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이는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많은 고난의 순간을 넘겼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작은 일로는 흔들리지 않게 단련이 됐지 않나 싶습니다. 누구에게나 살면서 3번은 기회가 찾아온다 하니 그 순간이 왔을 때 꼭 잡으라고 말하는 탈북민이 있습니다. 오늘은 40대 후반의 탈북민 상담사 김정원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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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있었는데 슬프게도 3살 때 하늘 나라로 갔어요.
탈북의 선택을 하게된 김 씨는 함흥 출신으로 북한에서 아이를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으로 인해 지난 1997년 결심을 합니다.
김정원: 결혼 할 때는 보기 좋은 모습이었는데 이혼당하고 집에 갔을 때 제 몰골이 너무 안좋으니까 아버지가 충격을 받으셨어요. 1년 사이에 딸과 아빠를 잃게 되죠. 그래서 거기서는 더 살 생각이 없었어요. 그래서 탈북을 결심하고…
30년을 북한에 살다 남한으로 갔기 때문에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놀랄 수밖에 없었죠. 10년이란 세월이 훨씬 지났지만 남한입국 당시의 기억으로 잠시 시간을 돌려봅니다.
김정원: 신기했죠. 처음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는데 우리만 특별하게 궁전 같은 건물을 통해서 대해준줄 알았어요. 그때는 인천공항에 대해 몰랐었죠. 후에 알고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녕 비행기 정거장으로 이용한다는 것에 놀랐고 북한같으면 소수의 선택된 자들만 다니는 궁전 같은 곳에 일반인들도 다같이 활용한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고 저희가 대형버스를 타고 오는데 북한에 있을 때는 하루종일 있어도 도로에 승용차를 볼 기회는 없고 자동차만 5대정도 보는 것이 다였거든요. 그런데 간부들만 탈 수 있는 고급승용차가 도로에 널려 있는 것이 너무 신기했어요.
북한에서는 국가가 지정해 주는 공장에서 일했기에 직업을 구하고 진로에 대한 걱정을 해본적이 없었는데 제일 문제가 됐던 것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찾는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김정원: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13년 전만해도 북한에서 왔다는 그것 자체가 취업의 걸림돌이었어요. 그리고 또 한국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이 문화적 차이와 외래어 쓰는 것이었어요. 저는 러시아어를 배웠기 때문에 영어는 전혀 몰랐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소통이 안돼서 어려웠어요.
기자: 먹고 사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김정원: 북한에 있을 때 수학이나 돈 계산을 잘했어요. 그것과 연결되는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경리라는 일이 있는 것을 알았고 경리를 하려면 돈계산만 잘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어서 회계를 할 수 있는 학교를 찾다가 직업학교에 전산회계를 가르치는 곳이 있어서 공부 해서 졸업했어요. 그리고 또 40살 넘어서도 일할 수 있는 것을 보니까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경리를 보는 것도 전망이 있어서 두 달동안 공부를 했어요. 원장님이 감사하게도 탈북자라고 배려를 해서 컴퓨터 배우는 것을 시켜줬고 원장님이 처음으로 아파트 경리는 아니고 서무로 일할 수 있게 주선을 해주셔서 거기서부터 시작을 했죠.
안정적으로 고정수입을 보장받는 첫 직장을 잡기 전에 학원에 다니고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런 준비의 과정이 있었기에 누가 물어봐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김 씨도 다른 탈북민이 거치는 일용직 일을 하면서 보냈답니다.
김정원: 그 전에는 알바도 많이 했어요. 삽겹살을 굽는 곳에서 3개월 사우나에 가면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데 거기서도 일했고 여러 곳에서 알바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섬유공장에서 옷에 염색하는 그런 실험실에서도 보조공으로도 일했고요.
아파트 관리 사무소에서 경리 일을 1년 하고는 바로 탈북민 상담사가 됐는데요 올해로 8년째가 됩니다. 상담사는 대학을 졸업하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뒤에 가능했습니다.
김정원: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어요. 그래서 석사를 숭실대 교육학과를 들어갔어요. 심리상담을 전공할까 하다가 통일이 됐을 때 상담 일도 중요하지만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북한에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모르니까 통일이 됐을 때 우왕자왕할 것이라 생각하고 교육자로 활동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겼던 것같아요.
대학졸업에 이은 교육학 석사공부를 마치고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박사과정 3학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쉬지 않고 학위를 받기 위해 공부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김정원: 매주 토요일 가서 하루종일 공부하는데 재밌어요. 나름 목표가 생겨서 박사 과정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기자: 그 목표는 뭔가요?
김정원: 통일이 돼서 교육자로 활동하자면 한국에서 교수의 경험이 있어야 북한에 가서도 하고자 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교수가 되고자 박사를 공부하고 있어요.
올해 2월에는 남한사람 8명과 함께 공동으로 책도 출간했습니다.. 책 제목이 '드리밍 포인트'인데요. 각계 자기 전문분야에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들려주는 겁니다. 김 씨는 박사과정에 이르기 까지 그리고 탈북민 상담사일을 하는 주부로 남한생활에서의 경험을 3꼭지에 걸쳐 전하고 있습니다.
김정원: 우리나라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도 하는데 진짜 헬조선은 북한이예요. 저는 북한에서 살아봤는데 한국에서 살다보니까 한국은 정말 살만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되요. 제가 한국에 정착 잘할 수 있게 도와 준 것도 국민들이잖아요. 저에게 힘과 용기를 준 분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내가 앞으로 많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마음이라 기쁘고 그래서 더 많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김정원 씨. 그의 성공의 비결은 바로 이거랍니다.
김정원: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에게 온다. 준비를 안하고 불평불만한 하고 손 놓고 있으면 좋은 기회가 와도 잡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망설이지 말고 용기 있게 나에게 온 기회를 잡으면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저는 항상 하고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민 상담사 김정원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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