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29] 데이비드 호크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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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그리고 유럽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들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국제적인 인권활동가인 데이비드 호크 씨를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소위 '아이비리그'라 일컬어지는 동부의 사립명문대학 가운데 하나인 코넬대에서 정치학 전공의 우등생이었던 한 백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남학생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선 전쟁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을 굳게 믿었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1960년대 흑백 차별이 당연시되던 미국 사회에 흑인의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운동에 뛰어들었고, 이어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데이비드 호크 씨는 자신의 믿음을 하나하나 실천적으로 전개해 나갔습니다. 이런 그가 아이비리그 학위로 갈 수 있는 고소득 직장을 다 마다하고 비영리 인권 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미국 지부장으로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국제적인 조직망을 가진 이 단체에서 일하다 보니 아시아 국가, 특히 캄보디아의 심각한 인권 침해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특히 1975년부터 1979년에 캄보디아를 장악했던 크메르루주 정권의 인권 침해는 도저히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을 수 없었기에, 호크 씨는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캄보디아 문서위원회를 창립하고 대표로 뛰고,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과 협력해 최초로 대학살 당시의 수감자 처형사진과 관련된 여러 문서를 출판한 것도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렇게 크메르루주 정권과 관련한 인권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데 탁월한 역할을 한 호크 씨에게 2002년 당시 미국의 신생 인권 단체였던 북한인권위원회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조사 작업을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왔습니다.

David Hawk: I surely was because I remember back in the 1970s and 1980s when we were working on human rights issue of South Korea, we figured that North Korea's... (더빙) 물론 관심 있다고 답했습니다. 제가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나 국제적인 인권감시 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에서 일했던 1970년대와 1980년대에 한국의 인권 상황을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북한의 인권 상황은 한국보다 더 나쁘겠구나”라고 막연히 생각만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한국은 당시 군사독재정권임에도 독재를 반대하는 학생 단체나 교회 단체가 있었고, 당국에 체포된 사람이 누군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전혀 그렇지 않았거든요.

당시까지 인권 단체들이 북한과 관련한 정보를 확보하는 데 당면했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입니다. 1998년까지만 해도 모두 947명에 그쳤던 한국 내 탈북자 수는 2002년 1천명을 넘어서면서 바야흐로 급증세로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호크 씨는 2002년 8월과 11월, 그리고 2003년 2월 세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해, 북한의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었거나 경비원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50여명을 만나 일련의 심층 면담을 진행했습니다.

David Hawk: What I was able to do was to write this report that was published in 2004... (더빙) 2004년에 출판된 보고서 ‘감춰진 수용소’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기초로 관리소, 교화소, 집결소, 노동단련대 등 북한의 다양한 수용소 형태를 영어로 재정의 했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영어권에서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언어와 내용전달의 한계로 그 의미가 생생하게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강제 송환된 북한주민을 심문하고 처벌하는 데 사용되는 구금시설이나 형벌, 노동시설, 강제노동소가 웬만하면 거의 다 ‘정치범 수용소’로 번역됐습니다. 당연히 인권 침해 당사자들이 (해외에서) 증언을 거듭해도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관리소’란 단어를 직역하면 ‘통제 및 관리장소’이지만 실제 의미는 ‘정치적인 형벌-노동 집단수용소’라는 것을 처음으로 설명한 겁니다. 또 ‘교화소’란 ‘재교육을 통해 좋은 사람을 만드는 장소’가 아니라 ‘장기 수감 노동수용소’로 번역해 의미를 정확히 전달했습니다.

이를 넘어서는 보고서 ‘감춰진 수용소’의 또 다른 공헌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찍은 위성사진을 제시해 수용소의 존재를 실물로 확인시킨 일입니다. 북한정부가 ‘북한엔 정치범 수용소가 없다’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던 상황에서, 호크 씨는 북한의 상세 지도를 구해 정치범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에게 주소와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미국의 위성사진 공급회사인 디지털글로브 사와 스페이스 이미징 사로부터 사진을 입수했습니다. 이 사진을 토대로 탈북자들에게 확인해 ‘이 건물은 무엇, 저 건물은 무엇’ 이런 식으로 맞추는 작업을 거쳐 나온 결과물은 북한 당국을 크게 당황하게 했습니다.

David Hawk: But now satellite photos are much more better. In 2003-2004, there was no Google Earth. Now... (더빙) 보고서가 처음 출간된 지 6년이 지난 지금 위성사진의 기술이 훨씬 더 발달했습니다. 게다가 2003년-2004년에는 인터넷 위성사진인 구글 어스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전 세계인이 쉽게 이를 볼 수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초고해상도 위성사진을 보면서 수용소 내 수감자 숙소, 일터, 간수 숙소, 그리고 총살장 등 구석구석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습니다. 북한정권이 ‘정치범 수용소’가 없다고 여전히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한 당국이 아무리 수용소와 강제 노역장을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사실임을 일깨워준 호크 씨의 획기적인 보고서는 조만간 개정판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이번 개정판에는 보고서 준비 당시만 해도 3,000명대였던 한국 내 탈북자 수가 2만 명에 가까와, 면담한 탈북자 수도 훨씬 늘어났고, 고화질의 위성사진도 함께 수록될 예정입니다.

1990년대 초부터 탈북자들의 수기를 통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하고,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에 의해 심각한 인권 상황이 증언의 형식으로 전해졌지만, 탈북자의 증언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정치범 수용소가 없다’는 북한 정권의 입장을 어떻게 고려해야 할지 혼선을 거듭했던 서방세계에 해답을 던졌던 호크 씨.

보고서 초판에서 그가 북한 당국에 친절하게 던진 제안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이제 북한이 탈북자들의 주장과 진술을 반박하고 무력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유엔 관계자들, 유엔인권이사회의 대표, 아니면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이나 휴먼라이츠워치와 같이 널리 인정받는 비영리 단체들을 받아들여 현장을 확인해 탈북자들의 주장이 틀렸음을 입증하는 것뿐이다.” 50년이 가까운 인권 조사와 인권 운동을 펼쳐온 경력의 소유자인 호크 씨는 북한 당국이 이 제안을 속히 받아들이기를 오늘도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