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세계적으로 방영된 탈북 타큐멘터리 ‘천국의 국경을 넘다’의 감독 이학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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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자유를 찾아 중국 동남아 러시아 한국 등으로 도강 월경 해상탈출하는 탈북자들과 5년동안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며 이를 다큐멘터리-기록영화로 만든 이학준. 그가 기록영화에 담지 못한 수많은 아픈 체험의 기록들을 최근 책으로 펴냈습니다.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이학준 감독
이학준 감독

현재 조선일보 중견기자이며 다큐멘터리 감독인 이학준 씨는 이 책을 통해 국경 넘어 자유의 땅을 찾는 탈북자들의 눈물과 고통과 희망을 영상보다 더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2008년과 2011년 연속으로 제작된 '천국의 국경을 넘다'라는 제목의 기록영화는 국제앰네스티 인권언론상과 유럽 국제영화제와 텔레비전 축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전 세계 25개국에서 방영됐습니다.

전수일: ‘사람으로 살고싶다’란 이 책은 영문으로도 발간할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

이학준: 내년 상반기에 나올 예정인데요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번역 출판할 것 같습니다.

전: 영문으로 발간하면 한국뿐만이 아닌 전세계의 사람들이 이걸 읽을 수 있겠네요.

이: 네.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사운드//

전: ‘사람으로 살고싶었다’ 책의 첫 장에서는 조-중 국경 현장에서 벌어지는 탈북자들의 실태가 나옵니다. 도강한 탈북자들이 제일 먼저 직면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브로커에게 팔려가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을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다. 국경에서 여자들은 정찰제로 팔렸다. 나이에 따라, 미모에 따라 가격이 정해졌다…"

인신매매를 알고 각오하고 무릅쓰고 강을 건너는 북한 여성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 네. 그렇습니다. 북한과 중국 국경의 경비는 굉장히 삼엄합니다. 양쪽 군인들을 매수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사실상 국경을 넘는 일은 매우 힘든 것 같습니다. 양쪽 군인들을 매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인신매매와 마약 루트를 통해 넘어오는 건데 (탈북자) 본인이 국경을 넘어야 하니 본의 아니게 아니면 스스로 포기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파는 거죠. 저도 처음 취재하고 나서 본사 편집국에 얘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판다는 게 말이 되느냐?’ 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가면 그게 너무 당연했습니다. 왜냐면 그만큼 배가 고팠고 또 그런 방식을 취하지 않으면 거기서 탈출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 몸을 판 돈으로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자기 한 몸을 희생해서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는 거죠. 그게 하나의 미덕으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또 중국 노총각들이 결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그 동네에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전: 이런 사례를 여러 번 취재하셨고 관련자들도 직접 인터뷰하면서 얘기를 많이 들어 보셨겠는데요
지금 생각해 볼 때 이런 인신매매 사례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 한 가지만 소개해 주시죠.

이: 기자 입장에서는 가장 오래 취재했던 것이 오래 기억에 남기 마련입니다. 강을 넘어온 분들의 이야기는 그분들의 입을 통해 100프로 전달 받습니다. 근데 그 보다 더욱 생생한 것은 중국쪽에서 탈북여성을 사려고 한 사람들인데, 저희가 한 달 간 따라다닌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 얘기는 저희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이어서 생생한 팩트였습니다. 40대 중반을 넘은 아저씨였는데요 북한여자를 사서 남편이 된 다음 그 여자를 남한으로 보내 자신도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 한 사람입니다.

전: 그 사람은 중국인이었습니까 조선족이었습니까?

이: 중국인입니다. 그래서 그가 여자를 구했는데 한 달만에 그 여자가 도망쳤습니다. 40대 여성이었습니다. 자신이 원했던 바를 이루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물어봤습니다. 그 여자 구하느라 100만원돈을 썼는데 당신이 산 여자가 도망쳐서 아쉽겠다고 했더니 그 사람 대답이 다시 돈을 모아 이번에는 젊은 여자를 사겠다고 하더군요. 당시 끔찍했던 게 사람을 사고 파는 것이 그 마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돈만 내면 어떤 일도 가능하구나 하는 걸 느끼는 순간이었고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영화 사운드//

전: ‘유령 같은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장이 있습니다. 탈북여성의 자녀들을 지칭한 것인데요, 그 수는 중국 전역에 한 10만여명으로 추산된다고 하죠.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비극은 대를 이었다. 탈북자가 중국에서 낳은 아이들은 호구(호적)를 갖지 못한다....국적없는 아이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다."

