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대부분의 탈북 젊은이들은 남한에 가서 대학진학을 하게 되고 대학에서 학과 선택을 하면서 미래 자신의 진로를 결정 합니다. 올해 29세의 탈북자 김영민(가명)도 남한에서 법과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법학 대학원에서 변호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비 변호사 김영민 씨의 이야기입니다.
14세 때 삼촌을 따라 탈북하게 됐다고 했는데 삼촌이 어른도 아닌 김영민 씨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간 이유는?
김영민: 1997년은 북한 주민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북한이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울 때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어린 나이였지만 가족의 생계를 위해 무작정 삼촌을 따라 나섰던 겁니다.
김영민 씨가 원해서 갔던 것이군요.
김영민: 제가 결정을 해서 따라갔었고 또 그땐 형이 아팠고 어머니는 집안을 돌봐야 했기 때문에 저밖에는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정 형편상 부득이 하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구성원으로 삼촌을 따라 나섰습니다.
어린 나이에 중국에서 생활은 어땠습니까?
김영민: 중국 생활도 쉽진 않았습니다. 거기서도 북한만큼이나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북한에서와 다른 점은 하루 세끼 먹으면서 배는 곯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좋았지만 반면 불법 체류자로 중국 공안을 피해 살아야 했던 것은 힘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삼촌과 같이 생활 했습니까?
김영민: 아니요. 삼촌은 두만강을 건널 때 사망하셨고 저만 기적적으로 살아서 중국엘 갔습니다.
중국에서 어린 친구가 불법 신분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요?
김영민: 네, 당시 많이 힘들었고 가족과 헤어져 혼자 외국에서 산다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달리 방법이 없잖습니까? 당시 14세 이지만 이미 철이 들었고 누구하나 의지할 곳 없는 외국 생활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내야만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어떤 일을 했나요?
김영민: 초기에는 한족을 따라 따니면서 막노동 일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끼니를 해결 했습니다. 나중에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의 도움으로 단체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한국에는 어떻게 가게 됐나요?
김영민: 더 이상 중국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됐기 때문에 한국에 온 것입니다. 제가 있던 곳에는 북한 어린 친구들이 많았는데 마을 사람이 저희 정체를 알게 돼서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가 갈 곳은 한국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를 돌봐 주는 분의 도움으로 몽골을 거쳐 한국에 왔습니다.
김영민 씨는 현재 남한에서 법학 대학원을 다니는데요. 북한에서는 정규 수업을 받지 못해서 남한에 가서도 학교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을 텐데 자기만의 공부 방법, 비결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김영민: 비결은 딱히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학습 공백기를 채우는 공부를 하느라 애를 많이 먹었고 방법은 무식하게 앉아서 오래 버티고 책을 가능한 한 많이 보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루 몇 시간 공부했고 수면 시간은 얼마였다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김영민: 자고 일어나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은 전부 공부에 투자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자는 시간 빼고는 공부 했습니다.
사람이 계속 책만 본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본인은 공부가 적성에 맞는 것 같습니다.
김영민: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공부를 해오고 있는데 쉽지 않습니다. 제가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도 사실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이고 공부가 체질에 맞고 즐거워서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쫒아가다 보니까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그것을 견디며 사는 것입니다.
법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데 법조인이 되기 위한 앞으로의 과정은 어떻습니까?
김영민: 이제 3년 정도 공부를 더 해야 하고 졸업하면서 변호사 시험을 보는 데 그 시험에 합격하면 변호사로 활동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한 3년은 열심히 해야죠.
변호사란 직업도 세분화 돼 있는데 어떤 분야의 변호사가 되고 싶습니까?
김영민: 저는 특별히 인권 변호사에 관심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북한에서 살았고 중국에서도 탈북자의 인권유린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우리 탈북자들을 법률적으로 도와줘야한다는 생각에 법학과를 택했고 종국적으로 북한인권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생굴곡이 심했다고 보이는 데 앞으로 개인의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김영민: 저는 남한에서 공부하고 있지만 북한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고 이런 것들을 종합해 봤을 때 저는 남북한의 통일을 위해 살아야할 운명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남북한이 통일이 되고 나서도 작지만 도움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사명감에 넘치시는데 결혼과 자녀 계획은 어떻게 세웠습니까?
김영민: 구체적 계획은 없고 가능한 한 학교는 마치고 결혼 할 것 같고 자녀는 합의 하에 낳아야 하겠지만 제 욕심 같아서는 3명 이상 낳고 싶습니다. 저도 형제가 많은 집에서 태어났거든요. 형제가 많다는 것이 제게 큰 힘이 되더라고요. 힘들 때, 기쁠 때 항상 힘이 되어주기 때문에 부모가 다 떠난 뒤에도 형제끼리 의지하면서 살 수 있잖아요? 그래서 결혼 하면 아이는 가능한 한 많이 낳을 생각입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남한에서 법학 대학원을 다니고 있는 김영민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사이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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