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고 좋아도 좋아할 수가 없다. 여러분은 이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남한에 간 탈북민이 먹을 걱정 안하고 자유롭게 살면서도 북한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면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은 장애인시설에서 일하는 황현정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황현정: 저는 북한에 딸이 하나 있는데 그 딸을 생각하면 내가 여기서 너무 행복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고 그래서 저의 생활을 포기하고…
황 씨의 고향은 함경남도 신포입니다. 2003년 탈북해서 중국생활을 거쳐 남한에 간 지는 5년 됐습니다. 지금도 북한에서 할머니와 살고 있는 딸을 생각하면 옆에서 지켜주지 못해 죄스러운 마음 뿐이라고 하는데요. 그런 마음 때문에 처음에는 남한생활이 순탈할 수가 없었죠.
황현정: 솔직히 내 나이에 배울 것이 없더라고요. 그래도 이 나라에 적응을 하자면 뭔가 배워야 겠다 해서 미용학원을 갔어요. 그런데 영어가 안돼서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어요. 그래서 중간에 포기하고 회사에 취직했어요. 솔직히 북한에서 일하던 것하고 비교해 힘들더라고요. 그러다가 제가 원하던 사회복지 공부해서 지금은 장애인 시설에서 근무한지 3년 됐습니다.
물론 자기가 태어나 자란 곳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것이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겠지만 단순노동일에서도 조차 북한에서 보다 힘들었습니다. 몸이 힘든 것은 쉬면 회복이 되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문이 쉽게 열리지 않은 것이 더 문제였죠.
황현정: 제가 와서 처음 1년은 사는 것이 불만이 많았어요. 서울에 동생이 살고 저는 부산에 집을 받았는데 동생집하고 제가 받은 집도 다르고 해서 불만이 많았는데 어느날 시장 갔다 올라오는데 70살 넘어 먹어 보이는 노인이 집에서 물을 푸고 있는 거예요. 전날 내렸던 빗물을 퍼내고 있는 거예요. 한국에서 태어나 저렇게 사는 노인도 있는데 난 뭐가 부족해서 불만스러워하는가 생각을 하고 열심히 사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다 해서 그때 저도 정신을 차리고 주변의 탈북자와 봉사단을 꾸려서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봉사할동이란 누가 시켜서 또는 강요에 의해 하는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황 씨는 주변의 탈북민들과 '통일희망봉사단' 모임을 만듭니다. 그리고 지역내 노인정이나 고아원을 찾아가서 밥도 해주고 빨래를 해주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합니다. 그러면서 대학을 가게 되는데요.
황현정: 봉사를 하면서 보니까 어르신들이 뭘 원하는지 알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사회복지를 공부한 겁니다.
기자: 사회복지 대학은 4년 했나요?
황현정: 2년 야간대학을 다녔는데요. 회사와 시간이 안 맞아서 관두고 밤에 수업이 끝나면 24시간 문을 여는 식당에 가서 일하고 낮에는 새로온 탈북자들 지역사회에 오면 정착에 도움을 주고 그랬습니다.
가난하고 장애를 가지고 사는 사회적 약자를 돕게 되면서 그동안 짜증스럽고 불만에 가득찼던 마음이 사라진 겁니다. 황 씨는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뀌었고 생활에는 의욕이 넘칩니다.
황현정: 사회복지 공부를 할 때는 직업을 정말 많이 바꿨어요. 공부는 해야하겠는데 실습하는 시간이 안맞았거든요. 보육교사는 낮에만 실습을 해야 하니까 직장일을 겸하지 못했어요. 2년동안 힘들게 한 공부를 포기할 수 없었고 정말 열심히 하면 다시 취업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사를 포기하고 다른 직장을 갔습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 자격증을 땄고 나중에 거의 10:1 경쟁을 뚫고 지금 직장을 잡았습니다.
기자: 하는 일에 대해 소개를 해주세요.
황현정: 북한에서는 장애인 시설을 몰랐고 한국에 와서 봉사를 하면서 알았는데 내가 지금 돌보는 아이들은 지적장애 1급입니다. 거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선 주간 보호시설에 가서 공부를 하고 나면 제가 데려와서 그때부터 목욕시키고 밥해주고 하루 반찬 김치까지 네가지 해서 먹이고요. 음식을 골고루 섭취하도록 도와주고요. 교사 한 명당 4명 아이를 돌보고 있습니다. 원래는 일이 10시까지만 하면 되지만 실제는 밤새 근무하는 것과 같죠.
장애인시설이란 사회복지정책의 하나로 국민 모두가 똑같이 누리는 권리 중 하나입니다. 신분토대와 사회적 직위와는 상관없이 작동하는 시설입니다.
황현정: 부모들이 아이를 낮에 저희에게 맡기는 이유가 부모들이 생계를 유지해야하니까요. 다른 아이들도 챙겨줘야하니까. 낮에 우리에게 보내고 주말에 가족과 시간보내고 주중에 여기 오고 하는 겁니다.
기자: 정부 보조금을 운영이 된다는 것이죠. 물론 돈이 있는 사람은 자신 부담이겠지만요.
황현정: 아닙니다. 돈이 있다고 더 내고 없다고 보조금을 쓰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돈으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비용 식비포함해 쓰고요. 부모님이 20만원씩 주고 있는데 이 돈은 아이들 데려가서 외식도 시켜주고 생일이 다가오면 노래방도 데려가고 합니다.
기자: 그러면 선생님 월급은 어디서 나오나요?
황현정: 월급도 시에서 보조금으로 받고 있습니다.
이제 50대 나이로 접어든 황 씨. 그동안의 가시밭 고난의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앞이 뻥뚫린 고속도로를 달리고 싶은 마음인데요. 북한에 있는 딸이 자꾸 눈에 밟힙니다.
황현정: 저는 제게 일이 주어진대로 일하고 딸이 오게 된다면 나를 위한 그리고 딸을 위한 삶을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장애인시설에서 일하는 황현정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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