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27] 국군포로송환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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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들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의 인권단체인 '국군포로송환위원회'를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KBS 조창호 씨 관련 보도: 군인들이 “충성”을 외치면서 전역식 시작됨)

1994년 11월 26일. 한국의 육군사관학교 연병장에는 각 군 사관학교 생도들과 연세대학교의 학군단, 수많은 장성이 참가한 가운데 ‘군번 212966’ 육군 중위 조창호 씨의 전역식이 열렸습니다. 이 날 분위기는 육군참모총장의 전역식보다도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연세대학교 1학년 때 열아홉의 나이로 육군 소위로 입대한 조 씨는 설악산지구 전투에서 포로가 돼 북한에서 참담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43년 동안이나 공산주의자들과의 긴 전투를 끝내고 마침내 기적처럼 조국의 품에 귀환한 조 씨. 그는 최초로 살아 돌아온 국군포로였습니다.

저 멀리 태평양 건너 미국의 서부 캘리포니아 주의 거실에서 조창호 씨의 전역식과 이어진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재미 한인 정용봉 박사의 가슴은 쿵 내려앉았습니다. 한국전쟁 중 육군 8사단 중대장으로 최전방에서 싸우다 왼쪽 다리가 다 부셔져 제대해야 했던 정 씨. 이민생활 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던 실종된 전우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습니다.

정용봉:

한국에서 나온 이후에, 군에서 하도 고생을 해서, 다시는 군 생활도 하기 싫고 해서, 미국에 와서는 한 5-6년 동안 학교에서 죽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느라 한국에 국군포로가 있는지 없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4년에 제가 텔레비전을 보니까 조창호라는 사람이 북한에서 도망 나왔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그 사람이 포로로 잡힐 당시에 소위였는데, 43년 만에 북한에서 도망 나온 겁니다. 조 씨가 북한에 아직 많은 국군포로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국군포로들에 대해서 관심을 두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제가 최전방에서 전투했을 때, 저의 많은 친구가 포로가 됐었습니다. 실종이 됐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이 포로가 된 것이죠.

조 씨의 증언 이후 한국 국방부가 확인한 숫자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포로 6만 명 가운데 생존한 포로만 547명. 이들의 송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정 박사는 재향군인회를 포함한 관련 단체들을 찾아가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수를 거쳐 개인사업을 하면서 캘리포니아 주의 나라은행 이사장으로 일하는 바쁜 일정에도 개인 재산을 털어 국군포로의 송환 문제에 매달렸습니다. ‘억세게 운이 좋아’ 부상을 당했고, 병원에 실려가 제대하는 바람에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부담이 너무나 컸기 때문입니다.

몇 년 동안 서울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여야정치인들을 만나 국군포로 문제를 호소했지만, 당시 한국 정부와 집권층은 북한을 의식해 국군포로 문제에 관여하기를 꺼렸습니다. 2000년 당시 한국 통일부 장관은 "포로 문제는 1953년 정전협정으로 일단락됐다"고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일단 국군포로가 아직도 북한에 생존해 억류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이상, 이 문제를 내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 박사가 2004년 9월에 만든 단체가 ‘국군포로송환위원회’입니다. 역사의 뒤안길에 완전히 묻혀버릴 뻔 한 국군포로 송환문제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단체의 출현이었습니다.

정용봉:

2005년 4월 22일에 미국 의회 건물에서 청문회를 열었어요. 같은 해 5월에 헨리 하이드 국제관계 위원장이 5월에 하원에서 북한의 인권문제에 관한 결의안을 발의해서 통과했습니다. 그 결의안 내에 국군포로 문제가 포함돼있습니다. 우선 일본의 납치자 문제가 인도적으로 묵인할 수 없는 문제라고 했고,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건너가다가 잡혀서 송환되는 문제를 지적하고, 제3항에 4월 22일 개최된 포럼을 거론하면서 “북한에 아직 국군포로가 억류돼 있다고 하는데 이게 말이 되느냐, 제네바 협정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인도주의 상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한 내용이 통과됐습니다.

2005년 4월 22일 미국 의사당에서 ‘한국전쟁 국군포로의 증언’이라는 주제로 개최한 청문회. 이 자리에는 정 박사가 초청한 탈북 국군포로 1호 조창호 씨가 미국 정계 사상 최초로 북한 내 국군 포로들의 참상을 전했습니다. 악명 높기로 소문난 만포 교화소, 아오지 특별수용소, 강계 교화소로 전전하면서 인간 이하의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체험한 조 씨. 그가 13년 만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할 때는 5백 명의 포로들 중 단 50명만이 살아남았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조 씨의 당시 증언 내용입니다.

조창호: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인간 살육의 현장을 고발하려고 합니다. 외부세계와는 엄격히 단절되었으며, 세상에 알려진 바는 거의 없는 상태였으며, 여기에는 깡통으로 만든 감방은 동물원과 흡사했습니다. 기생충과의 처절한 전쟁은 우리들의 일과였습니다. 13년 동안 한 번도 양치질을 못했더니 40세가 되는 해 이빨이 다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날 의회 증언에는 한국전쟁 참전 국가들의 대사들이 초청됐고, 과거 한국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혹은 주한미군에 복무했던 상하원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처절한 실화에 참석자들은 분노했습니다. 조창호 씨의 생생한 증언은 한 달 뒤 미국 하원 대북 결의안 제안, 이어 같은 해 7월 미국 의회 상하원에서 ‘북한의 납치행위 규탄과 국군포로, 그리고 납북자 석방을 위한 대북 결의안’이 통과되게끔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조창호 씨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한국에 돌아간 국군포로는 대략 80명. 아직도 북한에 살아남은 국군포로는 500명이 훌쩍 넘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청년이었던 국군포로들은 현재 대부분 70세, 80세를 넘어선 노인들이기에 이들이 스스로 노력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국가가 할 일이 아니라는 게 정 박사의 판단입니다. 다시 한국으로 날아가 당시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를 비롯해 여러 관련 인사를 접하면서 국군포로문제 법안 제정과 남북회담에서 국군포로문제를 논의해달라고 요청한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정 박사는 2006년에 국군포로 가족이 중국 선양에 있는 한국 총영사관이 주선한 민박집에 머물다 중국 공안에 적발돼 전원 북송되자, 이듬해 당시 노무현 한국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정용봉:

우리가 김정일을 전쟁범죄로 기소하려고 했더니, (법률 전문가들이) 사건 자체가 성립은 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김정일을 잡아오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처벌할 수가 없잖아요. 실효성이 없는 거죠. 돈도 많이 들고. 그래서 마지막 대안이 결국 유엔 측에 이야기해서 유엔에서 도와달라고 할 참입니다. 이번에 마침 또 천안함호 침몰사건이 생겼으니까 이것과 한꺼번에 묶어서 국군포로, 납치자 문제를 함께 유엔에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냐는 추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북한은 휴전협상과 정전회담에서처럼 여전히 '국군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반박합니다. 하지만 남쪽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국군포로들이 북한에 수백 명 살아있다는 것은 이제는 엄연한 사실. 국군포로송환위원회가 냉전의 희생자이면서 구석으로 밀려버린 국군포로의 슬픔을 가시기 위해 오늘도 서울, 워싱턴, 뉴욕, 제네바를 오가며 분주히 활동하는 까닭입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