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유럽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과 유럽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들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미국의 민간단체인 '디펜스포럼재단'을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수잔 숄티 대표와 인권운동가들의 시위와 외침)
2009년 9월 워싱턴의 중국대사관 앞. 미국 내 인권운동가들과 미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대거 참석해 중국정부의 탈북자 강제북송 정책과 비인간적인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협력해 북한주민을 집단학살하고 있다는 외침에는 어김없이 수잔 숄티 디펜스포럼재단 대표의 목소리가 가장 크게 들립니다.
디펜스포럼재단은 베트남 참전용사이자 미국 국무부 인권담당 고위자문관을 지낸 채드윅 고어 씨가 1987년 설립했습니다. '디펜스'는 '국방'을 뜻하고 '포럼'은 '공개토론'이므로, 이 민간단체의 설립취지는 한마디로 '국방 문제를 공개적으로 토론하자'는 겁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디펜스포럼재단은 초기 주요 관심사였던 미국의 안보와 국방문제뿐만 아니라 외교와 인권문제로 그 활동영역을 넓혔습니다. 미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자국민을 탄압하는 해외 정권이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수잔 숄티:
Our foundation had hosted defectors from Cuba, China, the former Soviet Union...(더빙) 디펜스포럼재단은 쿠바, 중국, 구소련 출신 망명자 문제에 주로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들 국가에 사는 주민들에게 자유, 민주주의, 인권을 되찾아주기 위해 망명자들을 미국에 초청해 청문회를 열었죠. 그러다가 1996년부터 북한 인권에 눈을 돌렸습니다. 우선 폐쇄된 북한 사회에서 자라고 살아온 탈북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북한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공화당 출신 맥 스위니 하원의원의 수석보좌관으로 활동해 의회 내 인맥이 상당히 넓고 의회 사정을 속속들이 잘 아는 숄티 대표는 북한 인권문제를 공론화하기 위해 자신의 강점을 살리기로 결정합니다. 그것은 탈북자의 의회 증언을 주선하는 일이었습니다. 의회 인맥을 통해 탈북자 청문회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미국 국무부와 워싱턴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방문하면서 백방으로 뛴 결과, 두 명의 탈북자가 미국 의회가 주최하는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서게 됩니다.
수잔 숄티:
So the Defense Forum Foundation hosted the first defectors that had ever spoken out publicly in the United States...(더빙) 디펜스포럼재단의 초청으로 탈북자가 사상 처음으로 미국 의회에 출석해 북한의 실상을 증언했습니다. 인민군 상좌 출신인 최주활 씨와 북한 외교관 출신인 고영환 씨가 바로 그들입니다. 1997년 이들이 미국 의회에서 증언한 순간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최 씨는 마르기는커녕 상당히 살집이 있어서 주목을 끌었는데요, 국제사회의 식량지원이 북한 군부의 식량으로 전용된 덕분(?)이라고 설명하더군요. 군 출신이 아닌 고 씨는 상당히 말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두 분은 청문회 직후 더 많은 탈북자를 워싱턴에 초청해 북한의 내부 소식을 미국인들에게 전할 기회를 마련해달라고 제게 부탁했어요.
이들의 간곡한 부탁을 마다할 수는 없었습니다. 숄티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1998년 북한 강제수용소에서 7년간 고초를 겪은 뒤 탈북한 이순옥 씨와 요덕수용소에서 10년간 살다 나온 강철환 씨를 초청해 강연회를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숄티 대표는 이어 미국의 유력지에 북한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글을 잇달아 기고하고, 의회를 상대로 청문회를 열도록 적극적으로 애써서, 1999년 4월 미국 상원이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청문회를 개최하게 합니다. 이 청문회에는 이순옥 씨와 강철환 씨 외에 함경북도 경성·회령의 정치범수용소 경비병으로 근무했던 탈북자 안명철 씨도 출석해 증언에 나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리고 숱한 어려움 끝에 1997년부터 추진했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의 방미를 2003년에 마침내 성사시켰습니다.
수잔 숄티:
That was really the question...(더빙) 이렇게 탈북자를 미국으로 초청하는 이유는 미국 사회에 북한의 인권 실상에 관한 객관적이고 신빙성 있는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인데요, 한마디로 진실을 추구하자는 겁니다. 인권활동가들은 북한의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미국인은 여전히 반신반의하는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면서 어느덧 그들의 가슴속에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변화를 보면서 디펜스포럼재단은 지금까지 서로 다른 방문을 통해 60명에 가까운 탈북자를 미국에 초청해 청문회를 열었습니다. 일단 의회 청문회가 열려 미국 조야에 북한의 인권 상황이 알려지면 간접적으로 북한의 인권유린이 어느 정도 줄어들지 않을까라는 희망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이 같은 희망은 서서히 실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 숄티 대표, 유럽공동체 대사를 지낸 윌리엄 미덴도르프 의장, 국제개발처 부처장을 지낸 프랭크 러디 이사 등 디펜스포럼재단의 핵심 이사진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시점입니다. 이들의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해결책은 무엇일까? 바로 지향점이 같은 세력을 규합함으로써 활동반경을 넓히고, 이들과 함께 외부에서 북한의 인권을 개선하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디펜스포럼재단이 북한인권을 위해 어떤 식으로 활동반경을 넓히고 동력을 키워갔는지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장명화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