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젊은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서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 사람의 과거가 얼굴에 보인다고 하는데요. 이 말은 그 사람의 인생 여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얼굴 표정에 나타나기 때문에 늘 밝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은 대학생 장학 사업을 하는 우양재단의 박영철 씨를 소개합니다.
함경북도 출신의 박영철 씨는 1998년 대부분의 탈북자처럼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게 됩니다.
박영철: 저는 98년 아사자가 많이 났을 때 그때 두만강을 처음 건넜습니다. 두만강을 건넌 것은 다른 용건은 없었고 배고파서 먹고 살기 위해 건넜고
돌이켜 보면 쉴 세 없이 앞만 바라보며 달려온 세월입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수없이 겪어야 했고 좌절의 순간도 많았지만 한 번도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박영철: 당시 17세였고 가족은 아버지랑 동생이 북한에 있었습니다. 저 혼자 두만강을 넘나들었고 2001년 한국에 왔어요. 처음 두만강을 건넜을 때 중국 농촌에 가서 일하고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집에 가져다주고 돈이 떨어지면 다시 또 중국으로 가서 돈 벌고 그런 식이었어요. 3년 동안 4번 정도 강제북송을 당했어요.
영철 씨가 남한에 간 것은 그의 나이 20살. 후에 탈북한 동생과 함께 남한생활을 시작했고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이 펼쳐집니다. 나이도 있으니 바로 취직해서 돈을 벌수도 있었지만 영철 씨는 남한생활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는 학교로 갑니다.
박영철: 제가 북한에서 고등중학교 3학년에 중퇴를 했습니다. 학력이 인정돼서 남한에서 고등학교 2학년에 편입해 20살이었는데 세 살이 어린 동생들과 공부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바로 중앙대학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남한 정부는 대학 진학을 원하는 탈북자에겐 학자금 지원을 합니다. 한 학기에 보통 5천 달러 정도의 비싼 등록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생계지원비로 저소득 계층 에게 주는 매달 약 300달러로 생활 했지만 결코 넉넉한 금액은 아닙니다. 그래서 영철 씨는 대학 생활 내내 시간제 일을 해서 필요한 돈을 벌어야 했습니다.
학기 중에는 수업 따라 가느라고 바쁘고 방학 때는 돈 버느라고 정신없었던 생활. 이런 고생은 전부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일.
박영철: 남한에서 여기까지 오기에 어려웠던 과정이 있었습니다. 자기 노력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 대학에서도 아르바이트 다니고 돈 모으고 대학 졸업하고 나서는 취업하기 위해 엄청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한 달 동안 방 틀어박혀서 자기 소개서 쓰고 그랬어요. 북한에서처럼 굶어 죽는 일은 없지만 더 잘살기 위해 왔으니까 열심히 살아야죠. 한국 사회는 그냥 미래와 비전이 없이 살면 힘들거든요. 무엇 보다 중요한 것은 북한 사회랑 남한사회가 완전히 틀리다는 것을 먼저 인식해야 해요. 여기서는 북한에서의 몇 배로 노력해야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남한에 가서 영철 씨의 생활은 많이 변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굶지 않기 위해서 항상 속고 속이고 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남한 생활을 하면서 항상 밝은 모습으로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게 된 겁니다. 순간의 이익을 위해 거짓 행동으로 남을 속이게 되면 잠시 득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 이미 쌓아놓은 신용과 신뢰마저 한순간 날려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입사한 직장은 금융회사. 하지만 사람 만나는 것 좋아하는 영철 씨에게 그 자리는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됐고 1년을 반쯤 일하다 결국 현재의 직장인 우양재단으로 자릴 옮기게 됩니다. 형편이 어려운 탈북 청소년이나 청년을 선정해 장학금이나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곳입니다.
박영철: 제가 하는 일은 북한에서 내려온 탈북 학생들이 대학에 가면 장학금을 주고 교육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영어 교육을 많이 안하니까 학생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학원에 연결을 해주는 것이죠. 어학원을 개인 돈으로 다니자고 하면 너무 부담이 되니까 저희가 어학원과 협력사업으로 70% 학원비 지원을 하는 겁니다. 한 달에 한 100명 탈북 학생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기자: 남한생활 하면서 힘든 때 그런 고비를 극복하는 비결은?
박영철: 저는 단순합니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려고 하고 운동을 많이 합니다. 등산을 하거나 공원을 걷는 다든가 힘들 때는 그럽니다. 운동을 하면서 혼자만의 공간에서 내 몸을 가꾸고 단련하는 것이 정신적으로도 도움이 됩니다.
박영철 씨의 좌우명은 '밝게 살자'는 겁니다. 안 되는 일 붙잡고 고민하는 것보다는 되는 일에 몰두하고 똑같은 일을 접해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기분 나쁘게 또는 좋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니 이왕이면 나쁜 쪽보다는 좋은 쪽으로 본다는 겁니다.
남한생활이 이제 13년이 됐지만 아직도 주변에서 어느 순간에 가서는 탈북자인데 할 수 있겠어? 이런 걱정의 말을 하곤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면 고마움 보다는 서운함이 앞선다고 합니다. 영원히 뗄 수 없을 것 같은 북한출신이란 말. 하지만 이 때도 영철 씨는 좋은 생각만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박영철: 결혼이 최고의 순간이었고 첫 직장에서 월급을 받았을 때 가장 큰 행복감을 느꼈습니다. 남한정부에서 도와줬기 때문에 생활은 됐지만 취업해서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좋았습니다.
남한에 사는 2만 5천 명의 탈북자 중 한 명인 박영철 씨. 지금은 분단 조국에 살지만 훗날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제 몫을 하기 위해 회사일이 끝나면 대학원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는 웃음이 많은 건강한 청년입니다.
박영철: 저는 지금 사회복지 쪽에서 일하면서 많이 배워서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서 종합사회복지관을 설립해 운영하는 게 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결혼한 지 7개월이 됐는데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내 후년에 자녀를 보고 싶고 한 3명 정도 아이를 갖는 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우양재단에 근무 중인 박영철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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