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아프지 말고 건강한 삶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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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누구나 건강하고 즐거운 그리고 행복한 인생을 살고싶어 할 것입니다. 특히 남한에 간 탈북자들에겐 그런 소망이 간절한데요. 오늘은 부산에서 뿌릴 내리고 제 2의 인생을 사는 강유 씨의 집을 기자가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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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엘리베이터 안)

기자: 제일 꼭대기층인가요?

강유: 네,

기자: 너무 높아서 어지럽지 않으세요?

강유: 아니, 괜찮아요

산 정상에 지어진 아파트 건물. 주공아파트 15층에서 보이는 세상은 아름답기도 했지만 아래를 내려다 보는 순간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 였습니다.

(아파트)

기자: 안녕하세요? 처음 뵙습니다

부인: 안녕하세요

기자: 목소리는 들어서 아시죠?

부인: 네, 알겠습니다.

강유: 편히 앉으세요.

강유 씨 부부는 부산에 정착한 이후 줄곳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데요.

기자: 14년 사셨는데 어떠세요?

강유: 네, 편함없이

동의사 강유 씨는 지난 1999년 10월 탈북합니다. 당시 직업은 함경남도 홍원군 홍원읍에서 방진선박 진료소장이었고 중국생활 5년 동안 북한에 있던 가족을 탈북시켜 함께 남한에 살고 있습니다.

기자: 건강은 좀 어떠세요?

부인: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치료받고 약을 쓰니까요. 북한 같았으면 못 일어납니다. 저도 처음에 왔을 때는 간혈당이 높아서 아무리 약먹고 주사를 맞아도 안되더라고요. 그때 의사가 부르더라고요. 주사를 맞겠는가? 나라에서 한번은 놔주는 데 그 주사를 맞겠는가 나보고 그럽디다. 24번을 맞아야 하는데 6개월을 맞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기자: 굉장히 비싼 주사였나보죠?

부인: 네, 맞겠다고 하고 절반을 맞았는데 지치더라고요. 주사 맞고는 3일째부터 맥이 떨어지고 힘이 떨어지고 밥 냄새를 못 맞겠더라고요.

기자: 무슨 주사였기에 그러죠?

강유: C형 간염이었는데 그것이 암 전단계였어요. 체중이 42Kg까지 내려갔어요. 북한에서부터 고생했던 것이 그때는 악으로 이겨냈는데 여기 한국에 와서 긴장이 풀리고 하니까 그게 도지는 겁니다.

보통 사람들은 제일 좋았던 추억을 떠올릴 때 여행을 갔거나 자신이 마음껏 웃을 수 있던 일을 말하지만 아무래도 강유 씨의 부인에겐 좋았다기 보다는 치열하게 살았던 순간들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기자: 이젠 괜찮으신 겁니까?

부인: 네, 지금은 집에서 좋다는 것은 다 쓰고 해서 좋아졌는데 1년만에 다시 오라고 해서 갔는데 이상이 없다고 했어요.

기자: 그것이 언제 이야기 입니까?

부인: 남한 정착해서 11년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갑자기 좀 옆구리가 아프고 하더라고요.

기자: 남한생활 11년만에 그렇다면 남한에서 얻은 병이 아닌가요?

강유: 아니지. 중국도 1960년에 아사가 있었는데 그때 보건부에서 뭐라 했냐면 앞으로 20년 후면 중국 땅에 간염환자가 발병할 것이다 이랬어요. 잠복기가 있거든요. 탈북자도 고난의 행군 있고 20년이 됐잖아요. 북한에서 굶고 했던 것이 잠복기에 있다가 한국와서 균이 남아있다가 편안하고 건강관리를 잘 안하고 해서 발병한거 같아요

기자: 여기서 14년을 사셨는데 이제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부인: 제가 만으로 70입니다.

기자: 남쪽 와서 제일 좋았던 기억은 뭔가요?

부인: 여기 오니까 처음 하나원에서 뭘 사자고 하면 너무 비싸고 해서 생각이 많았어요. 이제 나가면 이렇게 모든 것이 비싼데 어떻게 사는가 했어요. 하지만 정착금도 있고 하니까 냉장고 하나하고 이불장 하나만 샀어요. 돈을 쥐고 더 쓰지 않고 했는데 직장을 못 구해서 나라도 아무거나 해야지 하고 했어요.

찜질방 청소를 했는데 청소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온도가 60도 넘는 곳에서 일 하자니 온몸이 물투성이고 힘들더라고요. 남한분들은 보름을 못 견디고 나가고 했는데 저는 1년을 더 했어요. 북한에서 일하던 그 생각이 나고

기자: 일하는 시간은 어떻게 됐는데요?

부인: 아침에 7시반에 가서 준비하고 점심시간 1시간 하고 저녁 7시에 퇴근했어요. 그리고 80만원 씩 받았어요.

기자: 80만원은 많은 돈이 아닌데요.

강유: 그때 최저 임금이었어요.

기자: 그것이 언제 얘기죠?

강유: 2005년 한국 온 다음해에요.

부인: 그러다 남편이 민중의술 회장을 하면서 사무실에 중탕기를 놓고 해서 남을 시키느니 내가 했어요. 남편은 북한에 있을 때부터 남 도와 주는 것을 잘했어요. 내가 약을 달이는데 일이 많을 때는 한 4가마씩 달였어요. 그것을 택배로 부치고 …일욕심에 아픈 줄을 몰랐는데 한 번은 교통사고가 나서 무릅을 다쳐서 병원을 갔는데 피 검사에서 나왔어요.

일을 마치고 집 건널목을 건너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치료차 간 병원에서 그간 모르고 지났던 큰 병을 발견하게 됐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젠 몸도 어느 정도 회복이 돼서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지낼 수만 있기를 소망해봅니다.

기자: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부인: 원하는 것은 없습니다. 여기 와서 자기 재능 것 잘 살고 입고 싶은 것 입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니까 첫째도 둘째도 건강하게 죽을 때까지 아이들에게 걱정 안끼지고 사는 게 원하는 거죠.

기자: 선생님이 봉사활동 좀 고만하고 돈 버는 일하셨으면 하는 마음은 없으세요?

아내: 그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우리에게 복이 차려지게끔 해서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그럽니다.

(헤어짐)

아내: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기자는 부산을 떠나기 전 강유 씨 부부가 다니는 수영로 교회를 찾았습니다. 강유 씨 당사자가 아닌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고 싶어서였는데요. 서울행 고속열차를 타고는 송영섭 목사와 나눈 이야기를 다시 들으며 강유 씨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기자: 목사님 안녕하세요? 강유 선생님은 목사님이 뵙기에 어떤 분이신가요?

송영섭 목사: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계신분 같습니다.

동의사 강유 씨 항상 웃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가식이 아닌 자신이 느끼는 행복이 그대로 전달되는

송영섭: 사람이 보람을 느낄 때는 자기가 원하는 욕망을 성취할 때 보람을 느끼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다른 사람의 연약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을 통해서도 행복감을 충분히 누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행복감이 오히려 더 나의 욕망을 채운 것보다 더 큰 행복일 수 있거든요. 강유 집사님을 안 것이 한 5년 되는데 그렇게 변해 오셨어요. 실제로 남을 위해 헌신하면서 얼굴 표정이 바뀌고 삶의 활력도 많이 생기시고 달라지는 것을 제가 확실하게 보게됐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부산에 사는 강유 씨의 집을 방문해 그의 남한생활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