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65]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탈북자 단체들이 하나로 뭉쳐 통일 준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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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을 만나봅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

중국과 북한의 접경지인 투먼의 두만강 변에서 북한 땅 신의주를 바라보는 탈북 청년 안찬일 씨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강변에 털썩 주저앉아 망연자실한 시선으로 북한 땅 허공을 응시하는 안 씨의 시선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습니다. 그게 벌써 20년 전의 일입니다. 안 씨는 그렇게 13년 전 떠나온 강 너머 고향 신의주를 눈앞에 두고 노래로 향수를 달래면서 돌아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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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RFA PHOTO)

사실 안찬일 씨는 북한군 민경대대 부소대장 상사였습니다. 25살의 젊은 나이에 노동당원 신분일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제대 후 가장 끗발이 좋은 군관학교인 김일성 정치대학에 지원했지만, 노동당은 안 씨를 일반 사회대인 김일성종합대에 배정했습니다. 안 씨는 능력에 따라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당의 정책이 실행되지 않는 것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안 씨는 며칠 뒤 북한을 떠났습니다. 1979년 7월 27일이었습니다.

안찬일

: 제가 휴전선을 넘어서 한국으로 탈출함으로서 북한에 있던 제 아버지와 동생들이 모두 요덕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갔습니다. 요덕수용소로 끌려간 뒤 아버지와 동생들이 모두 죽은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자식 하나 때문에 수용소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 오빠를 저주하며 울부짖었을 여동생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났지만, 안 씨는 이를 악물고 잘 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국 정부는 그런 안 씨에게 살 집과 함께 현대건설에서 일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1981년 입사하던 날 당시 젊은 사장이던 이명박 한국 대통령은 안 씨를 불렀습니다.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이 사장의 질문에 안 씨는 ‘기회가 되면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이 사장은 ‘기왕이면 내가 나온 고려대에 가라’고 추천했고, 안 씨는 3년 뒤 특례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공부로 지금은 ‘탈북자 1호 박사’가 돼 북한 인권을 위해 정열을 쏟고 있습니다.


안찬일

: 뭐 제 혈족들이 탄압을 받고 인권침해자가 되서가 아니라,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북한 주민들, 15만 명 이상이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고, 이것은 전 세계가 분노하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저 역시 인권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탈북자들이 한국으로 입국하기까지의 과정, 즉 중국, 몽골, 캄보디아에서 상당히 인권침해를 많이 받는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저는 한국정부나 국제기구에 많은 항의를 전달했습니다.

많은 선진국에서 북한의 인권 개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오히려 한국에서 오랫동안 북한 인권에 대해서 소홀히 해 온 점에 늘 마음이 불편하던 안 씨. 집권당인 한나라당이 2010년 말 ‘북한인권과 탈북자/납북자인권위원회’를 구성하자, 만사를 제치고 뛰어들었습니다.


안찬일

: 탈북자로서는 최초로 당직을 맡은 셈이었죠. 그것도 북한인권과 탈북자 문제 담당 부위원장이기때문에 그 일을 맡은 직후에 탈북자들의 여론수렴과 탈북자들의 인권침해에 대해서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또 이번 태국 출장길에서도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을 통해서 탈북자의 인권문제를 특별히 신경써달라고 태국주재 한국대사관과 난민고등판무관실에 직접 주문했습니다.

안 씨는 지난 여름부터는 한층 더 바빠졌습니다. 북한 문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세계북한연구센터’를 연겁니다. 탈북자 출신의 학자 주도로 한국 내에 북한연구소가 만들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연구센터에서는 북한의 정치체제 전환과 경제적 개혁·개방의 방향을 모색하고 남북의 사회통합 방안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안 씨는 기존의 북한 연구가 북한에서 생활한 경험이 전혀 없는 한국의 학자들이나 외국 학자들이 자국의 이해관계에 맞춰, 북한 당국이 체제선전을 위해 발행하는 매체나 서적들에 기초해 진행된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북한 연구의 공백을 메우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연구를 하다 보니, 안 씨는 탈북자들이 북한과 통일과 관련한 지식을 쌓아 북한이 민주화된 이후 대안세력이 될 필요를 강하게 느꼈습니다. 2만 명을 훌쩍 넘는 탈북자 가운데 2천, 3천 명의 지식인들이 모여 통일 지식역량을 쌓으면 통일 한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분산된 탈북자 사회가 하나로 뭉치는 일이 시급했습니다. 그 결과, 결성된 단체가 바로 ‘세계북한인총연맹’입니다.


안찬일

: 지금 ‘세계북한인총연맹’이 탈북자의 국제조직으로서 국제사회에 분포된 15만 명의 탈북자를 대표하는 기구를 작년에 출범시켰습니다. 이 기구가 할 수 있는 일은 중국에 분포돼있는 7만-9만 명의 탈북자의 인권문제를 중국 정부에 항의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유엔사무총장이나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편지를 발송하는 문제, 또 서울에 있는 중앙대학교에 탈북지도자 아카데미를 개설하는 것입니다. 현재 약 1,000명의 탈북자 학생들이 한국과 세계 여러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 청년학생들을 인권 문제, 북한의 재건문제, 통일의 일꾼으로 교육시키는 아카데미를 통해서 탈북 청년학생들을 통일의 대안세력으로 준비하는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라면 현재 탈북자 사회가 친한 사람끼리, 하나원 기수끼리, 지역별로 파벌이 형성되 있어, 탈북자 단체도 단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를 위해 안 씨가 소장으로 뛰는 ‘세계북한인총연맹’은 탈북자 단체들이 하나로 뭉쳐 통일되는 과정에서 대안세력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안 씨는 지난해 세상을 떠난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오랫동안 탈북자 사회에서 정신적인 지도자였지만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면서, 탈북자에 ‘탈’자만 들어간 단체들을 모두 찾아가 탈북자 단체들이 단결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앞으로 통일의 대안세력이 되기 위해 합심할 것을 설득해 나갈 것이라고 재차 강조했습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