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가서는 북한에서 출신성분 때문에 할 수 없었던 일을 우선 하고 싶어 합니다. 공부를 하고 싶었던 사람은 대학진학을 하고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 사업에 모든 것을 쏟아 붓습니다. 오늘은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탈북여성 최수경 씨의 이야기 전해드립니다.
최수경: 어렸을 때는 음악조, 영화조에 많이 뽑혔는데 끝까지 가기 못하고 중간에 탈락됐어요.
재능이 있다고 뽑아놓고선 자꾸 중도에 탈락을 시켜버리는 통에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유를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아버지 출신성분 때문이었습니다.
최수경: 아버지가 어렸을 때부터 하시는 말씀이 나는 고향에 못갈 것 같다 그러니까 자식들 중 누구라도 고향에 갈 수 있다면 내가 전쟁 중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고 전해라 하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아버지 형제들 이름과 나이를 늘 말씀하시고 언제든 물어보면 아버지 고향을 말할 수 있어야했어요.
고난의 행군 시절을 북에서 무사히 넘기고 탈북해서 중국에서 신분을 감추고 살다가 2003년 남한에 갑니다.
최수경: 그때 여러 가지 만감이 교차했죠. 아버지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우선은 신분문제가 해결이 됐고 일한만큼 자기 것이 된다는 것을 안 이상 깊이 생각할 필요가 없었는데요.
최수경: 처음 오자마자 건설현장에 가서 벽돌 쌓는 일 보조를 했고요. 식당일도 했고, 회사 다녔고 결혼정보 회사에도 다녔고 지금은 건설현장에서 총무를 하고 있습니다. 쉬지는 않았어요. 열심히 일했어요.
기자: 지금 나이가 몇입니까?
최수경: 53세예요.
처음 남한에 가서는 특별한 기술이 없어서 단순노동 즉 몸을 써서하는 일을 하다 보니 체력이 기본이 돼야 견딜 수 있었습니다. 조금 심하다 싶으면 다음날이면 온몸이 쑤시고 몸이 무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죠. 일의 강도가 어디가 세냐고요?
최수경: 여기가 더 세요.
기자: 비교를 하자면 어떨까요?
최수경: 북한에 있을 때는 농사일을 했으니까...그때도 힘들었죠. 힘들었는데 일이 힘들어도 공기가 좋아 그랬는가 아니면 나이가 어려서 그랬는지 자고 일어나면 피곤하다 이런 것을 몰랐는데 한국에 오니까 노동시간도 길고 나이도 북한에 있을 때보다는 들었고 하니까 일하기가 힘든 거죠.
탈북자는 남한에 가면 나라에서 집도 주고 학교도 무료로 보내준다고들 합니다. 그것은 탈북자 지원법이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고 원하는 사람은 학자금 지원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 씨는 얼핏 들어보면 일만 하면서 힘들게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하는데요.
최수경: 아무튼 여기는 자유가 있잖아요. 열심히만 살면 다 내 소유가 된다는 거죠. 북한에서는 내가 일하면 거의 국가에서 다 가져가고 살기에 필요한 모든 것이 없으니까 자력갱생하고요. 북한에 비하면 여기가 살기 좋죠. 북한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너무 핍박을 받고 결혼생활도 힘들어서 거기 생각은 하기도 싫어요.
어울리는 말일지는 몰라도 "평양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란 말이 있죠? 뭐든 남이 시켜서 하는 일은 힘든 법이고 남들이 다 꺼려하는 힘든 일이라도 내가 좋아 하면 힘든 줄 모르고 하는 법입니다. 최 씨는 몸이 힘들어도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답니다.
최수경: 큰애가 18세 작은 아이도 19살 됐을 때 데려왔어요. 여기는 애기들 옷 사러 가면 얼마나 예쁜 것이 많아요. 우리 애들은 이런 옷을 한 번 못 입혀보고 키워서 마음 아프죠. 내복도 어른 것 빵구 난 것을 성한 데를 골라 잘라 아이들 만들어주고요. 딸아이도 새것을 사달라는 말은 못하고 엄마 옷으로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기자: 자녀분들은 대학 다 졸업해서 취직을 했습니까?
최수경: 네, 아이들은 열심히 살아요. 큰아이가 대학졸업해서 내과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아들도 컴퓨터로 하는 선반 깎는 일을 하고 있어요.
탈북자가 남한에 가면 영웅대접을 받으면서 큰집에 살고 호화생활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최 씨도 여느 탈북자들처럼 새벽에 일어나 출근하면 저녁이 돼서야 들어오는 일을 합니다. 예전에는 주 6일을 일했지만 요즘은 토요일과 일요일은 여가생활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답니다.
최수경: 여기 한국 오니까 생활총화 없고 정치학습 없고 조직 생활이 없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북한에서는 가정주부들도 여맹단체가 있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학습 가야 하는데 안가면 위원장이 와서 뭐라고 하고 그랬는데 이젠 없어 좋고 내가 하고자 하면 뭐든 할 수 있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어떤 때 보면 삶이 너무 치열하고 경쟁을 하니까 북한보다 순수한 면이 없다 그런 생각도 들고요.
최 씨에게 하루 일과는 어떻게 보내는지 들어볼까요?
최수경: 제가 새벽 4시에 일어나서 4시 반에 집에서 출반하면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작업장이 있어요. 그리고 5시 반에 퇴근해서 집에 오면 7시 정도 돼요. 요즘은 주말농장을 100평 빌려서 저녁에는 거기 가서 곡식 크는 것을 보면 재밌잖아요.
기자: 뭘 심으셨어요?
최수경: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들깨, 수박, 참외, 오이, 가지, 고추, 상추, 이런 쌈 종류 다 심고 몇 십 가지를 거기다 심었어요.
집에서 차로 5분, 4킬로 거리에 농장이 있습니다. 북한으로 치면 소토지 농사를 허가된 땅에 가서 한다 이정도 설명하면 이해하실까요? 도시가 전부 아스팔트 시멘트로 둘러 싸여서 개인이 돈을 지불하고 원하는 만큼 땅을 빌려 곡물을 심는겁니다. 물론 시장에 가서 사먹을 수도 있지만 자기가 먹을 남새를 직접 키워 먹는 다는 즐거움이 있다는 거죠. 지금은 공사장에서 총무일을 보고 있지만 기회가 되면 자신은 음식점을 차리는 것이 꿈이라는 최 씨. 마음이 급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최수경: 아버지 소원을 어느 정도 이뤄드렸다고 말하고 싶어요. 고모랑 작은 아버지 살아계실 때 아버지 얘기를 많이 했고요. 아버지가 살아오시지 못했지만 자식으로 그 유언을 해결해 드린 것 같아 마음이 좋아요.
오늘도 일이 끝나면 심어놓은 남새에 물을 주고 잎이 자란 깻잎을 따고 콩을 따서 집에 옵니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찾는 최 씨는 행복합니다.
최수경: 언제든 내가 준비가 돼있으면 일감은 많잖아요. 뭐든 알고 있고 자격증도 많고 내가 항상 깨어있고 준비가 돼있으면 길이 열릴 것 같고 해서 꾸준히 배우고 도전하고 싶어요.
제2의 고향 오늘은 회령 출신의 최수경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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