호구도 못 갖고 교육도 받지 못하는 탈북자 자녀들의 생활,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냥 집에서 밥만 먹고 자라야 하는지요? 이들의 실태를 소개해 주시죠.

이: 대량 탈북사태가 일어난 지 10년-15년 정도인데 이렇게 태어난 아이들은 많이 커봐야 10대 초반이니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자기 현실을 아직 잘 모릅니다. 본인 스스로 슬퍼하는 경우를 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만나 본 아이들은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어디에도 등록이 안된 아이들이니까 최악의 경우 살인을 당해도 근거가 없는 아이들입니다. 미래를 기대할 수 없는 아이들이란 것이 놀라왔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남한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이런 아이들을 미국이나 유럽으로 입양보내는 운동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현실이 미국에 입양보내기는 거의 불가능해서 유럽쪽으로 많이 갑니다. 그럴 경우에도 일단은 목숨 걸고 탈출해 태국까지 가야합니다. 태국에 들어가 입양가더라도 입양아들의 삶이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입양으로 이들이 자유를 찾고 호적을 찾는다 하더라도 과연 행복하게 자랄 수 있을까는 여전히 물음표입니다.

전: 그 말씀 들으니 책과 동영상에 나오는 김미향이란 여섯살짜리 여아가 생각납니다. 그 어린이는 유럽 스위스의 40대 부부에게 양녀로 보내진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 기자께서는 그 어머니도 직접 만나셨고, 입양부모에게 갈 때도 직접 동행한 걸로 압니다. 김미향 어린이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이: 미향이는 10만명으로 추산되는 탈북자 자녀 중 한 명입니다. 이 아이의 아버지는 북한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엄마가 인신매매 당할 때 이미 임신한 상태였지만 그걸 몰랐다고 합니다.

전: 북한에서 잉태됐지만 중국에서 태어난 국적없는 아이라는 거군요.

이: 네. 그래서 그 아이의 엄마를 구매한 중국 남성이 이 아이를 상당히 구박했고 또 아이가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니까 엄마는 결국 아이를 해외 입양 보내는데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선천적 장애아였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버림을 당한 것이죠. 그래서 이 아이를 탈출시키게 된 것이고요. 저희가 스위스에 따라갔는데 이 아이는 이미 큰 이별을 맛본 상태였기 때문에 헤어지는데도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양부모 역시 그 부분을 굉장히 많이 걱정했었고 사실 저도 그게 많이 걱정됐습니다. 그래서 탈북자 2세들이 국적없이 살아가는 대안으로 꼭 해외 입양을 시켜야 하나 라는 질문에는 자신있게 답을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계속해서 중국에서 살도록 놔두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고…

전: 지금 말씀은 비록 외국의 입양 부모가 아이를 잘 살피고 돌봐줘도 그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할 것이냐가 문제라는 것이군요.

이: 그렇습니다. 그건 미지수니까요.

전: 미향이가 입양된 게 작년이었죠?

이: 네.

전: 한 1년 됐는데 그 뒤에 미향이 소식은 들으셨는지요.

이: 네. 미향이는 이제 8살이 됐구요, 잘 적응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전: 스위스 입양부모가 미향이를 끔찍히 생각하는 모양이죠?

이: 네. 그런 것 같아요.

//영화사운드//

전: 탈북자 가족, 송성국, 전수련 얘기가 가슴아프게 와 닿던데요, 두 사람은 중국을 통해 동남아 국가 타이의 이민국 수용소에서 만났다죠?

이: 네. 저희가 만났을 때는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였습니다. 지금 돌이켜봐도 만화주인공 같은 부부였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너무 좋아해서 아내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내가 임신을 한 다음 엄마를 보고싶다고 하니까 중국으로 팔려간 그 엄마를 구하러 갔었구요.

전: 위험을 무릅쓰고…

이: 네. 그리고 엄마를 구한 다음에 그 부부는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북한에서 이모가족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수련씨 자신의 탈북으로 남은 가족들이 너무 핍박을 받는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아내는 괴로와하고, 남편은 다시 중국으로 가 북한에서 이모 가족을 빼오고…그 당시에는 육로 탈출길이 막혔었습니다. 그래서 밀항선을 몰아 서해를 통해 직접 한국까지 왔습니다.

