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일본의 민간단체인 '북조선난민구원기금'의 카토 히로시 대표를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1959년 일본 중계방송 in Japanese) (더빙) 세계의 관심을 모은 북송선이 첫 출항합니다.
1959년 12월14일 일본 니가타 항구. 재일 한국인 2,900여 명이 찬바람을 헤치며 여객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가족, 친구들과 눈물의 작별이 이어졌고 여객선은 북한 청진항을 향해 물살을 갈랐습니다. 재일 한국인 북송사업이 첫 번째 닻을 올린 것입니다.
일본인 카토 히로시 씨도 항구에서 떠나는 친구가 하나의 점이 될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카토 씨의 고등학교 단짝 친구는 일본 사회의 차별과 냉대에 절망했었습니다. 가난도 북한행을 선택하게 한 동기였습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고, 1955년부터 1년여간 일본 정부는 재일 한국인 6만여 명의 생활보호급여를 삭감하거나 아예 지급을 취소했습니다.
(카토 히로시) So, I told him, "you should go to North Korea to construct a new Korea." It was because they have no hope for the future in Japan at that time...
(더빙) 제가 그 친구에게 권했어요. "너, 북한에 가서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라고"요. 왜냐면 당시 재일 한국인은 일본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최고 대학이라는 동경대학교를 졸업해도 취업할 수 없었습니다. 마침 북한 정부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가 '북한은 의식주가 무상으로 제공되는 지상낙원"이라는 선전을 했는데, 저는 고등학교 단짝이던 친구에게 차라리 북한행이 낫겠다고 말했고, 친구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1984년까지 모두 9만3339명의 재일 한국인과 그 일본인 가족이 북한으로 갔습니다.
친구가 그리워 몇 차례 편지도 썼지만 답장은 없었고, 끝내는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친구는 카토 씨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져 갔습니다. 그러다 북한에 간 친구가 문득 떠오른 것은 30년이란 세월이 지난 후, 동토의 땅 시베리아에서였습니다.
(카토 히로시) I was assigned to work in Moscow in 1990...
(더빙) 1990년에 모스크바에 가서 구소련의 개방과 개혁에 관한 특별 취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일본 언론사의 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시베리아의 북한 벌목공에 관한 기사도 쓰게 됐습니다. 취재를 마친 뒤 일본으로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현지에서 통역을 맡았던 한국인이 전화했습니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참을 수 없는 인권유린에 시달리는 북한 벌목공을 도와달라고요. 저는 기자였기에 그들을 도울 의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친구 얼굴이 떠오르더군요. 친구더러 북한에 가라고 권고한 저는 큰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카토 씨는 가족과 지인 등에게 부탁해 후원금을 모았고, 이 돈을 시베리아에 있는 한국인 통역인에게 보냈습니다. 얼마안가 또 연락이 왔습니다. 이제는 한 명이 아니라 5명이 안전하게 제3국으로 가게 도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모스크바에 유엔난민기구(UNHCR)가 있다는 점에 착안한 카토 씨는 자신이 취재하면서 알게 된 시베리아의 경찰서장에게 한 달 월급과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를 일주일간 여행할 수 있는 경비를 주는 조건으로 북한 벌목공 5명과 동행해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당시 러시아 정부의 부정부패로 몇 달째 월급을 받지 못했던 서장은 쾌히 승낙했습니다.
북한으로 간 친구에게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다는 소망으로 조그맣게 시작한 카토 씨의 인도적 활동은 1998년 25명의 자원봉사자와 함께 민간단체인 '북조선난민구원기금'을 설립하면서 가속도가 붙였습니다. 초기 기금은 자원 봉사자들이 주머니를 털어 모은 25,000엔, 미화 300달러가 전부였습니다.
(카토 히로시) Up to last year, we have saved almost 120 people in Japan who wished to come back to Japan and another 200 over in South Korea...
(더빙) 지난해 말 까지 저희 단체는 120명의 북한 내 일본인을 구출했습니다. 이들은 북송됐다 일본으로 돌아오기를 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탈북자 200명을 구출해 한국으로 가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특히 중국 내 탈북자들이 도와달라는 요청을 많이 해왔습니다. 수요는 많고 자금은 한정되어 있는 만큼, 누구를 긴급히 구출해야 할 지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일단 정해지면, 이들이 중국을 안전하게 빠져나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한국이나 일본으로 가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탈북자의 중국 탈출을 돕는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두 달에 한번 씩 중국에 가서 조선족에게 탈북자를 위해 식량과 옷을 구입할 돈을 전달하다보니, 중국 공안들의 그물에 걸리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결국 2002년 10월 탈북자 지원활동을 위해 중국에 입국했다가 대련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 일로 5년 이내 중국 입국이 금지됐지만, 카토 씨의 탈북자 지원활동은 계속됐습니다. 태국의 경찰서를 정규적으로 찾아 가서 임시로 구금된 탈북자를 위한 의약품, 담요 등의 구호물품을 전하는가 하면, 일본 정부 관계자를 만나 북한을 탈출해 일본에 귀국한 탈북자들에 대한 생활 지원을 끈질기게 요청했습니다. 또 일본 정부가 2006년 탈북자의 보호나 지원을 위한 일본의 노력을 명시한 '북한인권법'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합니다. 이 법에 따라, 일본은 지금까지 중국 내 탈북자 100여명의 망명을 허용해 일본에 입국시켰습니다.
카토 씨의 이런 활동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면서 2010년 미국 국무부가 수여하는 '자유 옹호자상'을 받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한 소시민과 그가 이끄는 작은 비영리단체가 수년에 걸쳐 중국 내 탈북자들을 도운 일이 탈북자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게 수상의 이유였습니다.
카토 씨는 그러나 아직도 오래 전 북한에 간 고등학교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카토 씨는 오늘도 중국 내 탈북자, 특히 전 재일 한국인이나 이들의 3촌 이내 가족 탈북자들을 구하기 위해 제3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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