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을 위해 뛴다-47] 이차희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

0:00 / 0:00

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차희 재미이산가족상봉추진위원회 사무총장을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

가족들의 흐느낌 소리 (아들) 저 아직 죽지 않았어요. (흐느낌) (내레이터) 86세의 오창근 씨는 북한에서 온 60세의 아들 석환 씨가 나타나자 아들의 어깨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재미이산가족상봉위원회 공동의장이며 사무총장직을 맡고 있는 이차희 씨. 사진은 이 씨가 2006년 2월 워싱턴에서 열린 '샘소리'의 발족식에 참석한 모습. '샘소리'는 미국에 거주하는 북한 출신 한인이 북한에 남겨둔 가족과 상봉하는 일을 돕는 비영리 단체. RFA PHOTO

1985년 9월 중순. 출근 준비를 서두르던 이차희 씨는 틀어 논 미국 방송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자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아들을 끌어안으면서 맺히고 막혔던 혈육의 정을 눈물로 달래는 화면의 노인을 보면서, 돌아가셨다 여기고 맘속에 깊이깊이 묻어놨던 아버지와 오빠를 떠올렸습니다.

이차희

: 저희 가족은 해방이 되자마자 만주에서 헤어졌습니다. 오빠 한분과 아버님이 일을 마무리한다고 머물고, 저희 6남매와 어머님이 먼저 고향인 대구로 내려온 게 그만 영원한 이산가족의 원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희가 만주를 떠나자 며칠 후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 닫혔습니다.

당시 46세였던 이 씨가 이국 만 리 미국 땅에서 이 보도를 접하면서 느낀 점은 단 하나. 출생지인 만주 돈화를 떠난 뒤 반세기 동안 연락이 끊긴 아버지와 오빠를 하루 속히 찾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모른 채 남한을 거쳐 미국에 정착해 살아온 자신의 삶이 허망하다는 회오에 갑자기 사로잡혔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차희

: 1988년에 만주 돈화로 혼자 들어갔습니다. 아버지 소식을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서 아버지가 1950년에 북한으로 가서 유명하게 됐다, 그 정도 알았습니다.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북한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가자마자 6.25가 터진 겁니다. 그래서 오빠가 인민군으로 가는 바람에 6.25때 그 수많은 피난민이 내려오는데 아버지가 내려오지 못하고 북한에 있다가 오빠가 전쟁이 끝나고 집에 오니까 그때는 또 38선이 막혀 갈려 버린 겁니다. 그것으로서 저희 가족이 함께 만나는 게 끝나버렸습니다. 아버님은 북한에서, 저희 어머니는 시카고에서 소식도 몰랐습니다.

20대 후반에 미국에 온 뒤, 공립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한인사회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던 이 씨. 자신이 '미국 시민'이지만 동시에 '한인 이산가족'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시카고 지역의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곤 또 놀랐습니다. 시카고 주변에 한인 이산가족이 의외로 많았던 겁니다. 힘을 모아야했습니다. 미국의 한인 이산가족 상봉은 이 씨 혼자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차희

: 2000년 3월에 마크 커크 의원을 찾아가서 미국에 한인 이산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당시 커크 의원은 입후보자였습니다. 커크 의원의 동생이 한국인 입양아고, 그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참전용사였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 사정을 잘 알아주겠다 싶었습니다. 제 가족 이야기를 하고 이산가족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커크 의원은 그해 11월에 당선됐는데요, 2001년 3월 커크 의원이 제게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제 가족의 사례를 들어 미국 하원에 이산가족이 있다는 점, 미국 시민 가운데 이산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하원에 보고한 겁니다. 그것이 미국 정계에 처음으로 이산가족을 알린 때였습니다.

막혔던 하수구 뚫리듯 일은 풀려가기 시작했습니다. 2001년 9월 말, 커크의원이 미국 정부에 이산가족 실상을 알릴 수 있도록 콜린 파월 국무부 장관과 면담하는 자리를 마련해 준 일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이후 미국 하원은 2001년 11월에, 미국 상원은 2002년 2월에 각각 재미 한인의 이산가족 상봉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이 뜻밖의 소식에 미국에 사는 이산가족들은 크나 큰 기대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2002년 10월, 북한의 핵 프로그램 시인으로 제2차 북한 핵 위기가 발생하면서 이산가족 문제는 흐지부지 지나가벼렸습니다. 이 씨는 발을 동동 굴렀지만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차희

: 2007년 9월에 Congressional Commission을 구성했습니다. 일종의 준비작업이었습니다. 하원에 가서 부결되리라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부결됐습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한 Congressional Commission을 구성했습니다. 그 결과, 그 해 10월 3일에 상원에서 법이 통과됐고, 하원에 갔다 부결된 것이 12월 22일에 통과됐습니다. 2008년도 1월 28일에 부시대통령이 서명했습니다.

이 씨가 언급한 'Congressional Commission'이란 미국 의회 내에 만들어진 '한인 이산가족위원회’를 말합니다. 이 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원 덕에, 정식 법률로 효력을 발휘하게 된 법 'HR 1585'에는 한인 시민권자와 북한 내 이산가족의 상봉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대통령이 이산가족 상봉을 위해 바람직하거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방안 등을 보고서에 포함토록 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 북한 간 관계가 정상화돼 평양에 미국 대사관이 설치될 경우, 한인과 북한 이산가족의 상봉을 돕기 위한 계획도 보고토록 했습니다.

이차희

: 그런데 그 법안은 미국 상원과 하원이 미국 대통령에게 180일간의 시간을 줄 테니 그동안 북한과 협상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고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간 만료가 7월 28일이었습니다. 그런데 11월에 가서 부시대통령이 상하원에 보고를 하고 임기를 끝마치는데, 그 보고 내용이 6자회담과 핵문제가 걸려서 이산가족을 추진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10월에 '재미이산가족 상봉추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위원회가 2009년 2월에 커크의원을 만났고, 커크 의원이 각고의 준비 끝에 2009년도 7월에 하원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상원을 거쳐 12월 16일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했습니다.

이전 법과 달리, 이번 법은 시한이 없고 대통령에게 요청하지 않고, 국무부 내 고위 관리인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한인 이산가족 문제를 우선해 처리하도록 명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필요하면 한인 이산가족 문제를 다룰 조정관을 임명해 국무부가 재량권을 갖고 미국 내 한인이 북한에 있는 이산가족을 만나는 문제를 추진해 나가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뜻을 모아서 강한 의지를 갖고 나아가 진전을 이루니, 고무적이지 않느냐는 질문에 힘없이 고개를 저을 뿐입니다.

이차희

: 아... (큰 한숨). 문제는 지금 거의 다 돌아가셨다는 데 있습니다. 제가 알던 분이 거의 다 돌아가셨습니다. 살아계신 분들도 젊은층이 70세 후반기고, 80대, 90대인데요 이분들도 건강상의 이유로 장거리 여행이 불가능합니다. 재미 이산가족이 십만 명이 되지 않습니다. 만 명도 되지 않습니다. 몇 천 명도 되지 않아요, 지금. 그렇게 사태가 악화되있습니다. 2000년만 해도, 불과 10년 전인데 지난 10년은 우리 이산가족에게 너무 잔인한 해였습니다.

이 씨의 나이 올해 71세. 연로한 이산가족들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이 마저 마르기 전에 반백년 한을 다 쏟아낼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이 씨는 다시금 희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