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매일 같은 말을 자주 하는 것이 좋답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중요한 존재다. 사람들은 정말 나를 좋아한다. 이런 말을 자꾸 자신에게 반복하다 보면 남 앞에 섰을 때도 당당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합니다. 오늘은 자신의 꿈 앞에 당당해지고자 하는 행복한 인쇄소 사장 김진성(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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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성: 삶의 목표가 있는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까요? 내가 가야할 길을 정해 놓고 그 삶의 목표를 따라 가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김 씨가 자신의 행복한 모습을 발견하기까지는 북한에서의 힘든 생활을 이겨냈기 때문입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김 씨는 선생님이 된 것이 아니라 장사꾼이 됩니다. 고난의 행군 시절이어서 모든 것에 우선해 먹고 사는 문제가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중국을 드나들게 됐고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김진성: 세상을 알게 된 거죠. 북한은 항상 뒤쳐져 있고 강 하나 건너에 있는 중국은 날로 변혁이 돼서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강건너 중국은 중국은 개혁개방을 해서 자유도 있고 잘사는데 우리는 왜 못사냐 이런 의심을 갖게 된거죠. 그래서 탈북하게 된거죠.
김 씨는 2010년 두만강을 건너게 됐고 그 이듬해 남한행을 하게 됩니다. 신분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던 것이 제일 큰 이유였고 중국보다는 더 잘 사는 남한에서 새로운 인생을 맞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처음 남한땅을 밟았을 때는 자신의 결정이 옳았구나 하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웠습니다.
김진성: 인천공항에 내리니까 중국은 대상이 안되게 눈에 보이는 환경이 좋아요. 너무 깨끗하고 아름답고요. 인천대교를 건너 지나오면서 보니까 북한이 40억 달러를 들여서 만들어 자랑하는 남포관문보다 몇배는 좋더라고요. 그것을 보면서 한국의 위상이 이렇구나 이런 것을 느꼈어요 그리고 맞이해주는 사람들도 친절하고 그래서 좋았어요.
시작부터가 좋았던 남한의 첫 인상. 이제 열심히 일해서 잘 살 것이다 이런 생각 뿐이었습니다. 북한에서 목숨걸로 국경선을 넘었고 고향에서 고생하던 것만큼만 해도 절반은 성공했다고 계산이 섰던 겁니다.
김진성: 남한에 집을 받아 나와서 이제부터는 무슨일을 하면서 살것인가 궁리를 하다가 인맥이 없으니까 하나원 동기들하고 연결을 해서 일용직 노가다 일부터 시작했어요. 평택 공사장, 파주 공사장 등 여러 곳을 일용직으로 다녔어요. 새벽 6시에 일어나 나가서 체조하고 5시면 퇴근 하는 일용직 일을 하다가 어느날 친구 소개를 받아서 서울 톨게이트에서 불량한 화물트럭을 단속하는 일을 했어요. 그런데 월급이 150만원이었는데 저축이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또 나와서는 도시가스 배달을 했어요. 트럭에 가스통 50KG짜리를 30개씩 싣고 배달을 하는데 일을 안해본 사람이 하려니까 한달하는데 죽을것 같았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안되겠다 싶어서 나왔죠.
새벽에 일어나서 몸을 움직인만큼 집으로 돌아갈 땐 노동일에 몸이 무거웠지만 꼬박뽀박 현금을 받아 돈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사실 큰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돈을 쓸 시간이 없어 그대로 책상 서랍에 넣어두니 시간이 지나면서 돈다발이 쌓이게 된거죠. 그런데 그것을 한장 한장 세어 보니 액수는 생각처럼 많질 않았습니다. 또 문제는 있었는데요. 남한에 간 모든 탈북자가 경험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입니다. 부모형제 두고 온 설움 혼자서 낯선 곳에 사는 이질감 등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계속 일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김진성: 인천에 자동차 부품 생산공장에서 12시간씩 일을 하는데 일이 힘들어서 못하겠더라고요. 기술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됐죠. 주위에서는 자꾸 대학을 가라는 겁니다. 북한에서도 대학을 다녔으니 공부를 하라고 하는데 내가 40살에 왔는데 무슨 공부를 하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가 캐나다요. 영국이요, 네덜란드요 이런 데로 탈북자들이 많이 떠나 갔거든요. 난민으로 다시 간거죠. 그래서 내가 독일까지 갔었어요. 2013년에요.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리니까 환경이 우리 인천공항에 비교가 안되게 어지럽더라고요. 그래서 거기서 잘못 왔다 그리고 독일에서 3개월을 생활하면서 내가 너무 좋은 한국을 떠났구나.
