맘먹으면 못할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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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같은 일이라도 때로는 힘들게 느껴지고 때로는 별거 아니게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왜 그럴까요? 지나고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 전부 내 맘 먹기에 달렸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은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보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는 40대 중반의 김나영(가명)씨의 남한생활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김나영: 제가 2007년에 북한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장사를 했어요. 그러다가 중국에 갔고 거기서 남한의 드라마를 보고 그때 마음의 변화가 와서 탈북을 결심했죠.

서른다섯 살, 김 씨가 고향을 떠나기 직전 했던 일은 장사입니다. 국경에서 중국 물건을 받아다가 황해도 쪽에 가서 팔고는 돌아올 때 식량을 사와서 이문을 남기는 일입니다.

김나영: 그때는 닥치는 대로 했어요. 일체 중국물건을 쓰고 살았기 때문에 북한에서 자체로 생산하는 것은 없었어요. 그래서 식량부터 시작해서 일상용품 모두 중국산 이예요. 양말, 속옷 등 매번 달라요. 한 번씩 모르고 갔을 때는 옷 티셔츠를 가지고 갔는데 시골사람들이다보니까 그 사람들이 신발을 다음에 가져오라고 해서 그런 주문을 받아서 신발을 팔았어요.

중국에서 봤던 남한 드라마가 김 씨가 알았던 남쪽 세상입니다. 물론 현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정도가 얼마나 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땅에 도착해서는 당황합니다.

김나영: 중국에 가서는 먼 친척집에서 드라마를 봤는데 모든 집들이 중산층 이상이었어요. 그런데 사회에 나오니 완전 다르더라고요. 제일 슬펐던 것이 나는 말을 알아듣는데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고 다시 말하라고 자꾸 그러는 거예요. 이런 것이 반복되니까 말하기 싫어지고 겁이 나는 거예요. 그게 젤 슬펐어요.

남한은 같은 말을 쓰지만 서로 통하지 않는 세상이었고 빈손으로 시작하는 김 씨에겐 중국에서 본 드라마 속의 남한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없는 살림이었지만 내 손길이 구석구석 갔던 정든 집이 그립기까지 했나봅니다.

김나영: 제가 살던 동네는 대도시였어요. 함경북도 청진시로 지금 사는 영구임대 12평만한 집이었는데 북한에선 사회주의라고 해도 내가 가꾸고 살았죠. 허물어질 정도의 집은 아니었어요. 못 먹고 못 입어도 깔끔하게 하고 살았죠. 그런데 영구임대 배정받고 첫날 가서는 너무 울었어요. 청소도 안 돼 있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덩그런 히 남겨진 느낌에 울었어요. 그리고는 현실하고 드라마하고 정말 다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정부에서 주는 영구임대주택에 살게 되는데 이 아파트는 상대적으로 저소득 가정 쉽게 말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입니다. 그렇게 남한생활을 시작하다 보니 좋은 것 보다는 실망스런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적극적으로 나서서 뭔가를 해보자는 의욕보다는 홀로 집안에서 고립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적응 기간이 필요했던 겁니다.

김나영: 학원을 갔는데 나는 알아듣는데 아이들이 내 말을 못 알아듣겠다는 거예요. 학원 강사도 노골적으로 못 알아듣겠다고 약간 놀리는 느낌을 받아서 처음에 기분이 너무 나빴어요. 웬만하면 사람 상대를 안 하려고 해서 임대아파트 살아도 주변 사람과 대화가 없었는데 6개월 정도 지나보니까 집집마다 차가 있고 놀러 다니고 하더라고요. 남한사람들은 비록 좋은 집에 살지는 않아도 북한하고 다르게 여가생활 문화생활을 하는구나 하는 것이 6개월이 지나면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고요.

남한사회에 안정적인 정착을 하기 까지 3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 기간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는 데요. 그중 하나는 닥치는 대로 뭔가를 배우자는 적극적인 마음이 생긴 겁니다. 일하면서 대학진학을 했고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스스로 찾아 준비하게 된 겁니다.

김나영: 대학교 졸업하고 자격증도 13개를 땄어요. 북한에서는 배우지 못했던 한국에서 필요한 자격증을 땃죠. 방학기간을 이용해 학원도 다니고요. 현재는 통일부 통일교육 강사로도 일하고요. 그리고 지금 임대아파트에서 벗어나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북한 청취자 여러분은 온갖 종류의 노력동원이나 각종 전투에 단련된 몸이라 몸 쓰는 일에는 자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한에선 일한 시간만큼 보수를 지급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려는 사람은 일을 많이 하면 되는데요. 자본주 사회의 노동이란 것이 그렇게 간단치 않습니다.

김나영: 북한에서는 노동시간 8시간 보장돼있고 여기선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고 자기 일을 해야 밀리지 않고 하는 데 북한에서는 그냥 슬슬 눈치보고 시간 때우기를 하다보니까 한국 노동이 힘들고 적응이 안돼서 알바도 수없이 바꿨죠.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했고 당원으로 지도원을 했으니 남한에 가면 경쟁력이 있을 것이다 또는 나는 토대가 안 좋아 많이 배우지 못했고 아무 기술도 없으니 남한에 가면 살기 힘들 것이다. 나름대로 각각 자신의 형편에 맞게 상상을 할 겁니다. 이런데 현실은 어떨까요? 이에 대한 답은 김 씨가 해주는 듯합니다.

김나영: 한마디로 말하면 북한에서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키는 것만 했는데 여기선 내가 맘먹고 결심하면 이룰 수 있다. 이런 것이 틀린 거죠. 이런 것을 알게 되고 사회에서 누구도 내가 뭘 하는지 관심을 안 둡니다. 제가 생각한 것이 목숨 걸고 힘들게 왔는데 노력하면 잘살 수 있겠다 두만강을 건너던 심정으로 살자 그런 각오 정신으로 뭘 못 하겠는가 이런 말을 합니다.

대학도 졸업하고 가정도 이루고 정부가 탈북자에게 주는 임대주택에서도 벗어났습니다. 더 좋은 곳으로 이사를 했단 말이죠. 이렇게 김 씨의 남한 생활은 하나하나 이뤄나가는 과정이랍니다.

김나영: 아직 완전히 꿈이 이뤄졌다고는 생각안하고요. 초기 정착과정에서 너무 어려웠어요. 북한에서도 잘했고 해서 남한에서 누구 못지않게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왔는데 시행착오가 많았단 말입니다. 그런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니까 잘 살수 있었단 말이죠. 나중에 오는 탈북자들에게 본보기가 돼서 이왕이면 목숨 걸고 온 한국에서 잘 살자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이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탈북여성 김나영(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