하고 잘못된 북한사회의 질서를 잡아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되길 부탁하고 싶습니다.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아홉 살 때부터 청진에서 10년 동안 꽃제비를 했던 김혁 씨가 탈북 11년만에 한국의 서강대학교에서 꽃제비에 대한 연구논문으로 최근 준박사 학위를 취득한 얘기를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