전: 그것이 제가 사실은 책을 읽으면서도 거의 믿기지 않던데요...17톤 목선을 타고 랴오닝성의 어촌을 떠났다고 하죠?

이: 네.

전: 그리고 이쪽 한국에서는 군산에서 탈북자를 지원하는 김성은 목사가 철선을 타고 서해 공해상으로 가서 이모 가족을 인계받아 구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던데요.

이: 네. 너무나 무모한 계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바다에 한 점을 찍어놓고 만나기로 한 것인데.

전: 직접 취재를 나가셨었죠?

이: 네.

전: 그런데 파고가 높고 한 20-30시간 작은 배를 타고 오는 것인데 공해상에서 만나기까지의 그 위험한 과정이 아마 지금 생각하셔도 굉장히 끔찍하실 것 같은데…

이: 5년 간의 경험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의 하납니다. 올해 국제 에미상 후보에 뽑힌 그 작품이 바로 이 부부를 찍은 겁니다. 돌이켜봐도 지금 이해하기 힘든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큰 바람이 온다는 경보가 있었지만 중국에서 남편이 이모 가족과 이미 출발을 했다니까 저희는 맞으러 가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장을 억지로 설득해 출항했습니다. 철선을 탔지만 파도가 심해지면 오히려 목선이 안전하다고 하더군요.

전: 철선보다는 목선이요?

이: 네. 저는 어부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목선이 파도를 잘 탄다고 합니다. 반면에 철선은 파고가 너무 심해지면 엔진 밑으로 바람이 들어가 엔진이 꺼진다고 합니다. 저희 철선도 중간에 결국 엔진이 꺼졌습니다.

전: 그럼 표류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이: 네. 그래서 저희가 몇 시간 표류를 했습니다. 근데 선장님이 운 좋게 엔진을 고칠 수 있어서 만날 수 있었죠. 만나기 전에도 무전기 하나만 가지고 연락했는데 다큐멘터리에서는 쉽게 만난 걸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 몇시간을 못 찾아서 서로 주변을 맴돌다가 겨우 만났습니다.

전: 그러니까 중국 랴오닝성에 가서 배를 타고 온 것은 탈북자 송성국씨가 직접 가서…

이: 그렇죠.
전: 처남과 이모와 그의 두딸이라고 돼 있던데요.

이: 맞습니다.

전: 그분들은 이제 잘 정착을 하셨겠네요?

이: 네. 한국에 잘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전: 그런데, 배 띄우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배 띄우는 데 한국 돈 천5백만원, 미국 돈 1만5천달러 정도인데 이 큰 돈을 작은 교회를 운영하고 계신 김성은 목사가 갖고 있지는 못하고… 어떤 암에 걸린 환자가 수술비용으로 모아놓은 돈을 헌금했다던데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이: 김성은 목사님은 천안에서 굉장히 작은 교회를 하고 계셨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교회의 전세금을 뺐는데도 돈이 모자랐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어떤 말기 암환자가…

전: 그분은 그 교회 신도인가요?

이: 이 교회는 아니고 천안에 사시는 기독교 교인이라고 합니다. 김성은 목사가 친한 목사님들에게 도움을 청하자 그 소식이 전달된 모양이더군요. 이름도 밝히지 않고 돈 봉투만 놔두고 갔다고 합니다.

전: 그렇군요. 그런데 이 탈북자 부부의 얘기가 더 애틋한 것이 송성국 탈북자가 아내인 전수련의 처가집 가족을 목숨 걸고 구해냈지만 가족들과 재회한 기쁨도 얼마 되지않아 수련씨가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하죠?

이: 맞습니다. 지금도 고생하고 있고요. 저희도 놀랐습니다. 불행이란 게 어느 순간 극복이 되어 끝나면 좋겠는데 그게 악착같아서 이 두 부부를 계속 따라다니고 있는 것같습니다. 암수술은 받아서 좋아졌었지만 다시 도져 요즘 좀 안 좋아졌다고 들어서 안타깝습니다.

전: 김 목사님도 기부금을 받았지만 암치료 비용이 적지 않아 대부분이 빚으로 남아있다고 적으셨던데.

이: 그래서 김성은 목사님은 여전히 경제적으로 곤궁하십니다. 많이 괴로와 하시고.

//영화 사운드//

전: 그 다음에는 이른바 대사관진입 기획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인데요, 중국에서 수 만리 길을 달려 내려가 동남아 국경을 밀입국해 결국은 외국인 대사관에 진입 시킨 것이죠?

