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뤄진다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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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누구나 아픔을 하나쯤은 가지고 살아갑니다. 과거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워 꿈에서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북한의 고난의 행군시절. 탈북여성 김태희 씨는 현재 남한에서 언젠가는 이뤄진다고 믿는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고속도로 통행요금 수금원으로 일하는 김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김태희: 경북 영주라 북한 사람이 와서 있는 것이 별로 없고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 사람을 많이 만나야지 여기 생활을 배우고 익히기 때문에 저는 지인들이 전부 한국 사람이지 북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함경북도 회령 출신의 김태희 씨가 남한에 간 것은 2011년. 그 때 나이가 40대 초반입니다. 남한생활은 그야말로 마음만 달리기 선수처럼 뛰지 실상은 거북이 경주랍니다.

김태희: 별로 해놓은 것도 없고 한 것도 없는데 빨리 지나갔어요. 내가 한국에 와서 정착을 잘하려고 노력도 하고 하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아요. 그럼 하고 싶은 일도 못하잖아요.

탈북까지 이어진 자신의 과거는 분명 계획하고 원했던 일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김 씨의 운명이 그랬던 겁니다.

김태희: 고향을 떠난 것은 마지막에 아들이 죽었어요. 98년에 아들을 잃었어요. 남편도 죽고 시어머니도 죽고 일가족 7명이 다 굶어 죽었어요. 저는 라진 선봉이요. 청진이요 돌아다니면서 하루벌이 장사를 하는데 오면 한명 두 명 굶어 죽어 나가는데 마지막에 내 아들이 굶어 죽었어요. 돈을 벌어서 시누이 집에 아들을 찾으러 갔는데 아들이 죽은 겁니다. 그 땐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어요. 친구 집에서 한 주일을 울면서 있는데 중국여자가 와서 돈 벌러 가자 3개월만 돈을 벌면 북한에 돌아와서 큰 장사를 할 수 있어 하는 그 말에 탈북을 했습니다.

중국 생활 10년 후 남한에 도착했을 때는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지만 이미 망가져버린 건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래도 뭔가 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김태희: 제가 처음 한국 와서 시작한 것은 컴퓨터를 6개월 배웠고 그리고 화장품 판매원으로 두 달을 일하다가 아파서 일을 못했어요. 그러다가 간증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초등학교나 교회에서 강의를 하다가 마침 통일부 교육원에서 전문 북한 강사를 뽑는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북한식으로 말하면 선전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 내용은 분명 다를 겁니다. 평범한 탈북자가 남한에 가서 대중 앞에서 말을 한다는 것은 이런 겁니다.

김태희: 북한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북한 현실을 듣고 싶어 하잖아요. 북한 실상에 대해 강의했죠.

남한생활 첫해는 컴퓨터를 배웠고 2년 차에는 가정방문 판매원으로 일하다가 건강상 이유로 일을 그만 두고 북한의 현실을 전하는 강사로 일했지만 다시 물건을 파는 판매원으로 돌아갑니다.

김태희: 3년차에는 사업에 뛰어들었어요. 기능성 속옷을 파는 방문 판매원이죠. 밤낮없이 정말 열심히 했어요. 영주에서 여주까지 그리고 서울까지 공부를 하면서 했어요. 1년 정도는 미쳤다는 소릴 들을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

기자: 돈을 좀 버셨어요?

김태희: 많이 벌지 못 했습니다. 돈이 돈을 번다고 돈 없이 시작하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김 씨가 판매원으로 일한 곳은 자기가 판 것만큼 수당을 받는 일이라 정해진 월급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정한 수입이 없었고 매일 장거리 운전에 기름 값이 만만치 않았지만 힘든 줄도 몰랐답니다. 일단은 씨앗을 뿌리는 마음으로 나중에 열매를 맺어 수확을 하게 되면 부자가 된다는 꿈을 꾸고 있었으니까요.

