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⑧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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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유럽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들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세계최대의 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mnesty International)'을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현장음: 영국 전철 안에서 창립자 피터 베넨슨 변호사가 회상하는 장면)


Peter Benenson: It was on the 19th of November, 1960. I was sitting on the tube reading newspaper Daily Telegraph...(더빙) 1960년 11월 19일었죠. 저는 그때 영국 전철 안에서 일간지인 텔레그래프를 읽고 있었는데요, 어느 기사가 제 눈에 확 꽂혔습니다. 포르투갈의 수도인 리스본의 한 술집에서 두 명의 대학생이 자유를 위해 건배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는 기사였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안토니우 살라자르가 철권독재를 휘두르던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접하고 나니 분개한 마음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영국의 피터 베넨슨 변호사. 그는 그로부터 정확히 6개월 뒤인 1961년 5월, 영국의 유력 주간지에 ‘잊혀진 수인들’이란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정부의 탄압으로 인권을 빼앗긴 사람들을 위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호소했습니다.

이 글을 본 수천 명의 호응으로 같은 해 런던에서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이하 ‘앰네스티’)이 탄생하게 됩니다. 앰네스티는 ‘사면’이라는 뜻입니다. 인터내셔널은 ‘국제’란 뜻이니까,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은 ‘국제사면위원회’라고 번역되는데요, 희생자들의 사면과 석방을 위해 활동하는 단체라는 의미입니다.

앰네스티는 시간이 흐르면서 고문 추방, 사형 폐지, 양심수의 인권 옹호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과를 내고 자체적인 역량을 쌓으면서 그 활동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이 앰네스티가 인권의 사각지대인 북한을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앰네스티의 북한 담당관인 잭 렌들러 씨의 말입니다.

Jack Rendler: We became interested in repression in North Korea by about 1968....(더빙) 앰네스티가 북한의 억압적인 인권 상황에 관심을 갖게 된 게 1968년께입니다. 북한의 인권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국제사회에 알려 공론화하자는데 주안점을 두었죠. 그 뒤부터 정기적으로 북한 인권과 관련한 보고서나 긴급 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앰네스티가 그동안 북한과 관련해 발표한 보고서나 긴급 호소문 가운데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1994년 7월 30일에 발표한 북한 내 정치범에 대한 특별 보고서였습니다. 당시 한국의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앰네스티의 활동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정보 수집을 위해 막대한 국가 예산을 쓰는 기관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라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또 여러 텔레비전 방송국은 당일 저녁 9시 뉴스의 첫 소식으로 앰네스티의 발표 내용을 대대적으로 비중 있게 보도했습니다. 15년 전 MBC 방송의 뉴스 잠시 들어보시죠.

신경민 앵커: 국제사면위원회는 오늘,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구금된 정치범의 실태와 정치범의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지난 79년, 노르웨이에서 연수 중 납북된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 씨가 포함되어 있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첫 소식입니다: “국제사면위원회가 공개한 북한 정치범 수용소 내부 모습입니다. 곳곳에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수용소 막사에는 군데군데 창문만이 나 있습니다. 이 수용 시설에는 난방 장치는 물론, 조명 시설조차 제대로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수용소는 평양에서 동쪽으로 70km 떨어진 승호마을에 있다고 사면위원회는 공개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이 수용소에 구금되어 있는 정치범 49명의 명단을 공개했습니다. 이 명단에는 지난 70년대 말, 노르웨이에서 납북된 수도여고 교사 고상문 씨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당시 고상문 씨가 월북했다고 주장했지만, 고 씨의 수용소 구금은 북한 측 주장의 허구성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 특별보고서에는 정치범은 물론 대학교수와 전직 고위관리까지 포함돼 있어 북한 정권에 반대하는 인사들의 다양성을 짐작게 했습니다. 또 북송교포들이 북한 땅에 도착한 이후의 생활이 적나라하게 밝혀진 점도 이 보고서가 갖는 의미입니다. 특히 ‘김일성력사’를 편저해 북한 최고의 역사학자로 추앙받았지만 뚜렷한 이유 없이 행방불명됐던 이라용 씨의 경우, 사상범으로 몰려 그동안 수용돼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북한 출신 기술자인 김덕환 씨도 1966년부터 소식이 끊겼는데, 김 씨의 러시아 부인은 북한 당국이 그를 위험인물로 지적해, 연행해간 이후 아직 소식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보고서는 이러한 정치범과 양심수에 대한 북한당국의 태도를 국제적 차원에서 인권 탄압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각인시키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앰네스티의 발표가 있은 후, 각종 언론은 북한의 인권이 처한 비관적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서 명단에 들어간 사람들에 대해서 대서특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15년 동안 어린 딸을 혼자 키우며 살아온 고상문 씨의 아내 조복희 씨의 삶도 세상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지구상에서 가장 잔인한 정권이 만든 비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관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고, 렌들러 북한담당관은 크게 아쉬워합니다.



Jack Rendler: Well, I certainly wish that reaction around the world had been stronger than it was...(더빙) 정말이지 국제사회의 반응이 더 강력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여러 정치범 수용소에 수용된 인원이 수십만 명에 육박한다고 하는데요. 이들에 비하면 저희가 발표한 49명의 명단은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이 전부 풀려났어야 했는데...

앰네스티는 끈질기게 북한 당국에 정치범과 양심수에 관한 자료 제출을 요구했고, 북한 당국은 이러한 집요한 요구에 한발 양보해, 이례적으로 1995년 앰네스티 조사단의 방북을 허용했습니다. 북한 당국은 앰네스티 조사단에 사형선고 연령을 17세에서 18세로 상향 조정한 사례라던가, 북한 형법에 규정된 ‘반국가범죄’ 조항의 애매성과 포괄성을 시정한 부분을 자세하게 설명했고, 북한 내 수형시설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북한 정치범 수용소 상황이 조금이라도 개선됐냐?’라는 자유아시아방송(RFA)의 질문에 렌들러 북한담당관은 확실하게 “아니다”라고 답합니다. 앰네스티가 올해 북한 정권에 의해 생사가 불투명해진 정치범의 신상에 대한 조사에 다시 나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특히 이번에는 확인된 정치범들의 신상을 유엔에 제소해서 이들에 대한 해명을 공식적으로 요구할 계획입니다.

이렇듯, 한 영국 시민의 가슴속에 활활 타올랐던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의 촛불은 약 50년이 지난 오늘도 앰네스티의 상징(로고)인 가시철사로 감긴 불타는 촛대가 되어 타오르고 있습니다. 전 세계 160여 개국에 있는 220만 명의 회원이 앰네스티의 타오르는 촛불이 되어 북한의 인권 희생자들을 위해 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