이: 네. 베트남 주재 대사관입니다.

전: 원래 탈북자 14명을 9명과 5명 2개조로 나눠 구하기로 했다는데, 9명을 먼저 구하셨죠?

이: 네. 2번째 조는 전부 붙잡혀 북송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 중국 공안에 전부 체포됐다던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 저희가 5년 동안 밀입국 12번에 밀항을 2번했지만 국경에서 탈북자들이 붙잡히는 건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닙니다. 어느 나라든 국경에는 총을 가진 경비를 세우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앞서 나온 9명의 운이 좋았던 것이죠. 붙잡히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겁니다.

전: 그러니까 월경해서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은 운이 좋은 것이고 국경을 넘다 체포되는 건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군요.

이: 그렇죠. 그래서 우리가 흔히 탈북자를 만나면 북한에서 왔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사실 미국이나 한국에 온 탈북자들에게는 책 한권을 쓰고도 남을 만한 나름대로의 탈출기가 따로 있을 겁니다.

전: 그만큼 탈출행로가 어렵다는 말이겠죠?

이: 어렵죠. 두번 다시 생각하기 싫을 정도니까요.

전: 그런데 1차 탈북자 일행가운데 중년 부부의 얘기가 흐뭇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남자는 성분좋은 집안의 아들로 의사였고, 여자는 어려서부터 친구의 오빠인 그 남자를 짝사랑했었다.’ 어떻게 해서 이 두사람은 탈북하게 됐습니까?

이: 남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당서열이 100위 안에 듭니다. 정확한 서열은 밝히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높은 분인데 반해 그의 아내는 보통 상인 집안이었습니다. 근데 아내는 남편 여동생의 친구였습니다. 제가 그 남자를 직접 만나 봤는데 호인이고 매력적입니다. 지금의 아내가 어릴 때 첫사랑한 오빠인데 둘은 이뤄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그 오빠한테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겠는지 당돌하게 물어봤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오빠가 장난삼아 ‘네가 돈을 많이 벌어와야 한다’고 했다는데 그 여자는 그 말을 믿고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 돈을 좀 모았지만 어쩌다 붙잡혀서 북송이 됐습니다. 그래서 오빠가 그 여자가 있는 감옥에 가서 옥중 결혼식을 했습니다.

전: 그러니까 그만큼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를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죠?

이: 네. 그런데 아내는 탈북한 경험이 있어 요주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위부가 늘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아내는 이럴 바에는 탈북하자고 남편에게 제안한 것이죠. 그래서 남편을 대동하고 다시 탈북하게 된 겁니다.

전: 근데 그 부부의 탈출 행로를 죽 적으셨던데 둘이 그렇게 다정하고 살갑고… 아내가 어려워할 때 마음 아파하는 남편의 그런 장면이 여느 부부에겐 발견하기 어려울 것 같던데요.

이: 아까 언급한 젊은 탈북자 부부와 이 부부를 통해서 제 자신을 돌아보고 후회하고 반성하게 됐습니다. 이 중년 부부의 아내가 국경을 넘을 때 저한테 한 말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자기는 붙잡혀도 되지만 남편만은 살려야 한다고요.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자기 남편만은 구해달라고 하더군요.

전: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한 남편이군요.

이: 그렇죠. 저는 제 일생을 통해서 그렇게 뜨겁게 사랑을 못해본 것 같아요.

전: 그 중년부부는 한국에서 어떻게 정착해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이: 높은 분의 자제라서 정확한 정착지를 노출할 수는 없지만 어느 지방에 살면서 의사자격고시를 준비 중에 있습니다. 북한에서 의사였는데 한국 법에는 북한에서 전문의 자격증이 있어도 의사고시를 한국에서 따지 않으면 자격증을 주지않습니다. 그래서 그 공부를 하고 계시죠.

전: 중국의 변방 아파트에 은신해 있는 탈북자들을 진료하기 위해 프랑스와 스위스에서 온 외국인 의사들 만난 얘기가 나옵니다.

이: 네. ‘국경없는 의사회’ 분들이죠.

전: ‘국경없는 의사회’ 는 국제단체지요?

이: 그렇죠.

전: 그러면 의사들이 자원봉사하는 겁니까?

이: 네. 맞습니다.

