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35] '희망을 위한 납북자구조 센터' 아사노 이즈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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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의 민간 단체 '희망을 위한 납북자구조 센터'를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1974년 2월, 일본 니카다 현 사도섬. 토지측량사로 사도섬에 파견 근무 중이던 27살의 공무원 오사와 다카시 씨가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헤어진 후 흔적도 없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가족들은 해안가 주변을 다 뒤졌지만 그는 오간 데 없었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겁니다.

다카시 씨의 사촌 동생 아사노 이즈미 씨는 납치된 형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지만 진전사항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다 미국으로 간 게 1984년. 새로운 땅에서 회계사로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사촌 형의 존재는 서서히 잊혀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증발해 버린 13세 일본인 소녀의 사연을 화면에 담은 기록 영화 "납치: 요코다 메구미 이야기"를 보고 눈물을 계속 흘리며 오래 묻어놨던 슬픔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북한에 납치된 딸을 찾으려 29년간 고통의 세월을 보낸 메구미 양의 부모를 통해 북한의 납치 행위를 고발한 영화는 무엇보다 아사노 가족의 이야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사노 씨의 가슴을 더 아프게 만든 점은 일본인도 아닌 캐나다인이 메구미 양의 이야기에 큰 충격을 받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 사연을 영화로 만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2005년의 일이었습니다.


아사노 이즈미

: I have been away from Japan, I didn't know what to do and...

(더빙)

일본을 오래 떠나 있었습니다. 사촌 형의 납치 건과 관련해 미국에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영화를 보고 깨달았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가 꼭 일본에 살아야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을요. 그리고 이 일이 비단 일본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도 깨달았습니다. 내가 어디에 살던, 어느 나라 사람이던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간답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고, 이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인간이라면 싸워야한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를 깨달은 뒤에 납북자의 생사를 확인하고 생존한 납북자를 송환시키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2005년 설립한 인권 단체가 바로 ‘희망을 위한 납북자구조 센터’입니다. 북한정부가 일본의 메구미 양을 비롯한 수많은 납북자를 조건 없이 송환해 가족이 다 모일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굳이 ‘희망’이란 단어를 단체명에 집어넣었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아사노 씨는 우선 베일에 가려져 있던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를 국제적 문제로 크게 부각시키는데 주력했습니다. 2006년 4월에는 미국 백악관 앞에서 음악회를 열어, 일본인 납북자들의 명단을 공개하고, 같은 달에는 메구미 양의 어머니 요코타 사키에 씨가 미국 하원 청문회에 참석해 증언하도록 했습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이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기는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매년 봄에 워싱턴에서 열리는 ‘북한자유주간’에도 적극적으로 참석했습니다. 그 결과,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 중국, 레바논, 말레이시아, 태국 등 11개 국가에서 수많은 사람이 북한에 납치됐다는 사실이 해외 언론의 집중적인 조명을 받기에 이릅니다.

이듬해인 2007년 9월초에는 나흘간 하루 24시간씩 쉬지 않고 전 세계 8만 3천여 명의 ‘납북자 이름 부르기’행사를 기획해 주요 언론과 많은 미국인의 뜨거운 관심을 끌어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자유아시아방송이 현장에서 취재한 현장음을 잠시 들어보시죠.

(백악관 앞 납북자 이름 부르기 행사)

아사노 씨는 이 행사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와서 기쁘지만 일본인 납치 문제는 해결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고 토로합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17명을 북한에 의한 납치 피해자로 인정하고 이 가운데 5명은 귀국했고, 납치 가능성이 있는 실종자가 다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북한 정부는 북한이 납치한 일본인 피해자 수는 13명에 불과하고, 이 가운데 8명은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사노 씨는 양측 모두 납치자 피해 상황을 축소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아사노 이즈미

: I guess it's more than 500 in my personal opinion. But sometimes I hear the Japanese police thinks it's more than 1,000...

(더빙)

제가 알기에는 500명이 넘습니다. 일본 경찰도 납치 피해자가 1,000명 이상이라고 가끔 말합니다. 일본 정부와 북한 정부 모두 그 피해자 수를 20명 미만으로 보고 있는데요, 저는 이 공식 피해자 수치의 진실성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1959년 말부터 84년 사이에 10만 명에 가까운 재일 한국인이 북송됐습니다. 이들은 속아서 북한에 간 사람들입니다. 그야말로 납치된 셈입니다. 이들을 앞으로 납치자 수에 포함시켜야 합니다.

최근 드러난 바에 따르면, 조총련,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은 일본 중앙과 각 지역에 귀국을 유도하는 전담부서를 설치하고 북한으로 귀국하면 집과 자동차, 직업과 교육 모두 무료로 제공한다고 선전했습니다. 게다가 북한은 적십자사를 통해 1959년 8월 13일 일본과 “재일교포 북송 협정”을 맺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북송 재일 한국인의 수가 거의 10만 여명에 이릅니다.

대다수 북송 재일 한국인은 그러나 북한에서 감시와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2008년 11월 일본에서 출간된 ‘북조선 귀국사업’에 따르면, 대다수 북송 재일한국인은 북한에서 전쟁 중 한국으로 간 사람의 가족, 반혁명집단의 구성원과 가족, 전쟁포로, 중소상인, 성직자와 함께 신용할 수 없는 계층으로 분류돼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아사노 씨는 올해 북송된 재일 한국인의 이름을 일일이 호명하는 행사를 가질 계획이었습니다. 한국을 포함한 국제사회에서는 이 한국인들이 자신의 의지로 북한을 선택했다고 생각하지만, 북한과 조총련의 사기에 무려 10만 명이 속아 넘어간 납치, 유괴 사건임을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암초에 걸려 앞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명단을 가진 일본 정부가 공개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아사노 씨는 하지만 여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희망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희망을 위한 납북자구조 센터‘는 다시 일본 정부의 문을 두드리는 일을 포함해 납북자를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미국에 있는 민간 인권단체인 ‘희망을 위한 납북자구조 센터’의 아사노 이즈미 대표를 찾아가봤습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