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운 것만큼 보인다

복지관에서 지역 어린이들을 초청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 대학생 봉사자들.
복지관에서 지역 어린이들을 초청해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는 대학생 봉사자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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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란 표현이 있습니다. 식견이 좁거나 편견에 사로잡혀서 세상이 넓은 줄 모르는 사람에 비유해서 쓰는 말입니다. 이는 탈북민들이 중국이나 남한에 도착해서는 북한에서 어려움을 참고 살아온 세월이 너무 허탈하다며 한탄하면서 쓰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40대 중반의 탈북민 주영희(가명)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주영희: 라디오를 가지고 와서 몰래 틀어보면 자유아시아방송이라고 나왔거든요. 그때는 그게 뭔지 몰랐거든요. 이불을 덮어쓰고 들으면서…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주 씨는 북한에서 외부 라디오 방송을 듣기는 했어도 별로 진지하게 탈북을 생각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 상황이 그로하여금 중대한 결심을 하게 만듭니다.

주영희: 갑자기 집안에 병자가 생기면서 치료하는 약이 필요했어요. 탈북을 해서 돌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은 못했고 약 구입을 하기 위해 탈북했거든요. 넘어서면서 북한이 아닌 세상을 봤고 그때 마음의 동요도 있었고 또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서 탈북이 되고 말았습니다.

기자: 약은 고가품의 약이었나요?

주영희: 네, 가격도 고가가 아닌데 북한에서는 생산이 안되고 구할 수 없는 상태였어요. 강막염에 쓰는 눈약인데 바이러스로 인해 각막이 손상되는 병이었어요. 눈이 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보니까 치료를 하다가 잘 안됐어요. 이 병에는 이 약이 있어야 했는데 구해 넣는 과정에 호전이 되다가 떨어졌어요. 이어서 약을 써야하는데 구할 수가 없었어요. 도강하는 분이나 사사 여행자로 중국에 드나드는 분들에게 부탁했는데 전혀 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심했어요. 제가 가서 사온다.

출신성분도 좋았고 직업도 안정적이었지만 북한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안연고를 구하기 위해 탈북한 겁니다. 그리고 중국생활을 거쳐 지난 2009년 남한에 도착합니다. 처음 남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단순노동이었습니다.

주영희: 시작한 것이 알바입니다. 샌드위치를 굽는 알바를 했어요. 처음 하나원을 나와서 고용지원센터에 가니까 컴퓨터를 배우라고 해서 학원에 일단 등록을 하고 직업을 못찾아 걱정하다가 옆집 할머니 집에 놀러갔는데 할머니를 돌보는 분이 반찬을 챙겨 왔다가 내 얘길 듣고 소개를 해준거예요. 그분 친구분이 하는 샌드위치 가게를 갔어요. 그런데 피클, 네프킨, 쏘스 이런 말을 못 알아들어서 하나부터 전부 사장님이 가르쳐주고 내가 배우려고 노력을 해서 6개월 학원 다니면서 첫번째 한 일이 그것이었어요. 아침에는 학원가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오후에는 샌드위치 집에 가서 12시 1시까지 하고 퇴근해 오고요. 사회에 나와서 처음 한 일이예요.

청취자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주 씨가 했다는 샌드위치 굽는 일이 어떤 것을 하는 일인지 직접 설명을 들어보죠.

주영희: 식빵을 양쪽에 구워 넣고 계란, 치즈, 야채 넣고 쏘스 발라주고 과일쥬스 갈아주고요. 그때 음식하는 것 처음 배웠어요. 그때 한 생각이 일생 내가 샌드위치를 굽고 살아야하나? 내가 할 일은 없을까? 내가 이 사회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전단지를 볼 줄도 모르고…

당장 서양식 한끼 식사인 샌드위치 굽는 일로 생활비는 벌 수 있었지만 답답했습니다. 주 씨는 좀더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 그리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없을까 고민합니다. 그리고 나름 준비를 해서 새로운 직장을 찾습니다.

주영희: 탈북자 저밖에 없는 회사예요. 고속도로 휴개소에 매장이 있는데 직접 운영도 하고 또는 다른 매장에 식품을 납품하는 회사인데 회계를 보고 있어요. 매출 매입, 업체들 관계와 급여 관계라든가 이런 것하는 데 대리로 들어가서 지금은 과장입니다.

말단 직원으로 입사해서 꾸준히 성실함을 보여줬더니 그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겁니다.

주영희: 그런대로 살 수 있겠다고 한것은 나름 열심히 하니까 알아주시더라고요. 처음 선입견과 자격지심을 많이 가졌을 땐 힘들었는데 지금은 3년이란 세월이 귀중한 것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외국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거죠. 우리 회사에 조선족이 많은데 다르다는 거죠. 한민족은 한민족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겠다 그리고 북한하고는 다른 것이 노력만 하면 귀천이 없고 살 수 있잖아요. 그것이 난 너무 좋아요.

사람은 아는만큼 보인다고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며 공부하고 또 주말에는 대학원 즉 준박사 과정을 공부 하며 남한생활 6년을 살았다는 주 씨. 외롭거나 고향 생각에 울적할 시간도 없었답니다.

주영희: 이 사회를 아는 것이 많이 보고 듣고 배워야된다고 생각해서 일하면서 코피 흘리면서도 평생교육학을 공부하고 석사를 거쳐서 박사과정이 있어요. 저는 석사 과정에서 경영학을 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이제 남한생활을 알수 있어요. 왜냐하면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니까요. 난 성공하고 부자가 되자 이런 것보다는 나름 열심히 살고 돕지는 못해도 내가 먹고 살만큼은 벌면서 살자 이런 생각을 해요.

준박사 과정은 경영학을 했지만 박사는 공공정책학을 배우고 있는 주 씨 오늘에 충실한 삶을 살자면서 동시에 하고 싶은 것은 꼭 하면서 살자고 말합니다.

주영희: 여행가고 싶어요. 여행이란 것이 처음엔 돈이 없어서 못 갔고 지금은 있어서가 아니고 안정이 어느정도 돼야 안정됐다고 말할 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박사과정 중이니까 3년은 열심히 할 것이고 두 번째는 여행하고 싶어요. 북한에선 못해봤으니까 이제 세상이 이렇게 발전하고 문화가 이렇구나 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직접가서 보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민 주영희(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