전: 그런데 어떻게 이 분들이 생면부지의 탈북자들 돕기위해 여름 휴가까지 내어 은신처를 방문해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도우려는 걸까요?

이: 저도 그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그 귀한 휴가를 내어 이 위험한데 와서 일을 하고 있냐?’고요. 그랬더니 그 의사는 자기는 이런 일을 하려고 의사가 된 것인데 그런 질문을 하는 당신이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하고 그분은 현명한 대답을 한 거죠.

전: 이건 북한의 의사뿐아니라 한국 의사, 전 세계 의사들이 이런 대답을 해야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탈북자문제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반성해야 될 것 같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탈북자 지원과 관련해서는 중국이나 미국에 계신 분들 보다는 오히려 유럽에 계신 분들이 도움의 손길을 더 많이 내미는 것 같았습니다.

//영화 사운드//

전: 탈북자들을 직접 동행하며 취재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월경을 돕는 사람들, 이른바 브로커가 개입된다고 쓰셨는데 그 브로커의 종류와 기능을 설명해 주시죠. 북한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고 한국에도 있고 탈북자 자체도 브로커가 된다던데.

이: 혼재돼 있습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활동가가 된 분도 있지만, 활동가 상당수는 종교인들입니다.

그분들이 조직을 꾸립니다. 북한내부의 사람을 구해 인신매매를 통하지 않고 국경을 넘어올 수 있게 하는 그런 브로커를 만드는 분이 계시고 또 중국 국경에 브로커를 심어서 인신매매인 것처럼 원하는 사람을 빼오는 분도 있습니다. 그리고 중국을 빠져나오도록 하기위해 중국대륙을 관통해 움직이는 브로커가 있고 중국에서 동남아 국경을 넘게하는 브로커가 있습니다. 넘어 간 다음에는 그 나라 이민국까지 옮기는 브로커가 있습니다. 종교인 출신과 탈북자 출신의 활동가들이 이런 네트워크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고 브로커 또는 활동가란 이름으로 불리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전: 북한쪽 브로커에 대해서도 쓰셨던데요, 제대한 군인이 국경 경비대 소대장과 손잡고 여자와 마약을 팔거나 도강을 시킨다고 하셨습니다. 북한 내의 브로커는 아무나 될 수 있는 겁니까?

이: 전직 군인인 경우가 제일 많았던 것 같아요. 이들은 주민을 돕는 역할보다는 짧은 시간에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큰 위험을 안는 대신에 크게 돈을 버는 거죠.

전: 또 국경에서 마약매매를 하는 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보고 놀랐습니다. 대가로 오코바이를 주고 마약을 빼내오던데요, 이런 마약 밀매가 많은가요?

이: 매우 일반적입니다. 인신매매와 마약은 동시에 병행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위험한 일을 할 바에는 한번에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마약을 넘길 때 여자도 팔고… 저는 처음에는
이 일을 밤에 몰래 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북한 경비선이 직접 마약을 팔러 오는 경우도 있고 낮에 여자를 팔거나 마약매매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TV NEWS SOUND//
전: 전세계 언론이 크게 보도한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2009년 3월.

미국 커런트 티비(CURRENT TV)의 기자 '로라 링'과 '유나 리’가 조-중 국경의 탈북자 실태를 취재하다 북한군에게 납치당한 사건인데요, 저희가 신문지상이나 미국 언론을 통해 알았던 것과는 다소 다른 속내용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두기자의 취재를 돕던 브로커 김철수 전도사 얘기가 인상적이던데요, 이 사건의 핵심을 잠간 소개해 주시죠.

이: 돈을 벌기위해 브로커가 된 분들은 중간에 변질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 변질된다는 것은?

이: 브로커가 되어 돈을 벌려다가 나중에는 이중스파이가 되는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김철수 전도사가 이중스파이라고 보도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커런트 티비 기자들은 중국에 가기 전에 서울에서 제가 먼저 만났습니다.

전: 그분들 서울에 들리셨군요?

이: 네. 서울에 들려 두리하나선교회에 왔는데 제가 취재차 갔다가 우연히 만났습니다.

전: 그러면 그분들 천기원 목사의 도움을 받고자 간 건가요?