2년을 일용직 막노동 현장을 옮겨 다니가다 결국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한국 국적을 가지고 생활하던 사람들이 영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옮겨 가면서 한참 남한 탈북자 사회에서는 외국으로 또 다시 난민신청을 하는 철새처럼 둥지를 옮기는 것이 유행이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남의 말을 듣고 안 것이 아니고 체험을 하고 안거죠.
김진성: 저는 북한에서 살고 남한에 살다가 독일에 가보니까 남한이 엄청 좋은거예요. 어떤면에서인가 하면요. 우선 제가 돈이 없었는데 걸어다니다가 목이 말라서 물을 먹으려고 한국처럼 생각하고 가게 같은 곳엘 들어갔어요. 정수기 물을 먹자고 하니까 거기는 정수기 자체가 없더라고요. 여기는 길가다가 물 좀 얻어 먹자고 하면 드세요 이러잖아요. 그런데 독일은 물은 돈을 내고 사먹어야 하고 선진국이 한국보다 사람들이 더 인색하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고 말이 안통하고 만약 정착을 한다고 해도 독일에서도 한국에서처럼 일용직을 하면서 살아야 하거든요. 이게 아니다 죽어도 한국가서 일어서야하겠다 이런 결심을 하면서 뼈저린 후회를 하고 들어왔어요.
독일 즉 도이칠란트는 물을 사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리에 화장실을 이용할 때도 사용료를 내야 합니다. 남한과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는 일단 언어라도 통하는 남한에서 다시 한 번 도전을 해보자는 맘을 굳히고 귀국합니다. 사람은 같은데 생각이 바뀌자 전혀 딴 사람이 된 듯 열정적으로 시간을 쪼개 쓰게 됩니다.
김진성: 한국에 들어와서 집이 없으니까 김포에 방을 하나 얻어서 거기서 새벽 2시에 나가서 6시까지 우유배달을 했어요. 낮에는 대학원에 다녔어요. 그러면서 북한이탈지원재단에다가 취업을 시켜달라고 이력서를 냈어요. 그런 과정에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한거예요. 충무로에 있는 인쇄업체인데 이분이 실향민 2세인데 일을 한 번 안해보겠는가 해서 제가 찾아가 면접을 봤어요. 인쇄는 제작을 하는 것인데 계산을 잘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그깟것 못하겠는가 하겠다고 했죠. 그리고 6개월을 하니까 사장님이 저를 보면서 너는 남 밑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다 저한테 그러시는거예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한다고 했죠. 저는 북한에서 가장 뒤떨어진 부분이 인쇄부분인데 아이들이 보는 책이 너무 한심하다 글자도 잘 안보이고 종이가 찢어지고 너무 한심하거든요. 내가 북한에서 영어를 배울 때 영어사전이 없어서 그걸 구하지 못해서 너무 고생했거든요. 여기선 스마트폰으로 영어 단어를 다 찾을 수 있지만 북한에선 일부만 핸드폰이 있거든요. 그래서 사장님한테 영어사전을 만들어서 북한에 좀 들여보내고 싶다. 이런 말을 했어요.
제 2의 고향 오늘은 행복한 인쇄소 사장 김진성(가명) 씨가 인쇄소를 차리게 된 배경 이야기를 전해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김 씨가 짧은 기간 사업에 성공한 비결에 대해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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