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을 위해 뛴다-48] 노베르트 폴러첸 "통일되면 북한서 진료 생활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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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에는 마치 자기 집안일처럼 북한 인권을 개선하기 위해 수년째 뛰는 단체와 개인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그리고 한국이 침묵하면 북한의 주민은 세계의 외면 속에 방치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 때문입니다. '북한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 이 시간에는 독일인 의사인 노베르트 폴러첸(Norbert Vollertsen) 씨를 찾아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

(한국 국가인권위원회 앞 시위 현장: "북한인권, 민주화 외면한 노무현 정권 규탄한다! 정부는 중국 내 탈북자, 대한민국 국민임을 선포하라! 북한인권, 탈북난민 외면하는 국가인권위 각성하라!"...)

북한 인권과 관련한 집회나 시위에 10년 가까이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독일인 노베르트 폴러첸 씨. 방금 들으신 것은 2007년 한국의 보수적인 인권 단체들이 중국 내 탈북자들의 인권을 외면하는 한국 국가인권위원회를 규탄하는 시위였는데요, 폴러첸 씨의 금발 머리가 눈에 확 띕니다.

폴러첸 씨는 그간 한국 내 보혁 갈등의 한가운데 서 있었습니다.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진보이고, 북한의 인권에 대해 언급하면 보수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던 지난 10년간 진보세력으로부터 '급진적인 보수파 행동가'로 불리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폴러첸

: (I learned the meaning of the word 'radical' is...) 'radical' 즉 '급진적'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뿌리'를 뜻하는 'root'입니다. 이를 고려하면, 이 단어는 '근본적'이란 뜻이 강합니다. 북한 인권과 관련한 문제는 북한 문제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그럼 북한 문제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김정일 일가가 지배하는 북한 정부입니다. 이 문제를 풀려는 사람을 가리켜 '급진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수많은 아이가 삐쩍 말라 굶어 죽어갔고, 지금도 죽어가고 있습니다. 급진적인, 아니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시급한데, 가만히 있으라는 말입니까?

사실 폴러첸 씨는 인권활동가이기 전에 의사입니다. 전화 회견 직전에도 거동이 불편한 환자 가정을 방문해 진료를 마치고 막 돌아왔습니다. 1984년부터 인도양의 섬들에서 의료봉사활동도 했고, 독일의 보건복지와 의료개혁에도 목소리를 높였던 폴러첸 씨는 시쳇말로 '뼛속까지' 의사입니다. 이 가정의 출신 의사가 1999년 7월 독일 자선단체인 '독일 응급의사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첫발을 내딛으면서 인권활동가로 옷을 갈아입게 됐습니다.

폴러첸

: (I like them so much...) 북한사람들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해주의 한 병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요, 어떤 남자가 화상을 입어 거의 죽음 직전까지 갔는데, 병원 의사, 간호사, 기술자가 그 사람을 위해서 피부를 제공하는 거예요. 너무 감동받아서 저도 허벅지 살을 도려내 피부를 이식했습니다. 그러자 북한 정부에서 '공화국 친선메달'을 주더군요. 이 메달 덕분에 북한 곳곳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는데요, 그만 못 볼 것을 보고 말았습니다. 길거리에서 썩어가는 시체들, 열악한 의료 환경 시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00년 10월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미국 국무장관 일행에게 몰래 북한의 낙후시설을 보여주고, 미국 토니 홀 하원의원과 외국 정치인에게 북한의 인권 실태를 자세히 써서 보냈습니다. 북한에서 활동하는 비영리단체 직원들과 외교관 등이 북한과의 관계를 유지하거나 지원을 계속하기 위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 '침묵의 규칙'을 깬 겁니다. 폴러첸 씨는 결국 그해 12월에 북한에서 추방됩니다.

자유세계로 나온 폴러첸 씨는 2002년 2월 미국 하원 청문회에서 북한 주민이 겪는 참상을 증언하고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탈북자 지원 사업을 펼치는 등 전문 인권활동가 못지않은 활동을 벌입니다. 2002년 5월에는 북한 주민 천 명을 배편으로 탈출시키려 했고, 그보다 두 달 전엔 베이징 주재 스페인대사관에 탈북자 25명을 진입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결과 2003년 11월에는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주는 '아시아 스타상' 수상자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한반도의 남쪽에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자, 당시로선 '급진적인(radical)' 뉴스거리를 공급하는 방법을 쓰기 시작합니다. 유니버시아드가 열린 대구에서 '김정일 타도' 구호를 외쳐 북한 기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다 다쳐 병원에 후송되는가 하면, 강원도 철원에서 소형라디오가 든 대형풍선을 북한으로 보내려다 한국 경찰의 제지를 받고, 판문점에서 월북 소동을 일으킨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를 두고 일부에서는 폴러첸 씨의 행동이 너무 언론을 의식한 과장된 몸짓이라고 비판합니다.

폴러첸

: (I apologize (if) I may endangered some people, maybe I brought some people in bad situations...) 제가 몇몇 사람을 위험에 처하게 했고, 좋지 않은 상황에 빠뜨렸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하지만 햇볕정책을 추구하던 당시 한국에서 신문과 방송에 북한 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머리기사로 올려 일반인의 관심을 끌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판문점에서 분계선을 넘는 시늉을 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인과 동행하고 있었거든요. 북한 관련 기사가 주요뉴스로 취급됐으면 했어요. 천만다행으로 미군 경비병에게 붙잡혔습니다. 북한 경비병에게 붙잡혔으면 재미 한인 인권운동가 로버트 박 씨처럼 크게 고통받았겠죠. 제가 좀 순진했던 것 같아요.

한국, 일본, 미국, 중국 등을 오가며 북한의 인권문제를 공론화하는데 전력투구한 폴러첸 씨. 지금은 독일의 대학도시인 괴팅엔에 이년 째 머물고 있습니다. 올해 84세인 아버지가 몇 년 전 심장마비를 일으켰을 때 외아들인 그가 아시아에서 독일로 돌아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려 심적으로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폴러첸 씨가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서 손을 놓은 것은 아닙니다. 수시로 독일,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여러 인근 유럽국가의 교회, 학교, 단체 등의 강연회에 초청돼 북한 인권의 실태를 적극적으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유럽을 방문하는 인권활동가들과도 긴밀히 협력하고 있습니다. 또 2001년 월간조선에서 출판한 수기집 '미친 곳에서 쓴 일기'에 이어, 독일 출판사를 통해 소설집인 '평양의 죽음'을 조만간 출간할 예정입니다. 다음번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 같은 폴레첸 씨의 궁극적 소망은 뭘까?

폴러첸

: (Sometimes, I really get homesick...) 때론 북한 사람들이 무진장 그리워집니다. 뜻밖에 소박하고 은은한 정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북한에 새 정부가 들어서거나 통일이 되면 해주, 함흥, 원산, 평양에 가서 그곳의 환자들을 돌보고 싶습니다. 북한 주민의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북한 인권을 위해 뛴다'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장명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