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 사진사

평양 만수대예술극장 앞 공원에서 여자 아이들이 한 데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평양 만수대예술극장 앞 공원에서 여자 아이들이 한 데 모여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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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들은 보통 남한에 가면 북한에서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면서 살게 됩니다. 그 일이 어떤 것이든 자신이 선택하게 되는데요. 오늘은 사진작가 출신 탈북여성 장세복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양강도 출신의 장 씨가 탈북하게 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입니다.

장세복: 저는 북한에서 군생활 10년하고 사진사로 국가 답사, 근로자 답사로 백두산에도 가고 하는 일을 10년 넘게 했어요.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에 생활이 어려웠어요. 다른 사람들은 장사를 하는데 사진을 찍다보니 더 어려웠어요. 중국에서 인화지를 사서 돈 벌자고 했는데 가보니까 자본주의 사회로 가는 중국이 너무 틀리더라고요. 그런 모습을 보고 더는 북한에 살 수 없다. 여기선 아무 희망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기자: 그게 몇 년 입니까?

장세복: 2000년도였죠.

눈에 보이는 모습을 순간에 포착해 사람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는 일을 하면서 장 씨는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먹고 사는 것이 어려워지면서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도 사라졌고 당장 살길이 힘들었던 장 씨는 중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006년 남한 땅을 밟게 됩니다. 처음에는 북한에서 받은 교육이 있기 때문에 남한에 갈 생각은 생각지도 못했다며 옛 기억을 떠올려봅니다.

장세복: 군대에서 하도 정신교욱을 받았기 때문에 남한에 간다는 생각은 못했어요. 그렇게 살다가 밤에 자유아시아방송 듣다보니 우리 북한 사람들이 인터뷰하기를 너무 좋다 우리 사람 집도 주고 북한에 있는 자식하고 전화도 하고 데려올 수 있다 이런 말을 듣고 죽더라도 한 번 나도 가보자 하고 나하고 같이 일하던 아이를 데리고 몽골로 갔어요. 그리고 인천공항에 도착해보니 우리가 상상하던 판잣집, 거지는 없고 한 폭의 영화 같은 세상이었어요. 믿을 수가 없었어요.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를 만큼 황홀했어요. 이렇게 남조선이 발전했는가? 처음에는 의심이 들더라고요.

탈북해 본 세상은 숨어살던 중국밖에는 없기에 자본주의 사회인 남한에 가서 무척이나 당황스럽고 머리가 복잡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혼란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해결됐습니다.

장세복: 첫째 한국에 정말 잘 왔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됐어요. 진짜 이제야 자유를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두 번째는 열심히 일한만큼 노력에 대한 상금이 돌아온다는 거죠. 그리고 이제 내 꿈을 마음대로 펼쳐보자는 생각이 있더라고요. 열심히 살아보자. 열심히 살면 좋은 일이 있겠지 이런 마음이었어요.

장 씨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열심히 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누군들 열심히 살아보자는 생각을 안 하겠습니까? 탈북자들은 부자가 되고 싶다. 성공해서 통일이 됐을 때 자동차를 타고 고향에 가겠다. 이런 말들을 흔히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회에 적응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닙니다. 힘들수록 마음이 중요한데요.

장세복: 여기 와서 열심히 산다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는 내가 자립적으로 내가 일어서야지 누가 해주는 세상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어요. 집도 주고 교육도 시켜주고 하는데 뭘 못 하겠는가 누가 강요해서 온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온 건데 내가 봉사 일부터 시작을 해보자 했어요. 어떻게 그 일을 하게 됐는가 하면 하나원에 있을 때 꽃마을 봉사를 갔는데 나라에서 다 치료해주고 환자들을 보살펴 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간병인 일을 한 2년 했어요. 그러다가 학원도 다니고요. 다음에 회사에 들어가서 열심히 일해 여기까지 왔어요.

장 씨는 자동차 부속품 만드는 회사에서 검수요원으로 7년을 근무하다 작년에 퇴직을 했습니다.

장세복: 회사에서 나가지 말라고 했는데 퇴사를 한 것은 하나원에 같이 있던 아이가 있는데 남편이 암으로 죽었어요. 그리고 자기도 간암이 걸려서 간 이식을 받고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는데 언니가 날 좀 간병해줄 수 없겠는가? 물어봐서 내가 회사를 나와 간병을 해줬어요. 이제는 회복이 돼서 3월 1일부터는 출근할 것 같아요.

잠시 간병일을 했던 적이 있어서 전혀 모르는 사람보다는 환자를 돌보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가 다니던 직장까지 관두면서 고향 사람을 돌봐준다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닌데요. 이렇게 정신없이 살다보니 남한생활 10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기자: 남한생활 10년인데 살아보니까 어떻습니까?

장세복: 좋죠. 여기 와서 내가 노력한 만큼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일하고 싶으면 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내가 당당하게 살 수 있었고 딸도 데려와서 살 수 있었고 참 잘 왔다고 생각해요. 여기 와서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기자: 북에서 가족을 전부 데려 왔습니까?

장세복: 신랑은 북에서 사망하고 아들도 파라티푸스로 사망했고 딸이 하나 있는데 한국에 데려와서 현대자동차에서 일하고 있어요.

최근 다시 취업을 한 장세복 씨는 자기 차를 몰고 출근을 하면서 쉬는 날에는 가고 싶은 곳엘 갈 수 있고 누군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살수 있다는 것에 부족함을 못 느끼며 살고 있답니다.

장세복: 이제는 내가 여기 왔으니까 너무 받은 것이 많으니까 남은 인생은 열심히 살고 봉사를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요.

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장세복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