이: 네. 근데 그분들이2주안에 인신매매를 찍었으면 좋겠다는 말씀 하시길래 제가 ‘그렇게 짧은 시간안에 하면 안된다. 위험한 일이다. 취재도 좋지만 안전한 것이 좋다’고 말해줬습니다. 저희가 인신매매 취재할 때 김철수 전도사의 도움을 받았던 터라 그분이라면 도움이 될 거라고 조언했습니다. 하지만 브로커들은 항상 조심해야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그 두기자가 짧은 시간 취재에 많을 걸 찍고자 했던 것 같고…

전: 그러면 취재 과욕도 사건 발단에…

이: 네. 일부 작용한 것 같고요. 그렇다고 해서 그 기자 두분을 폄하할 생각은 없습니다. 2주가 아닌 하루를 취재하더라도 기자라면 당연히 그렇게 취재하는 게 맞고. 취재라는 게 항상 목숨을 내놓고 하는 거니까 훌륭한 일을 하신 건 맞습니다. 다만 좀 더 여유를 갖고 무리를 안했더라면 희생자가 줄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전세계의 초점은 정치적인 것이었지만 그분들과 연관된 많은 사람들이 다쳤거든요.

전: 김철수란 전도사가 실질적으로 안내를 했는데 그분이 지금은 중국을 떠돌며 숨어 지내고 있다고 적으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는지요?

이: 두 미국 기자가 북한에 끌려간 다음에 김철수 전도사는 중국 공안에 끌려갔습니다. 거기서 두 기자보다 더 긴 시일동안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예전에 브로커를 하다가 북한에 잡힌 적도 있었습니다. 북쪽 교화소에서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김 전도사는 조선족입니다. 미국 기자사건 이후 중국에서 긴 시일 동안 고초를 당하다 풀려난 뒤에는 생업을 이어가기가 어려운 상황이 됐습니다. 항상 감시를 당하고 있고. 김 전도사가 다른 목사님들 통해 저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는데 두 미국 기자가 자신 때문에 다친데 대해 안타까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2중스파이로 지목되고 있는데 대해서는 ‘자기는 그런 적이 없고, 다만 두 기자를 도우려다 생긴 우발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자기도 피해자다’라는 주장을 합니다.

전: 근데 김철수란 분은 브로커에다 전도사란 칭호가 붙어 헷갈립니다. 이분은 기독교인입니까? 어떻게 전도사란 호칭이 붙게 됐습니까?

이: 원래 어려서부터 기독교신앙을 가지신 분이긴 한데 우리가 그냥 전도사라고 불렀고 한동안 그게 입에 배어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렇다고 ‘브로커’ 씨라고 부를 수는 없죠. 현지에서는 ‘전도사님, ‘사장님’이라고 부릅니다.

전: 그러니까 천기원 목사가 파견한 전도사는 아니군요?

이: 여러 한국교회와 연결이 되어서 북한에 성경책을 넣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한국교회 입장에서는 전도사이죠. 그리고 브로커가 아니면 조-중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없지 않겠습니까? 아주 유능한 브로커가 아니면 그런 일 할 수 없습니다. 아까 언급한대로 브로커 일은 여러 가지로 혼재돼있다는 말이 이런 뜻입니다.

//영화 사운드//

전: 중국 내 탈북자 얘기를 가장 많이 하셨지만 제가 어떤면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러시아 시베리아 벌목공들의 벌목소 탈출 얘기입니다. 실제 벌목소에 잠입해서 벌목공과 숙소를 취재한 영상을 봤는데요, 지금도 러시아에는 벌목소를 탈출한 벌목공이 5천명에서 1만여명이나 된다고 하죠?
벌목공이 탈출하는 주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대한민국에서도 7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에 건축 노동자로 가는 게 가장 인기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북한에서도 러시아나 중동에 벌목공이나 건축노동자로 나가는 게 상당히 인기있는 직업입니다.

전: 벌이가 좋은 모양이죠? 얼마나 법니까?

이: 정확한 것은 기억 안나지만 북한에서 버는 것 보단 훨씬 많습니다.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 시험치고 경쟁을 뚫어서 벌목공이나 건축공이 된다고 하거든요.

전: 말이 벌목공이지 상당히 고학력자들이네요?

이: 네. 엘리트들이죠.

북한 경제가 어려워지니까 북한정부는 러시아에서 임금을 받은 뒤에 노동자들에게 돈으로 주지 않고 돈표라는 걸 줬습니다. 그러니 실제로는 화폐(외화)를 못 받는거죠. 벌목공들은 정부의 행태에 배신감이 커지니까 벌목소를 탈출하는 겁니다. 러시아에서는 벌목공일 말고 막노동을 해도 그만큼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 돈을 벌어 북에 있는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겠다는 것이죠. 러시아에도 북한과의 접경지대로 가면 국경을 넘나들면서 돈을 전해주는 브로커들이 있습니다. 그 일을 하겠다고 벌목소를 나오는 분들이 탈북자가 되는 거죠.