김태희: 네, 제가 차를 사서 영주에서 여주까지 한 시간 40분 정도 걸리는 데 이틀에 한 번 가서 교육받고 활동하고 그렇게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다가 위에서 무너지는 바람에 다 접게 됐어요. 사업하다 안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하나 안 되면 다른 것을 찾고 그렇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너무 사는 것이 힘들어서 형사를 찾아갔어요.

사업은 망했는데 운전만큼은 정말 원 없이 실컷 했답니다. 기름이 떨어질 때마다 채워가면서 달렸는데요. 남한 도로에서 운전하는 것이 무섭지 않았는지 청취자 여러분도 궁금하시죠?

김태희: 아니요. 저는 운전하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았습니다. 제가 좀 겁이 없거든요. 저는 북한에서는 생각도 못하고 중국에서는 꿈도 꾸지 못하고 했지만 하나원에 있을 때 이론 시험을 다 치고 나왔고 나와서 한주일 만에 운전면허를 땄어요.

김 씨는 남한생활 시작 초기에 바로 자동차를 삽니다.

기자: 자기 차를 운전하니까 기분이 어떻던가요?

김태희: 너무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처음 시내골목길과 농촌길에서 연습을 하다가 바로 고속도로를 운전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생각도 못하고 중국에선 10년을 살았지만 꿈도 못 꾸던 것을 한국에서 운전하게 돼서 너무 좋았죠.

일이 잘 안되고 매달린 것이 신변보호 담당관인 형사. 화장품 한 상자를 사들고 경찰서에 가서는 화장품을 사 달라고 했는데요. 형사가 화장품을 구입했을까요?

김태희: 형사들이 안 사줬죠. 두 시간 정도 얘기 하고 돌아왔는데 다음날 전화가 왔어요. 톨게이트 수금원 모집이 있는데 안가겠는가 그러더라고요. 제가 생활비를 마련해야 할 급한 마음에 바로 출근을 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습니다. 한 일 년 반 됐습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이뤄진다면 좋겠지만 사람 사는 것이 자기 맘처럼 잘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남한정착도 쉬운 것이 아닌데 의욕적으로 하는 일마저 잘 안 될 때는 좌절하기 마련인데요.

김태희: 힘들다고 생각하면 다 힘들죠. 그렇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까 힘들다고 그렇게는 안 생각하고 중국에서 10년 반 자본주의 생활을 했으니까 내가 벌어야 일한만큼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힘들다고 좌절하고 하진 않았어요. 사람은 가다가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는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넘어졌다고 해서 저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갈 길을 용기 있게 가면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요.

현재 김 씨는 고속도로 이용 요금을 받는 수금원으로 일합니다. 벌써 1년 반이 됐는데요. 하루 3교대 일이랍니다. 그러니까 8시간씩 조를 짜서 돌아가 고속도로는 365일 24시간 하루도 쉬지 않고 열려있다는 말이죠.

김태희: 뭐 같은 근무는 2일 연속이 안 됩니다. 매일 근무가 다릅니다. 새벽에 나갈 때는 여기서 4시에 일어나서 준비해서 5시 반이면 나갑니다.

탈북과 중국에서의 강제북송 그리고 재탈북 이 과정에 김 씨의 몸은 안으로 골병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잘 표가 안 나지만 장기가 완전히 망가져 제 기능을 못한다는 겁니다. 이 말은 힘든 육체노동은 할 수 없다는 건데요. 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김태희: 아직 이뤄지진 않았지만 전 꼭 된다고 봅니다. 내가 너무 고생했거든요. 전 북한에서 너무 고생하면서 거지생활까지 했어요. 북한에서는 아들을 잃었고 중국에 아들이 하나 있는데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당당한 엄마 노릇을 하는 것이 꿈입니다.

꿈은 이뤄진다. 이것은 김태희 씨가 늘 하는 말이랍니다.

김태희: 제가 목표를 가지고 삽니다. 내가 그 어떤 것을 간절히 원하고 항상 머릿속에 가슴이 품고 살면서 이뤄진다고 믿습니다. 그게 나의 희망이거든요

제2의 고향 오늘은 경상북도에 사는 탈북여성 김태희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