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이 있는 삶을 위해

0:00 / 0:00

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탈북여성이 있습니다. 이 여성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그렇게 지금처럼 즐겁게 살고 싶다고 하는 데요. 탈북여성 한애경 씨를 소개합니다.

한애경: 뭔가 더 내 자신을 업그레이드 하면서 이 사회에서 품격 있는 그런 삶을 살기 위한 준비라고 할까요? 준비과정을 밟고 있는 거죠.

현재 멋진 강사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고 있는 한 씨 그는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대중 앞에서 말하는 방법과 그에 필요한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황해도 옹진 출신의 한 씨는 고난의 행군 시절 갑자기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자 최후의 선택으로 도강을 합니다.

한애경: 북한을 떠난 것은 1998년 6월 이었어요. 갑자기 배급도 중단이 됐는데 장사할 줄도 모르고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거예요. 살기위한 탈출구가 두만강이었죠.

중국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너무 먹을 것이 없고 힘드니까 무작정 강을 건넙니다. 중국에서 8년을 숨어살게 되는 되요. 시간을 되돌려 당시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한국 사람을 만났던 겁니다.

한애경: 중국에 와서 3년 후에 한국 사람을 도시에 나가서 만났죠. 한국 사람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았기 때문에 꺼리면서 조심스럽고 그랬는데 어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데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란 겁니다. 주인이 손님을 접대하는 데 너무 신기해서 막 쳐다봤어요. 그때 한국 사람에게 받았던 인상이 북한 사람에게는 느낄 수 없는 인품 같은 것이 느껴지고 멋있다고 해야 할까요? 인상 깊었어요.

북한에서 교육받았던 남조선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중국을 떠나 다시 위험한 길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한애경: 가고는 싶었는데 왼지 한국에 가면 북한으로 못 갈 것 같은 마음에 중국에 살면서 북한에 돈을 보내주자 그런 마음에 있었던 거죠. 한국 가자는 결심을 하기까지는 쉽지가 않았어요.

언제까지고 중국에서 숨어사는 생활을 할 수도 없었고 먹고 사는 것은 해결이 됐지만 그보다 나은 생활이란 것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희망을 찾아 남한 행을 결심합니다. 신분이 보장되고 탈북자에게는 정착금도 나라에서 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죠. 남한에 가서는 바로 일을 합니다.

한애경: 제일 처음 한 일이 농산물 직판장에서 야채를 손봐서 매점에서 파는 일이었어요.

기자: 할 만하던 가요?

한애경: 재미있었어요. 시금치. 파 이런 것을 다듬어서 진열을 해 놓으면 손님이 사가고 재밌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한국사회에서 막일을 하지 말고 공부를 해서 이런 일보다 낫은 일을 해보자 도전을 해보자는 생각을 했어요. 직업전문학교에서 컴퓨터 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직장에서 한 2년 일하다가 보험회사 일을 하고 나주에 있는 고구려대학에서 관광복지학을 공부했습니다.

올해 3월, 2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했는데요. 공부를 시작한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많이 배워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고 대학공부를 통해 자신이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한애경: 거기서 많이 배웠죠. 탈북자가 한국에 오면 정부에서 다 지원해주고 하는데 처음에는 그런 제도를 잘 몰랐어요. 솔직히 지원을 받으면서도 어디서 어떻게 돈이 있어 지원을 해주는가? 했는데 대학공부를 하면서 사회복지제도에 대해 알게 됐고 한국보다 발전한 나라도 비교를 하게 되고 북한과 비교를 해보니까 한국복지제도가 너무 좋은 거예요. 빨리 통일이 돼서 북한도 복지제도 하에 사람들이 굶지 않고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모든 것이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한에 도착해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 바로 남한 나이 한 살이란 말들을 많이 합니다. 한글을 쓰면서 말이 같아도 이상하게 말이 통하지 않고 외국에 사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얘기를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통해 듣게 됩니다. 한 씨의 경우도 이런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한애경: 한국에 와서 살면서 놀란 적이 많았어요. 한국사회는 살아보면 볼수록 대단한 거예요. 해가 갈수록 놀라운 거예요. 일단 외래어가 많은데 알아듣지 못해 난감한 적이 많았어요. 예를 들면 콘도라는 숙박시설을 잘못 이해해서 콘돔이라고 불렀던 적도 있고 여기 나주곰탕집이라고 식당이 있는데 나주에서 나는 곰 고기로 만든 것인 줄 알고 갔는데 곰탕이 아니고 소고기 국이란 것을 알고 생소했고요.

북한과 중국생활 중 들어보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던 것은 모두 새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 남한생활을 시작했을 당시를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순간도 많답니다.

한애경: 바나나는 한국에 와서 처음 먹어봤는데 그냥 씻어 먹는 줄 알았는데 안에서 뭔가 물크덩하는 거예요. 그래 벗겨 먹었는데 후에 보니까 내가 먹었던 방법이 맞더라고요.

남한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일들을 몰라서 당황하는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게다가 남북한의 체제가 다르기 때문에 북한출신만이 남한생활에서 느끼는 일도 많답니다.

한애경: 북한의 사회 분위기는 서로 감시하는 그런 느낌인데 남한사회는 뭔가 자유로워요. 그리고 남한에 와서 터득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책임이 있는 자유. 내가 책임을 지는 조건 안에서 내가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어요.

기자: 예를 들자면 어떤 것일까요?

한애경: 예를 들자면 배움에 대한 것입니다. 저는 북한에서 살 때는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배우지 못했어요. 지역사회 단체에서 원하는 것만 해야 하지 내가 발전하려고 뭔가 하려고 하면 당위원회나 사로청위원회에서 제재를 줘요. 그런 것이 항상 불만이었거든요. 그런데 남한은 내가 원하면 뭐든 노력해서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너무 고맙고 감사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한애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