전: 벌목소를 탈출하면 불법체류자가 되는 것인데요, 신변도 위험하고.

이: 중국도 그렇고 러시아도 그렇고 어느 나라 난민도 마찬가지이지만, 정상적으로 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삶이란 게 굉장히 끈질겨서 잘 살더군요. 그분들도 거의 매일 러시아 경찰을 피해 숨어다니면서 아르바이트로 막노동을 하고.

전: 결국, 쫓겨다니는 신세는 중국이나 마찬가지군요.

이: 똑같죠.

전: 그런데 탈출 후 성공 사례로 한만수 씨 얘기를 소개하셨던데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이: 한만수씨 얘기는 최근의 일도 있어서 설명을 하자면,

만수 형님은 벌목공 출신으로 미국 망명에 성공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굉장히 유머러스하고 똑똑하고 용기있는 분입니다. 실제 미국 망명이 허락된 분이지만 결국 미국 정착에 실패해서 최근에 한국에 들어왔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가슴 아픈 게 이겁니다. 미국을 선택한 이유는 [한국에서는] 같은 동포들에게 차별을 많이 받는다는 얘길 들었고 그렇다면 가장 강대국에 들어가 시민이 되고 싶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늦으막에 그 나라 언어를 배우고 문화에 적응한다는 게 어렵잖습니까?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구요. 그 후로는 저와 연락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전: 그분은 아직 북한에 가족이 있습니까?

이: 네. 있습니다.

전: 가족과는 아직 상봉을 못했겠네요?

이: 연락은 하고 계신 것 같아요.

전: 근데 벌목공 실패 사례도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러시아 여자와 결혼을 4번했다는 이민태씨란 사람. 그분 얘기는 희극이자 비극같기도 합니다.

이: 러시아에서는 숨어사는 가장 좋은 방법이 현지 여자와 동거해서 여자의 집에 숨어 지내는 겁니다.

전: 물론 신분이 바뀌는 건 아닌텔데요.

이: 바뀔 수가 없죠.

전: 현지인과 결혼하면 영주권 같은 게 안 나오는 모양이죠?

이: 불법체류자의 경우는 그런 게 안 나옵니다. 이분은 한국이나 제3국으로 탈출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러시아 여자 치마폭에 숨어서 사는 게 훨씬 낫다라고 생각하고 [탈출] 포기하신 분이죠.

전: 아예 체념하고 러시아 여자 수중에 있으면서 안전함을 택하겠다는 결정이군요.

이: 네. 하지만 저는 그게 이해가 됐던 게 또 한 번 탈출을 시도하려면 다시 목숨을 걸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모험을 할 바에는 차라리 그렇게 살겠다는 마음이 자리 잡은 모양입니다.

//영화 사운드//

전: 책 마지막 부분에 소개된 탈북자 대학생 김영미. 제가 김영미의 얘기를 주의깊게 읽었던 이유는 이 기자께서 4년이나 따라다니며 그의 역정을 직접 보고 체험하고 글로 적으셨기 때문인데요, 어떻게 보면 김영미의 얘기는 탈북자들의 현실과 이상을 보여주는 전형 혹은 상징으로 마음에 와 닿던데요.

이: 영미씨는 중국에서 탈북자들이 숨어있는 쉘터, 피난소에서 리더급이었습니다.

전: 거기에서 지도력이 있었던 모양이죠?

