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북한에서 고급 당 간부였던 사람은 남한에 가면 일반 노동자였던 탈북자보다는 특별한 대접을 받을 수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는 상당히 가치가 있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 반문할텐데요. 오늘은 중앙당 39호실에서 근무했던 김명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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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일: 꿈을 현실에 맞게 자기 능력에 맞게 가지고 무엇이 행복한 가를 알면 북한 김정은 보다 더 나은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2000년 초에 탈북해 현재 남한에 살고 있는 김명일 씨입니다. 탈북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 RFA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자신의 심정을 밝힐 수 밖에 없었는데요. 북한에서는 특권층이었지만 그역시 북한 사회가 정상 국가가 아니란 것을 알게됩니다.
김영일: 저는 북한에서 중앙당 39호실이라고 김정일 자금관리실에서 일하면서 외국에 많이 나가봤가든요. 외국에 왔다갔다 하면서 보니까 우리 북한이란 나라가 너무 황당하고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했어요. 자유가 없고 여유가 없고 왕을 제외한 모든 백성이 한마디로 노예처럼 살고 있는가 하고 깜짝 놀랐어요.
우물안 개구리였다는 표현이 이경우 딱 맞을겁니다. 북한 내부에 있을 때는 몰랐지만 외부 세계를 경험하면서 김 씨의 생각은 서서히 변해갔고 그런 변화된 행동을 북한당국은 용납하지 않았던 겁니다.
김영일: 저역시 많이 답답한거죠. 왜냐하면 외국에 한번 갔다오면 거의 3개월동안 사상투쟁회를 해야해요. 외국에서 보고 들은 것 모든 것을 상부에 보고를 해야해요. 왜냐하면 예를 들어 김정남 암살사건을 일반 시민은 모릅니다. 대부분 외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그 정보를 알고 들어와서 자기 친척에게 가족한테 말하면 그 가족들이 몰래 다른 이들에게 얘기 하다보니까 그 소문이 퍼지거든요. 그래서 북한에서 그것을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단 들어오면 외국에서 네가 뭘 봤는가? 그것을 계속 물어봐요. 나중에는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합니다.
남한생활은 조금 모자란 20년이 됩니다. 이젠 많이 편해졌지만 당시 남한정착 초기에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북한에서는 큰소리 치면서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었다면 남한에 가서는 머리를 숙이는 입장이 됐기 때문입니다.
김영일: 맞습니다. 정확히 말씀하셨는데 내가 북한에서 누렸던 특권 즉 내가 맘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었으니까요. 남한에 오니까 그것이 안되는 거예요. 모든 것이 자본주의 논리에 의해 움직여야 하고 여기 정서가 남한분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온 외국인이나 중국 조선족에 대해 굉장히 차별합니다. 그분들은 표현 안하지만 탈북자들을 차별하거든요. 그것이 굉장히 안 좋았어요. 거기서 제가 많이 소외감을 느꼈고 대신 내가 한국에 사는 이유가 여긴 자유가 있잖아요. 내가 맘대로 할 수 있고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고 맘대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정도는 내가 감수를 해야 한다.
김 씨처럼 북한에 있는 당 간부들은 어느 정도 외부세계 소식을 아니까 말은 서로 안해도 나름 혼자선 여러 가지 생각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어느 곳에 살던 자신이 갖은 기득권 즉 현재 누리는 권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요. 김 씨도 선택의 기로에서 정치범 수용소로 가느니 한 번 모험을 걸자는 심정으로 탈북합니다.
김영일: 제가 외국에 다니다 보니까 외국 영화 특히 미국영화를 자주 봤어요. 록키, 쥬라기 공원 이런 것을 너무 재밌게 봤거든요. 나혼자 보면 괜찮은데 그 비디오 테이프 10개를 가지고 들어 왔어요. 사람 심리가 뭘봤으면 남에게 자랑하고 싶잖아요. 난 친구라고 보여줬는데 북한에서는 3명이 모이면 한명은 보위부 스파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잘 안다는 친구 10명 모임이 있었는데 그중 보위부 스파이가 한명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내사가 들어온거죠. 그것을 보위부 다른 부서에 있는 친구가 나한테 얘기 한거죠. 이번에 외국에 나가면 위험하니까 들어오지 말라고 얘기를 한거죠. 그래서 내가 외국에 나갔다가 탈북한거죠.
북한에서는 고급 당간부로 일했던 김 씨였지만 남한에 가서는 일반 탈북자와 별다를 것 없는 시작을 합니다. 물론 그의 경험을 인정해 일정기간 특별보호 대상으로 남한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지만 한시적이었습니다. 결국 남한사람들처럼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아 스스로 경쟁력을 갖추는 길밖엔 없었는데요. 그런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도 받습니다.
김영일: 일단 차별입니다. 첫번째는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차별을 해요. 물론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능력이 있다면 당연히 나를 귀하게 쓰겠죠. 그런데 그게 쉬운게 아니잖아요. 대부분 사람은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 쉽게 말하면 물에서 놀던 고기가 산으로 온 거예요. 그러면 일정한 적응기간이 필요한데 아무 것도 없이 사회에 나온 상태니까.
북한에서 외국을 돌아다니며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사업도 해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무역에는 도움이 안됐습니다. 결국 사업을 접고 현실에 맞춰 생활하기 시작하는데요.
아르바이트 즉 시간제 일도 해보고 막노동도 하면서 김 씨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답니다.
김영일: 인간이 간사한 것 같아요. 북한에서 김정일 비서를 하더라도 여기 일반 노동자 생활은 그들보다 열배는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첫번째는 자유가 있고 두번째는 사회제반 기본시설이 잘 돼있잖아요. 여기처럼 사우나를 가고 그런 생활을 하자면 북한 경제가 남한만큼 발전해야 누릴 수가 있는데 특정한 것은 김정은이 누릴 수 있지만 남한처럼 모든 것을 돈이 없기 때문에 남한 평민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북한에 있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남한에 가서 큰 재벌이 도;겠다 이런 생각보다는 남한에 가서 자유를 누리고 나의 행복을 위해 난 오겠다 그정도 생각을 하고 와야지 …
남한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예를 얻은 것도 아니지만 현실에 만족하고 있는 김 씨. 그는 북한에서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답니다.
김영일: 김일성, 정일, 정은이 평생 소원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는데 여기선 너무 살찔까봐, 고혈압 걸릴까봐 안 먹어요. 여기 와서 막노동을 해도 그 이상의 생활은 이미 보장돼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 난 여기 와서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았다. 너도 알지 않냐 거기선 매일 매일 나의 모든 행동에 대해 보고를 하고 감시를 받고 어딜 가든 승인을 받았지만 여기선 그런 것이 없다. 난 자유의 소중함을 여기 와서 느꼈다.
김 씨 북한에서 태어나 탈북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공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남한에서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의지대로 그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으면서 가족의 행복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김영일: 나의 나머지 삶은 나의 행복, 아주 작은 것에 감사하고 매사에 감사하고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 봉사한다는 생각이고요. 두 번째는 나중에 내 자식이 아빠는 평생 무엇을 위해 살았나요? 하고 물어볼 때 나는 이 순간 북한동포를 생각하고 뭔가 하고 있다는 지금 이순간의 모습이 가장 행복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북한 중앙당 39호실에서 근무했던 김명일(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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