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이있습니다. 누구나 값 있는 인생을 살고 싶어하는데요. 그러기 위해 매순간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애쓰게 됩니다. 보통 보면 북한에서 당간부였던 탈북민이 남한에서도 적응을 빨리 하는데요. 오늘은 평양 출신의 김현정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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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정: 남편의 정치적 과오로 인해서 저는 그쪽 사회에서는 더 살 수 없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탈출한 거예요.
북한에서 상류층에 속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집안이 파탄나면서 중대한 결심을 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탈북하기 전까진 그가 속한 사회는 또 다른 북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현정: 저는 한국에 나오기 전까지 군복무를 하고 있었어요. 군대 내에서는 상급부대는 괜찮았지만 특히 대대 이하 중대나 소대 단위로는 군인들이 엄청 영양실조를 겪고 있던 그 시기죠.
10년 전 남한에 도착했을 때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 할 정도로 기억이 흐려졌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유로움입니다.
김현정: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숨김없이 말하는 것을 보도 충격을 받았어요. 서민들도 대통령이 잘못했으면 욕하는 것을 보고 자유가 활짝핀 나라구나 하는 것을 제일 먼저 느끼게 되더라고요.
북한에서부터 일반 노동자가 아닌 간부직에 있었기 때문에 40대 중반에 시작한 남한생활도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문화가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에 차이는 있었지만 습득이 빨랐던 겁니다.
김현정: 어짜피 남한사회가 탈북자를 나오라고 충동해서 나온 것은 아니잖아요. 본인이 원해서 왔기 때문에 저는 처음에 와서 한달동안 언어를 바꾸기 위해서 텔레비전을 24시간 켜놓고 매일 보면서 모를 때는 적어놓고 사전보고 습득하면서 언어사용 숙지했어요. 저는 나와서 3개월 되면서부터 대학강의를 다녔어요. 심지어 지방대학 대기업에 안보강의를 다녔어요. 그리러면서 정치학 박사님들과 많이 만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미래에 대해 조언도 많이 듣고 목표를 정하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기자: 강의 내용은 뭐였나요?
김현정: 정치체계도 하고 현재 북한의 안보상황과 남한의 안보 비교에 대해 강의 했어요.
비록 남한에서 걸음마 단계의 아이처럼 처음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김 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을 했고 인생경험을 살려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땅을 사고 파는 기획부동산에 취업한 겁니다.
김현정: 제가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식당이나 환경미화일은 자존심에 못한다 나는 포부를 가지고 나온 사람이어서 대담하게 전화를 했어요. 회장님이 일단 억양이 다르니까 어디서 왔냐면서 이력서를 써서 면접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면접을 보면서 10년 넘어 부동산 일을 하면서 탈북자가 부동산 일에 지원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면서 무슨 목적으로 이것을 하려고 하는가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설명을 했더니 간단한 자료책을 주면서 한달동안 공부를 하라고 하시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이 내가 대학강의를 다니고 공무원들을 만나니까 인맥을 통하면 일반인보다 더 잘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신 것 같더라고요.
일년 열심히 일해서 직장에서 성과를 내고 그에 대한 포상금으로 경제적 생활에는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고생이 심해 직장을 그만두고 딴 일을 찾게 됩니다.
김현정: 그래도 나는 한국에 나와서 우리한테는 몇 천만원이 큰돈인데 그 돈을 벌어서 서울 집도 옮기고 그랬어요.
기자: 벌이도 좋은데 그 일을 왜 안하셨나요:
김현정: 기획부동산이란 것이 계속 계약이 있어야만 그 회사 생활이 유지되더라고요. 그런데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어요. 텔레마케팅이라 전화를 하는데 억양이 다르니까 중국사람이 아니냐고 하면서 인격을 모독하는 그런 말도 해서 자존심이 상하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남한생활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고 맘이 통하는 남성도 자연스레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는 연애를 통해 가정도 꾸밉니다.
김현정: 저는 연애를 오래했어요. 재혼인데 문화도 틀리고 다른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랬죠. 첫사랑도 10년을 했거든요. 5년 정도는 별로 긴줄 모르겠더라고요. 남편은 2년 지나니까 가정을 합치자고 했는데 저는 좀 더 이 사람에 대해 알아보자 한 것이 그리 되더라고요.
안정적인 가정생활에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데요. 이제 남한 생활 10년입니다. 예전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데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힘든 남한적응을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 김씨의 말을 통해 모든 탈북민의 겪는 어려움을 알게 됩니다.
김현정: 아플때가 제일 외롭더라고요. 제가 한국에 나와 수술을 두 번 받았거든요. 처음에 백내장 수술받고 두번재 편도선 수술을 받았는데 한국에 있는 분들은 가족이 수술실까지 침대를 밀고 가는데 저는 가족이 없어 간호사분이 밀고 갔어요.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깰때는 너무 몸이 추웠는데 아무도 없으니까 너무 외로웠어요. 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가장 외로웠어요. 평생을 혼자는 못 살겠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북한에서 높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그리고 간부직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에서 적응이 비교적 빨랐던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더 중여한 것은 현실을 바로 보는 마음가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김현정: 처음에 환상과 기대를 갖고 나오잖아요. 17평 아파트에 들어가는데 북한에서 살던 집 거실의 절반 면적밖에 안되더라고요. 그때는 섭섭했는데 한달 두달 살다보니까 남한이 북한보다 발전했지만 여기서 태어나서 지하 전셋방에서 사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가 한국 사회를 위해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이런 임대아파트를 주고 정착금도 준 것이 고맙게 느껴지면서 눈높이를 수평보다 더 낮춰서 살아야겠다는 이런 생각을 갖게 되더라고요.
현재 김 씨의 남한생활이 이렇습니다.
김현정: 수영장도 다니고 독서실도 다니고 농업악기도 배우고 서예교육도 받고 있어요. 그리고 주말 되면 남편도 쉬니까 영화보러가거나 회식나가고 1년에 두 번 정도는 외국 여행을 하고 있어요.
기자: 어느 나라를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으세요?
김현정: 인도네시아 발리를 작년에 갔다 왔는데 호텔방 문 앞에 수영장이 있고 너무 좋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주석궁에나 그럴까 싶은데 너무 좋더라고요.
황혼을 바라보는 제2의 인생 김 씨는 남은 인생을 가급적 즐기면서 행복을 느껴갈 생각이랍니다.
김현정: 저는 노후 준비도 다 돼있고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내 가정을 평화롭게 지킨다는 이런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평양 출신의 김현정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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