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정의 워킹그룹, 오세혁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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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탈북자 중에는 북한인권현실을 알리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은 영국 유학 후 미국, 영국, 캐나다 등 다국적 사람들이 모여 북한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활동하는 “전환기 정의 워킹그룹”의 오세혁 연구원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백두산 폭포 앞에서, 오세혁 씨.
백두산 폭포 앞에서, 오세혁 씨. (사진제공-오세혁)

황해도 해주 출신의 오세혁 씨가 북한을 떠난 때는 지난 1999년으로 그의 나의 스물한 살 때입니다. 북한에서는 장교를 양성하는 군사학교를 다니다 중퇴한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 달 월급 120원을 받습니다. 당시 그 월급으로 장마당에 가서 쌀 두 키로 반을 사면 남는 게 없었는데요. 일단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세혁: 여동생이 장사를 하러 다녔는데 등짐을 지고 시골 내려가 물건하고 바꿔서 그것도 쌀을 시내로 가져와 장마당에서 팔아 이문을 남기는 것인데 별로 남는 게 없었어요.

두만강을 도강해선 중국에서 숨어 살다가 2002년 4월 베이징에 있는 독일 대사관 담을 넘었고 한국으로 갑니다.

오세혁: 처음에 왔을 때는 한국에 대해 너무 모르니까 뭘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정말 너무 막막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무조건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돈을 벌기 위해선 뭘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몰랐어요. 일을 하려면 지식과 기술이 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은 못하고 그냥 무조건 나는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스물다섯 나이에 혈기왕성한 오 씨는 태어나 처음 자유를 만끽하게 됩니다. 누가 간섭하는 사람도 없고 일하면 꼬박꼬박 자신의 은행 통장에 돈이 쌓이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금방 부자가 될 것 같다는 상상도 과히 나쁘지 않았고요. 이런 생활이 한동안 지속됩니다.

오세혁: 처음에는 건설현장에 잤죠. 가서 일용직이라고 해서 하루 일하면 당일 일한 대가를 받는 거예요. 오전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면 7만원을 받았어요. 그러면 일을 소개해준 소개소에 10% 주고 6만원이 남는데 밤늦게 까지 일하거나 힘든 일을 하면 돈을 더 받았어요. 그런데 언제까지 막노동을 할 수는 없다. 나도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고 같이 일하던 분들은 이미 그 분야에서 기능공이 됐는데 저는 그런 기술도 없었죠. 그분들이 나한테 젊었으니까 공부를 해라 그런 말씀을 많이 해주셨는데 그때는 그 말이 뭔지 사실 잘 이해를 못했던 것 같아요.

푼돈모아 큰돈이 된다고도 하고 비유가 맞는지 모르지만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도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일용직 일을 하면서 청춘을 보낼 수는 없었죠. 점차 생활에 회의가 일면서 해가 넘어갑니다.

오세혁: 1년이 지나 대학입학 통지서를 받았는데 그것을 포기했어요. 그리고 어떤 분의 소개로 자동차 회사를 갔는데 한 달 만에 알았어요. 옷은 정장을 잘 차려입고 갔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것을 알았죠. 컴퓨터로 간단한 문서작성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거죠. 뭔가 일을 하려면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대학 포기한 것을 너무 후회했어요. 한동안 좌절해서 헤매다가 일하자하고 맘을 고쳐먹고는 사우나에서 청소도 하다가 다시 도전해서 남한 와서 3년 되는 해에 대학 입학을 했죠.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는 바로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이번에는 사회학을 합니다. 그리고 내친김에 영국 외무성이 지원하는 쉐브닝 장학금으로 영국에서 1년 과정의 대학원과정 그러니까 북한식 표현으로 하면 준박사 과정을 밟습니다.

기자: 영국 유학까지 다녀왔는데 세상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것을 느낍니까?

오세혁: 글쎄요. 분명히 달라진 것 같아요. 사람마다 사는 길이 있다고 하는데 길이란 것이 어떤 일을 하면서 살까 하는 고민인데 저는 지금 북한인권 관련된 일을 하는데 앞으로 큰 일이 없는 이상 이쪽 일을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인생이 될 것 같아요. 이런 선택을 하기 까지는 많은 과정이 있었어요. 돈을 많이 버는 일을 하고도 싶었고 인지도 높은 기관에서 일하고 싶은 욕심도 있었고요. 이런 과정에 이상과 현실에 대해 알게 되고 현재 일에서 보람도 느끼게 됐고요.

지난해부터 오 씨는 북한인권상황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모든 것을 쏟고 있습니다. 벌써 올해 영국에서 있었던 인권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했는데요. 북한에 살았을 때보다 지금 북한을 더 잘 알게 됐다고 합니다.

오세혁: 저는 지금 북에서 오신 분들 인터뷰를 해서 북한에서 대량살상이 있었던 사실 예를 들어 사건 매장지 그리고 북한의 안전부나 보위부 기관의 위치 등을 구글 위성지도를 보면서 찾아서 표시하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북에서 오신 분들의 증언을 녹음하고 기록하고 이런 것들이 국제사회나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일이죠. 나중에는 이런 것들이 증거 자료가 돼서 가해자 처벌에 쓰일 수 있고요.

오세혁 씨는 자신이 경험한 남한생활에 따르면 자유가 있다고 모든 것이 공짜고 그냥 이뤄지는 것은 아니며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오세혁: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유학도 가고 대학원을 두 개씩이나 나오고 할 줄을 몰랐죠. 상상을 못했죠. 그런데 그게 가능했던 것은 자유가 있었고 열심히 노력하면 이런 기회를 누릴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봤고 열심히 해서 현실이 됐던 거죠.

제2의 고향 오늘은 북한인권상황을 알리는 일을 하는 오세혁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