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5월 12일은 국제 간호사의 날입니다. 영국의 나이팅게일의 탄생일을 기념해 간호사의 숭고한 정신을 잊지 말자며 국제간호사 협의회에서 매년 5월 12일을 기념일로 정한 겁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주인공은 남한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한 탈북여성 이현주 씨입니다.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인 이 씨는 탈북하기 전 검덕광업연합기업소에서 두 톤짜리 광차를 끄는 운반원으로 일합니다. 열심히 하면 공도 세우고 그러면 당원이 돼서 그곳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별동대에 가입한 스무 두 살 때부터 6년간 탄가루만 마시고 결국 두만강을 건넙니다.
이현주: 2002년 탈북 했습니다. 탈북 전에는 검덕광산에서 일했습니다. 광산에 가게 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기일이 김일성 추모행사와 관련돼 있었는데 당시 충성심을 요구했는데 추모행사에 참여하질 못했고 충성심이 아주 낮다고 해서 1996년 광산에 가게 됐습니다.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중국생활. 견디다 못해 결국 2008년 남한으로 가게 되죠. 그런데 남한에 가서도 혼란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현주: 처음에는 한국 땅에 도착했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습니다. 중국에 있는지 한국에 있는지 처음에는 멍한 상태였고요. 뭔가를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것 같아서 학원도 다니고 하나센터에 가서 컴퓨터도 배우도 한국 사회를 배워간 거죠.
중국에서 한국으로 가는 것이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위험한 길이고 몇 개의 나라를 돌아가는 긴 여정이기 때문에 말처럼 중국에서의 남한행이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사는 많은 탈북자 남한으로 가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현주: 중국에서 살면서 언제 잡혀갈지 모르는 불안한 삶을 살다가 한국에 도착해도 내가 이제 안전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 거죠. 너무나 그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까.
기자: 얼마나 그런 시간이 지속됐나요?
이현주: 한 달 정도는 그랬나 봅니다. 그나마 센터에 가서 뭔가 배우기 시작해서 적응이 된 거죠.
이 씨가 남한에서 대학에 진학하고 그것도 간호대학에서 공부하게 된 이유는 확고했습니다. 제일 하고 싶은 공부였고 일하면서 보람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았기에 망설임 없이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현주: 한국에 올 때 캄보디아에서 4개월 반을 있었는데 그때 한국에 가면 뭘 할까 곰곰이 생각했는데 북한에 있을 때부터 의학전문대학을 가고 싶었는데 가지 못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대학에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대학가겠다고 결심하고 대구에 있는 간호대학이 어디 있는가 알아보고 현장에 가면 말을 알아들어야 하니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니고 또 야간에는 요양보호사 학원을 다니고요. 1년 학원 다니고 대학에 가서 4년 공부했습니다.
남한 청년이 20대 초반에 가는 대학을 이 씨는 서른다섯 나이에 갔습니다. 다시 말해 배워야할 시기를 놓치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을 비유해 만학도 라고 부르는데요. 늦게 시작한 만큼 남들보다 몇 배를 애써 4년 시간을 보냅니다.
이현주: 일단 막연하게 간호사가 될 것이다 생각했는데 다니면서 왜 간호사가 돼야 하는지 배웠고 기독대학이다 보니 종교수업을 많이 듣는데 설교를 통해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자기 개발에 대해 배우게 됐고 남을 치료하기에 앞서 자기 몸에 대해 알게 되니까 너무 좋았습니다. 또 교수님들을 보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는 깨달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려움은 내가 예전에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야를 공부하고 북한에서는 러시아 어를 배워서 언어 차원에서 힘들었고 학과 아이들도 어려서 어려웠어요. 하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서니 그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환자의 병 치료를 위해 쉬는 날도 없고 밤낮없이 고생하는 간호사.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국가고시 자격증을 취득하면 병원에 취업해 간호사가 됩니다. 근무할 때 흰옷을 입어 백이의 천사라는 말도 있는데요. 이현주 씨는 그런 간호사 일이 자신에게 딱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이현주: 실습 나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실습 나가면 의사 선생님과 일하는 것이 아니고 간호사 선생님이 저희에게 알려주세요. 환자분들과 의사소통을 하면 아픈 환자는 화내고 얼굴 찡그리고 하는 사람보다는 내가 아프기 때문에 누군가 날 보고 웃어주는 사람이 좋거든요. 내가 웃으면서 다가가고 하나라도 더 간호해주고 그렇게 하면 그분들 마음의 문이 열려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좋았어요.
남한에는 외래어도 많이 쓰는데 북한출신이 어려운 의학용어 특히 영어를 많이 쓰는데 의사소통이 잘 될까 궁금하시죠?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하네요.
이현주: 병원에 실습 나가기 전에 대학에서 수업시간에 실습을 해요. 약타는 법, 약 사용법 등을요. 학교에서 일단 다 배우고 주사 놓는 법 혈관주사 근육주사 이런 것은 친구들끼리도 해보고 나갑니다. 대학 4학년 때 간호사가 보는 하에 저희가 하죠. 그 전에는 저희가 간단한 정리 말고는 직접 하는 것이 없죠.
이 씨는 학교 졸업과 함께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습니다. 대학 다닐 때부터 미루던 수술을 받은 겁니다. 북한에서 힘든 일을 많이 해서인지 아니면 중국 생활에서 얻은 병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건강상 문제로 취업은 잠시 미루고 있습니다.
이현주: 제가 학교 졸업하고 바로 디스크가 재발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병원에서 일하자면 오래 서있고 체력이 있어야 하는데 오랫동안 서있거나 무게 드는 것은 안 돼요. 그래서 지금은 통일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 다니면서 알바로 했는데 아이들 앞에서 가르치면서 나도 자극을 많이 받았죠. 그냥 아프다고 집에서 쉬는 것보다는 그런 활동을 하면서 건강을 챙겨가고 언젠가는 간호사 일을 해야죠.
이 씨는 "인생은 자전거를 타는 것과 같다 균형을 잡으려면 움직여야 한다"는 말을 가슴에 세기고 있습니다. 힘들다 그 자리에 멈추지 말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말이죠.
이현주: 저는 열심히 살면서 언젠가 뒤돌아 봤을 때 부끄럽지 않고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제가 어르신들을 좋아하는데 여건이 된다면 나중에 돈을 벌어 요양원을 만들어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간호사 지망생 이현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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