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 내 민간 연구단체인 허드슨연구소의 마이클 호로위츠 선임연구원을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워싱턴 중심가인 15가 건물의 6층에 자리 잡은 허드슨연구소 사무실. 마이클 호로위츠 선임연구원은 2003년 6월 어느 날 아침 일찍 출근해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수단 정부의 기독교인 탄압에 관한 보고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내가 전화한 것은 그때였습니다. 근무시간에는 좀처럼 전화하지 않는 아내였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었습니다.
Michael Horowitz
: Michael, you must listen to this. You've got to get to know this man...
(더빙) '여보, 방금 북한을 다녀온 독일의 한 의사가 방금 라디오에 나왔어요. 당신 이 사람 하는 말을 꼭 들어야 해요. 북한의 인권 상황이 너무 끔찍해요. 당신이 한번 북한 문제를 짚어봐야 해요.' 그러는 거예요. 당장 아내가 들으라는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다음날 출근했더니, 라디오에 나왔던 노르베르트 폴러첸 박사가 허드슨연구소를 방문해 북한의 실정을 생생히 알려주었습니다.
호로위츠 연구원이 폴러첸 박사의 이름을 접한 것은 사실 몇 달 전이었습니다. 2002년 5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북한에서 의료 활동을 벌이다 추방당한 독일인 의사, 폴러첸 박사를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호로위츠 연구원이 폴러첸 박사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대화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호로위츠 연구원은 그날 자신이 연구소 내 시민정의 개혁 업무와 국제종교자유 업무를 총괄하는 국장으로 일하는 게 "바로 이때를 위함이 아닌가?"하는 질문이 불현듯 떠올랐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명문 예일대 법대를 졸업한 이래, 미시시피대학교와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법학교수로 근무했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에서 백악관 예산관리국의 법률고문과 국내정책자문위원회 의장을 역임한데다, 동유럽, 캄보디아, 그리고 베트남 인권단체의 고문으로 일하는 등 다채로운 경력 덕에 법조계, 정부, 학계, 시민 단체에 광범위하고 탄탄한 인맥을 구축하게 된 점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 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폴러첸 박사를 폴 월포비츠 전 국방부 부장관과 면담하게 하고, 미국 내 인권단체들과 연대를 모색해, '북한자유연대'라는 전국적인 조직을 만드는 데 산파 역할을 하는가 하면, 북한인권법과 북한의 자유화를 목표로 하는 '북한자유법안'의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2004년에는 미국 관가와 상-하원 의원들에게 널리 배포된 '미국의 대북정책: 수단과 인식'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2005년에는 탈북자 6명이 난민 지위를 받아 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입국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호로위츠 연구원은 미국에서 북한 인권과 관련한 주요 활동을 논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전문가로 자주 꼽힙니다. 그런 호로위츠 연구원에게 지난 7년간의 활동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성과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전혀 예상하지 않던 대답을 내놓습니다.
Michael Horowitz
: The one issue I feel the greatest failure of my life is on the issue of North Korean human rights...
(더빙) 북한 인권 문제는 제 인생 최대 실패작입니다. 맞습니다, 북한인권법이 통과되는데 제가 기여했습니다. 그리고 이 법을 바탕으로 탈북자가 미국에 입국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고작 100명도 안 되는 탈북자가 미국에 들어온 것을 갖고 감히 '성과'라고 말합니까? 구소련의 공산주의와 남아프리카의 인종차별 정책이 무너졌듯이, 지금쯤은 이미 북한의 악독한 정권이 무너져 있어야 하는 게 정상입니다.
2004년 북한인권법이 통과한 직후 "북한이 1년 안에 스스로 붕괴하고, 김정일은 내년 크리스마스를 즐기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의 호언장담이 현실화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크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호로위츠 연구원은 실패의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는 걸까? '시체와 사랑하고 있다'는 표현까지 사용해 논란을 일으키면서까지 호로위츠 연구원이 신랄하게 비판했던 노무현 전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일까? 아니면 '수십억 달러를 지원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노력'인 6자회담에 쓸데없이 매달린다고 호로위츠 연구원이 누누이 불만을 표출했던 미국 정부의 자세일까?
Michael Horowitz
: Why have we failed so badly? I believe I now understand the answer.
(더빙) 왜 이렇게 참담하게 실패했을까? 저는 그 이유를 최근에야 깨달았습니다. 책임은 재미 한인사회에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북한에 자유가 흐르게 하려면 미국이나 한국의 대북정책이 바뀌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외부가 아니라 미국 내 한인사회 안에서 나와야 했던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수백 세대가 넘도록 산 토종 미국인처럼 보이죠? 아닙니다. 제 아버지는 폴란드에서 태어난 유대인입니다. 미국은 1990년대 약 20만 명의 구소련 출신 유대인을 받아들였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미국 내 유대인 사회가 동족이 겪고 있는 아픔을 극복하는데 미국 정부의 실질적이고 시급한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한인사회는 너무 조용하고, 너무 수동적이고, 너무 용기가 없었습니다.
호로위츠 연구원은 특히 한인사회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할 말이 많습니다. 한인 이민자의 교회 출석률이 80%에 이른다거나, 미국 내 아시아계 개신교 교회가 약 7천 개가량 있는데 이 중 4천 개가 한인 교회고, 한인교회가 한인 이민자의 친교와 교류의 중심지라는 조사 결과를 익히 잘 알고 있어섭니다. 1997년도 남부 침례교 잡지에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인 10인 중의 한 명으로 등재되기도 한 호로위츠 연구원은 한인교회의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에도 참석해 본 경험이 있어 한인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Michael Horowitz
: I am deeply respectful and more of churches and Christian character of so many Korean-Americans. But when they go to prayer vigils...
(더빙) 저는 재미한인의 기독교적 성품을 깊이 존경합니다. 하지만 소위 북한을 주제로 한 기도회에 가보면 "하나님, 북한 주민을 구출해주세요"라는 말만 되풀이해 너무 속상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회 지도자들에게 부탁했습니다. 기도 내용을 제발 바꾸라고요. "우리가 북한 돕는 일을 하게 해주세요"라고요. "당신들이 응당 해야 할 일을 하나님더러 대신해달라고 하지 말고, 재미 한인이 그 일을 할 힘과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라고요.
괜히 안절부절못하는 기자가 안 됐는지, 호로위츠 연구원은 회견 말미에 이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북한 인권을 위한 활동을 7년 넘게 하고도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했지만, 절망하는 대신 희망을 품겠다고 말입니다. 이어 자신은 앞으로 한인 종교지도자에게, 한인 사업가에게, 한인 학생에게 "경제적 성공만이 전부가 아니다," "영어 실력이 짧아도 괜찮다," "한인들이 뭉치면 미국 정부를 움직일 능력이 있다," "지금 나서지 않으면 후세대가 동족에게 무관심했던 당신들에게 손가락질할 것이다"라는 점을 깨닫게 하는 데 주력하리라고 다시금 결의를 다집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