이: 네. 똑똑하고 책임감이 강하죠. 언니 가족과 본인이 거기 나와 있었는데, 탈출비용이 한 명 분 뿐이었습니다. 그 돈으로 영미가 탈출했는데 탈출 직후에 그 쉘터가 중국 공안에 발각이 되어 언니 가족은 모두 북송됐습니다. 그리고 그 언니는 가장 엄격한 정치범수용소에 들어갔습니다. 영미는 탈출 후 미국으로 가려고 했지만 언니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국에 남았습니다.
한국 대학교에 입학하고 한국사회에 적응하려 했지만 자기 때문에 언니와 형부와 조카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고 생각해 괴로와 하는 거죠. 그러니까 몸은 서울에 있는데 마음은 계속 북한에 있고.
또 북한에 있는 숙모가 계속 돈을 부쳐달라고 해요. 돈 부치기는 쉽습니다. 한국에서 계좌 이체를 하면 중국과 북한 국경에 사는 브로커가 직접 받습니다. 그 사람은 수수료를 떼고 북한 내부에 그 돈을 넣어 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통해 북한에서 가족을 빼오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죠. 남한사회 적응보다 우선해서요. 또 적응 노력을 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남한사회의 차별 때문에 굳이 남한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보다는 북한에서 가족을 빼와 함께 다시 살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 몇 년 노력하긴 했지만 결국 북한 가족을 빼오지 못했고 본인도 남한 정착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도움을 받아 뉴질랜드로 갔습니다. 오히려 거기에서는 굉장히 자유로왔다고 하더군요.

전: 뉴질랜드도 영어를 하는 나라죠?

이: 그렇죠.

전: 영어도 배웠겠네요.

이: 네. 이친구는 아주 빠르게 언어를 배우더라구요.

전: 그리고 다시 서울에 돌아왔겠네요?

이: 네. 학업을 계속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 이 기자께서 쓰신 걸 보면 영미는 미국에 유학 가 공부해 탈북자 인권을 위해 일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던데.

이: 네.

전: 이기자께서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목숨 걸로 찾아온 한국. 배고픔과 독재에서 벗어나 풍요와 자유를 맛본 사람들. 하지만 같은 동포인 이들에게 한국사회가 무심한 까닭은 무엇일까? 자문하지만 해답을 모르겠다.’ 왜 한국인들은 한국에 온 북한동포들에게 무심할까요?

이: 대한민국이 짧은 기간에 경제성장을 이루고 어쩌면 문화적으로도 빠르게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픈 구석을 돌아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전: 과거의 지겨웠던 힘든 시절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탈북자들이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건가요?

이: 그렇죠. 그리고 북한사람들이 내려와 남한사회에 섞여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데 대해 불편함을 갖는다고나 할까요? 이건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취재를 하기 전까지는 저도 탈북자들을 색안경을 끼고 봤었고 굳이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고요.

전: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북에서 온 동포들이 실제 같은 피를 나눈 한민족 동포라는 민족적 동질성을 남한사회가 진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이: 네.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통일 될 때를 생각하면 너무 준비가 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됩니다. 대한민국이 OECD 국가가 됐고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지만 우리는 아직 세계 난민들에 대해 관심을 못가지고 있습니다. 도움의 손길도 많이 못 내밀고 있습니다. 내 동포 난민이 탈북자들인데 그들에게 조차도 우리가 관심을 못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요?

전: 한국사회가 탈북자에 대해 '냉랭하다, 무관심하다'란 말씀하셨지만 또 실제 탈북자 구출의 핵심세력으로 기독교 활동가들, 예를 들어 천기원 목사나 김성은 목사 같은 분들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게 아닐 텐데 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활동을 합니까?

이: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천주교 등 많은 성직자들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천기원 목사가 대표적이라고 할텐데요, 비판과 칭찬의 중간에 서 계신 것 같습니다. 브로커란 말도 많이 듣고 탈북자들에게 강압해 나쁜일을 저질렀다는 소문도 많고. 하지만 저는 기자니까 본 것만 얘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본 활동가들은 정말 가진 것 없이 모든 걸 다 바쳐 일을 하고 있었고, 일반인인 저로서는 왜 그분들이 모든 걸 포기하면서 그런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아마 저희 청취자들도 이해가 잘 안 될 겁니다. 돈도 안 받고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이: 근데 제가 딱 하나 이해 하는 건 있습니다. 이분들이 자유를 찾는 걸 보는 순간, 그만한 쾌감이 없거든요. 헌신해서 어떤 새로운 삶을 가져다 준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죠. 저도 5년 동안 취재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어떤 그런 쾌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절망적인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는 순간에 바뀌는 그 얼굴모습을 보면서 '내가 기자가 되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습니다.
그 성직자들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난민을 구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전: 생명을 구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기쁨이 되겠죠?

이: 그럼요.

RFA 초대석, 오늘은 자유를 찾아 중국 동남아 러시아 한국 등으로 도강, 월경, 해상탈출하는 탈북자들과 5년동안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며 이를 다큐멘터리-기록영화로 만들고
또 최근에는 책으로 펴낸 이학준 감독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