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고향] 박사까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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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2의 고향 이 시간 진행에 이진서입니다. 남한에 간 많은 수의 탈북자들이 나이와 상관없이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학을 졸업하면 석사과정을 거쳐 박사학위까지 도전을 하는데요. 오늘은 탈북자 전문 상담사 일을 하면서 대학공부를 하는 30대의 이설희(38.가명)씨의 남한생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이설희: 자꾸 도전을 하고 싶고 공부할수록 성적도 나오니까 너무 기쁩니다. 일도 잘되고 너무 자유롭고 하고 싶은 것을 다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이설희 씨는 함경남도 금야군 예전에 영흥군이라 불린 곳에 살았습니다. 이 이 씨는 1999년 12월 탈북 했고 2004년 중국에서 한 번 강제북송을 당했지만 남들처럼 북한에서 감옥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이설희: 2003년 11월인가 김정일 방침이 떨어졌습니다. 중국에서 살다가 처음 잡혀 나온 사람은 용서해주라고 해서 운 좋게 나왔습니다. 한국에 가려던 사람, 몇 번 잡혀간 사람은 다르게 취급했었어요. 그리고 2008년 한국에 왔어요.

중국에서 이미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어떤 것이란 것도 알았고 또 텔레비전을 통해 남한의 모습도 간접으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몸으로 체험을 하니 더 좋다고 했습니다.

이설희: 남한에 오니 살만하죠. 제가 탈북자 전문 상담사로 일하는데 오시는 분 80%는 만족해합니다. 대체로 건강에 문제가 있는 50대 60대는 척추나, 관절에 문제가 있어 통증으로 힘들어 하지만 만족해합니다.

기자: 본인은 만족합니까?

이설희: 저야 너무 만족하죠. 내 적성에 맞는 직업을 잡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매일 매일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좋고 후배 탈북자들 한국사회 잘 정착할 수 있게 돌봐주는 것이 뿌듯하고 보람있습니다.

물론 새로운 곳에 다시 뿌릴 내리고 사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기대가 반 설레임이 반으로 행복한 지금의 생활을 가꾸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이설희: 2008년 9월에 집을 배정받았습니다. 그때 3일 동안 집안을 채우는 일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그때 정착금으로 300백만 원을 줬는데 브로커 비용으로 다 써서 막막했었습니다. 김치를 너무 먹고 싶어서 아래 가게를 찾아다니다가 김치는 샀는데 집을 못 찾아서 첫날 엄청 울었습니다. 담당 형사님이 도와줘서 집에 들어와서 처음 일주일은 라면만 먹어서 너무 싫었습니다.

기자: 아니 왜 라면만 잡수셨어요?

이설희: 첫날에는 가스가 연결이 안 되니까 처음 이틀은 돈도 아끼려고 식당에 가서 한끼 정도는 사먹고 삼일 째부터 가스가 연결돼서 라면을 먹기 시작해서 너무 많이 먹어 지금도 라면은 싫습니다.

처음 남한에서 한 일은 빵과 과자를 만드는 기술을 배우는 직업전문학교에 가서 자격증을 취득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씨는 24명 중에 제일 성적이 좋았지만 취업에는 실패했습니다. 나이가 걸림돌이었습니다. 이설희 씨는 취업을 위해 지역사회에서 돌리는 구인구직 광고지를 보고 집 근처에 있는 식당에 취집 합니다. 북한식으로 하는 식당 접대원 일입니다.

이설희: 너무 힘들어 병원에서 20일 입원했습니다. 걷지 못할 정도여서 병원에 갔더니 척추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자: 일반인들은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도 겪은 분들이 왜 그렇게 못 견디는가 하시거든요.

이설희: 건강이 안 따라 갑니다. 의사 선생님들이 하는 말이 탈북자들은 겉으로 보기는 건강해 보여도 혈액 검사를 해보면 부족한 것이 많답니다. 기초체력이 딸린다는 거죠. 솔직히 저도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시절 40kg 되는 옥수수 배낭을 메고 20리 씩 걸어 다녔거든요. 그때 척추를 상했나 봅니다.

북한에서는 나이도 어렸고 당장 생계를 위해서는 아픈지도 모르고 일했지만 막상 남한에 가서 몸이 아파 병원에 가 진단을 받아보니 문제를 안고 살았던 겁니다. 아프지만 않으면 천국일 텐데... 식당일을 하면서 주말마다 탈북자 전문상담사 교육을 받은 것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노동일은 하지 못하게 됐으니 몸을 쓰지 않는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하는데 상담사 교육이 끝나고 본 시험에서도 수석을 해서 바로 채용이 된 겁니다.

북한에서는 일반 노동자로 있었지만 공부에는 자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비록 신분이 좋지 않아 좋은 대학에는 못 갔지만 일하면서 배우는 야간 대학인 기계공장안에 있는 기업소 산하 전문대학 4년을 다닌 경력이 있습니다. 이런 이 씨의 배움에 대한 자세는 남한에서도 이어집니다.

이설희: 공부를 하면 다른 사람들은 책만 들여다보면 잠이 온다고 하는데 저는 한국에 와서 배운 것이 전철 안에서 대학생들이 책을 보잖아요. 그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저도 따라 하면서 내려야 하는 역에서 내리질 못하고 했는데...

어려운 환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도전의 정신이 이설희 씨에게도 강하게 느껴집니다.

이설희: 우선 맘먹으면 뭐든 할 수 있잖아요. 북한에 비하면 여긴 지상낙원이죠.

기자: 이제 남한 생활이 4년차인데 꿈도 있고 하실 텐데 앞으로의 계획은

이설희: 저는 지금 일하면서 배울 수 있는 사이버 대학을 다니고 있습니다. 서울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 2학년입니다. 대학에서도 교수님들이 제 성적이 높다고 대학원까지 갈 수 있다고 하거든요. 석사 과정을 거쳐 박사과정도 같이 하려고요. 그래야 저희가 후배들에게 밀리지 않잖아요. 앞으로 한국에서 살려면 내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제가 다니는 대학에도 60살이 되시는 남한분들이 공부하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도전을 해야 되는 구나하는 생각했습니다. 제 목표는 사회복지학 박사가 돼서 장차 통일이 돼도 북한에 가면 사회복지사나 전문상담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복수 전공으로 상담심리학도 배우고 있습니다.

제2의 고향 오늘은 서울에서 탈북자 전문 상담사로 일하는 탈북여성 이설희(가명) 씨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는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입니다. 고맙습니다.